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탁의 문화섬 나들이] 향기 나는, 사색적 삶을 살라는 《시간의 향기》
[황현탁의 문화섬 나들이] 향기 나는, 사색적 삶을 살라는 《시간의 향기》
  • 황현탁 작가
  • 승인 2022.12.27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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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작가 “관조적 면 대대적 강화 시급”
▲황현탁 작가

시간이 쌓인 것이 시대이고, 시간의 흐름 속에 일어난 사건이 역사를 구성한다. “시간은 변화이고 과정이며 전개인 것이다. 시간은 결코 머무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흐르는 시간, 즉 세월 속 개개인의 인생역정에는 대소, 강약의 차이는 있겠지만, 향기뿐 아니라 악취가 날 시간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보통의 삶’이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우리가 날마다 자유로이 처리하고 있는 시간이라는 것은 신축성이 풍부하다. 우리가 정열을 느낄 때 그것은 부풀고, 남에게 불어넣으려 하면 줄어들고, 다음에는 습관이 그것을 메운다.”고 한다. 습관이 메우는 시간에 향기만 날까?

한병철은 《시간의 향기》에서 “신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이 시간의 주인”이라고 한다. 개개인을 놓고 볼 때 언제나, 누구나 다 시간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세파에 휩쓸리기도, 강제당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 그 사람을 ‘시간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냄새/방향제’를 이용하여 추억의 환기를 시도하는 ‘프루스트효과’를 체험해 볼 수 있다. ‘사진/영상/글’도 냄새나는 과거를 환생시키는데 유용하다. ‘전자 저장장치나 무선통신’은 지나간 것을 불러오고 공간적 간격을 제거하여 “모든 것을 지금 여기에서 써먹을 수 있게 만들어준다.” 즉 “웹 공간은 불연속적인 사건·사실들의 수많은 링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웹 시간은 불연속적이고 점(点)적인 ‘지금’의 시간이다.”

▲(좌측부터) 한병철 '시간의 향기', '잃어버린시간을찾아서'
▲(좌측부터) 한병철 '시간의 향기', 마르셸 푸르스트 '잃어버린시간을찾아서' (사진= 황현탁 제공)

한병철은 《투명사회》의 <무리 속에서: 디지털의 풍경들>에서 “디지털매체는 나이도, 운명도, 죽음도 알지 못하며, 시간 자체가 얼어붙어 있다, 디지털기기는 이동성을 무기로 모든 곳을 일터로, 모든 시간을 일의 시간으로 만들어 인간을 효과적으로 착취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이동식 노동수용소에서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보의 홍수로 인해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별하는 분석적 능력이 마비된 ‘정보피로증후군환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향기는 느리다. 향기를 시각적 이미지처럼 빠르게 교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국에는 향불연기로 시간을 재는 ‘향인(香印)’이란 향시계가 19세기까지 사용되었다. 시간 측정수단으로 이용되는 물이나 모래와 달리, 향기는 흐르거나 새나가지 않고 공간을 향기로 채운다. 향은 시간을 공간화하고 지속성을 가졌다는 인상을 준다. 한병철은 “이러한 시간의 향기들은 서사적이지 않고 사색적이다.”라고 말한다.

한병철은 “정신이 가만히 서 있을 때, 정신이 자기 안에 편안히 머무를 때, 좋은 시간이 생겨난다. 삶의 과정이 가속화되면서 인간은 사색적 능력을 상실한다.”고 한다. 생활세계의 가속화는 조급증과 산만성을 초래하며, 도중의 ‘머무름’이란 극복해야 할 장애가 되어버린다. 하이데거는 “더 많은 행동보다는 더 많은 머무름이 권태의 저주를 깨뜨릴 수 있다.”고 하면서, ‘느긋함’으로 사색적인 삶을 받아들이고 권태에서 벗어나라고 한다.

▲(좌측부터) 한병철 '피로사회', 한병철 '투명사회' (사진= 황현탁 제공)

한병철은 《시간의 향기》에서 ‘향기가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활동적인 삶’만으로는 부족하며, ‘사색하는 삶’이어야만 한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로운 인간의 세 가지 삶을 쾌락추구, 영예와 미덕이란 업적 추구, 사색적 고찰에 헌신하는 삶으로 구분하며, ‘최고의 행복은 사색에 잠겨 머무르는데서 생겨난다.’고 한다. 그는 일, 효율성, 생산성의 원리 속에 빠져버린 세계를 사는 오늘의 인간으로서는 자유를 박탈하는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사색에 머물 수 있는, 모든 강제에서 해방되는 한가로움은 쉽지 않음을 얘기한다.

중세까지는 ‘사색적인 삶이 활동적인 삶보다 우선’시 되었으나, 캘빈주의에서는 행동하지 않는 사색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일은 신의 영광을 증대시킨다고 여겼고, 산업화시대에는 근면성이 장려되며 인간의 시간을 기계의 시간에 동화시키려 했다. 여가사회에서는 남아도는 시간은 즉흥적이고 남는 것이 없는 휘발성 사건과 체험으로 채웠으며, 소비사회에서는 물건들이 빨리 소비되고 소모되어야 새로운 수요가 창출되므로 ‘사색적 머무름’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서 한병철은 ‘한가로움의 역사는 짧다’고 한다. 그의 설명대로라면, 아직 ‘한가로운 사색적 삶을 영위할 시기가 오지 않았다’고 함이 타당하지 않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은 노예에게 맡기고 노동에서 해방되었기에 모든 이해관계와 강제에서 자유로운 사색적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모리 히로시 '투명사회' (사진= 황현탁 제공)<br>
▲모리 히로시 '고독이 필요한 시간' (사진= 황현탁 제공)

“세계를 만들어 내고 문화를 만들어 내는 사건들은 대체로 한가로움의 결과이거나 강요되지 않은 놀이, 자유로운 상상력의 결과”란다. “오늘날은 사유조차 노동과 유사해졌다. 노동이 아닌 진정한 사유, 숙고가 필요하다.”고 한다. 한병철은 “오직 사색적 삶을 되살리는 것만이 인간을 노동의 강제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니체의 ‘부산한 자가 높이 평가받는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다.’라는 말을 결론으로 대신한다.

저자는 하이데거,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모어, 막스 베버, 한나 아렌트, 헤겔, 마르크스, 니체, 칸트, 괴테 등 수많은 사상가들의 말을 인용하여 삶을 설명하고 있는데,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자신이 없다.

일본의 저술가 모리 히로시(森博嗣)는 《고독이 필요한 시간》이란 책에서 “현대인은 인연의 비만에 시달리고 있다.”라고 하면서, ‘인생이 깊어지는 고독이 필요하다.’고 한다. 한병철의 다른 책 《피로사회》, 《투명사회》 역시 성과중심사회, IT사회 등 현대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부정적 영향에 대한 논고성격의 글인데, 《시간의 향기》 역시 ‘조급증의 시대의 삶’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사색하면서 행동하는 삶을 살라’고 하는데, ‘온갖 인연에 얽히고, 쉼 없이 일에 매달려야 하는 인간’이 일을 도중에 멈추고 숙고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