[이근수의 무용평론]국립현대무용단의 ‘겨울나그네: 시간에게’
[이근수의 무용평론]국립현대무용단의 ‘겨울나그네: 시간에게’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22.12.27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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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 연기, 음악의 합체로 완성된 남정호의 예술혼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꼭 1년 전 세 무용가(김원, 안영준, 차진엽)의 세 개 버전으로 초연한 ‘겨울나그네’가 ‘시간에게’란 꼬리표를 달고 올겨울 다시 관객을 찾아왔다(12.9~11,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겨울나그네: 시간에게’(Winterreise: Dear Time)’란 제목이 시적(詩的)이다. ‘호두까기인형’으로 도배되는 연말 공연가에 새로운 송년 프로그램을 제안하듯 살며시 내민 국립현대무용단의 도전적인 기획이다.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나그네’ 24곡 중 10곡을 선택하고 그중에서도 가장 익숙한 가곡인 ‘보리수’를 네 번이나 들려준다.

공연장소와 무대장치, 악기(피아노와 아코디언)는 작년 그대로고 음악감독(최우정), 베이스(한혜열), 아코디언(김소미), 무대디자인(김종석), 조명디자인(김건영)도 변함이 없다. 윤호근이 피아니스트로 새로 참여하면서 팀으로서의 궁합까지 맞춘 음악진이 이제 원로 반열에 오른 현대무용가 남정호의 멋진 시간여행을 뒷받침한다.

소극장 무대 왼쪽 상수에 피아노 한 대가 놓여있다. 피아니스트가 앉은 자리 뒤 커튼이 쳐져 있고 그 뒤에 아코디언 연주자가 숨듯이 앉아 있다. 무대 한가운데 목제 궤짝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단출한 무대 배치가 차가운 겨울 정취와 어울린다. 텅 빈 무대를 향해 먼저 ‘거리의 악사’(겨울나그네 #24)가 연주된다. 두터운 검정 외투, 은백색 머리, 맨발의 남정호가 걸어 나온다.

궤짝에 걸터앉았다가 일어선 그녀는 두 발로 스텝을 밟으며 천천히 거닐더니 무대 뒤로 뚫린 통로를 통해 빠져나간다. 베이스 한혜열이 등장하여 ‘밤인사’(#1곡)를 노래한다. “이방인으로 왔다가/ 이방인으로 떠나네/...살며시 살며시 문을 닫고/ 떠날 때 문에다 적으리/ 안녕. 잘 자라고….” 노랫말처럼 그의 노래는 소극장을 채운 관객들의 귀를 부드럽게 위로한다.

여인이 다시 등장한다. 무거운 외투를 벗어놓은 그녀는 궤짝 문을 열고 안에서 백골 하나를 끄집어낸다. 머리가 없고 팔다리가 몸체에 붙어 있는 성인의 체형이다. 백골을 끌어다가 뒷벽에 기대 놓고 그 앞에 눕는다.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듯 움직임에 거침이 없고 두려움도 없어 보인다. 아버지의 백골과 함께 있는 그녀에게는 죽음과 삶 간에 차이가 없다.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거리도 없어 보인다. 보리수노래가 들려온다. “성문 앞 우물가에/ 서 있는 보리수/ 그 그늘에서/ 수많은 단꿈을 꾸었네.” 백골이 된 아버지 곁에 누워 그녀는 아버지와의 정다웠던 추억을 소환하면서 이제 노년에 접어든 자신의 시간을 받아드린다. ‘겨울 나그네: 시간에게’란 제목과 어울리는 장면이다. 춤 한 번, 노래 한 곡, 번갈아 가면서 남정호의 시간은 흘러간다.  

남정호가 소녀시절로 되돌아간 것일까, 어린 소녀(김소이)가 바구니를 들고 등장한다. 맑은 음색으로 보리수노래를 무반주로 부른 소녀는 바구니 속에 든 사진을 한 줌씩 꺼내 공중에 뿌리기 시작한다. 66, 67, 68, 69, 70. 소녀가 세는 숫자는 여기에서 끝이 난다. 남정호의 현재 나이다. 자칫 밋밋해질 수 있는 무대에 발랄한 생기를 더해준 고명 같은 연출이었다. 소녀와 백골, 여인이 나란히 벽에 기대고 앉아 있다. 다시 백골을 앞으로 끌고 등에 업고 여인과 백골의 동행은 한참 동안 계속된다. 우체통이 된 궤짝 속에 편지를 부치고 그 안에 들어앉아 휴식을 취하고 난 그녀는 궤짝을 여행 가방처럼 끌고 사라져간다. 

남정호는 언젠가 ‘무용과 연극은 연인, 무용과 음악은 형제’라고 장르 간의 관계를 정의한 적이 있다. 60분 공연에 음악과 춤을 절반씩 섞은 이 작품에서 무용과 음악은 형제라기보다 표리(表裏)관계라는 정의가 더욱 적합할 듯하다. 연극적인 연기가 중심이 된 무대에 무용적인 춤이 좀 더 강조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살짝 남는다. 그러나 이 역시 무용과 연극은 연인이라는 평소 생각의 반영일 것이다.

무용가의 원숙한 연기와 음악가의 정다운 노래가 하나로 합체된 ‘겨울 나그네: 시간에게’는 노년에 접어든 남정호의 예술혼을 숨김없이 표현해준 편안한 작품이었다. 매년 이맘때면 새로운 버전의 <겨울나그네>가 국립현대무용단의 송년기획 레퍼토리공연으로 관객들을 찾아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