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프리뷰]연극 <레드>, 무대 위 여섯 번째 캔버스를 걸다
[공연프리뷰]연극 <레드>, 무대 위 여섯 번째 캔버스를 걸다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2.12.29 14: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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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전관 개관 30주년 기념작
유동근, 정보석, 강승호, 연준석 출연

[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추상표현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와 가상 인물인 조수 ‘켄(Ken)’의 대화로 구성된 2인극 <레드>가 지난 20일 막을 올렸다. 

▲연극 ‘레드’ 출연 배우 (왼쪽부터) 강승호, 정보석, 유동근, 연준석
▲연극 ‘레드’ 출연 배우 (왼쪽부터) 강승호, 정보석, 유동근, 연준석

28일 오후, 서울시 서초구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는 연극 <레드> 프레스콜이 열렸다. 이날 자리에는 박명성 프로듀서와 김태훈 연출을 비롯해 배우 유동근, 정보석, 강승호, 연준석 등이 참석했다.

연극 <레드>는 1958년, 뉴욕 씨그램 빌딩에 자리한 ‘포시즌 레스토랑’에 걸릴 벽화 작업 의뢰를 받은 마크 로스코가 40여 점의 연작을 완성했다가 갑자기 계약을 파기한 일명 ‘씨그램 빌딩 벽화’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작가 존 로건은 실화에 머물지 않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가상의 인물인 조수 켄을 탄생시켰고, 처음부터 끝까지 로스코와 켄 단 두 사람의 대화로 극을 구성해냈다.

국내에서는 2011년 초연 이후 여섯 번째 무대 시즌을 맞는다. 박명성 프로듀서는 “<레드>는 여러 시즌을 거치며 경쟁력 있는 레퍼토리로 자리를 잡았다. 극 자체로 힘을 가지는 작품에 좋은 배우들이 함께하며 퀄리티를 유지할 수 있었다”라고 밝혔다. 

이어 “연극이 경쟁력 있는 레퍼토리가 되기는 쉽지 않다. 주위에서 신시컴퍼니는 뮤지컬만 해도 되는데 왜 연극을 하느냐고 묻는다. 나의 철학은 ‘연극을 잘 만드는 팀이 뮤지컬도 잘 만든다’는 것이다. 때문에 좋은 연극을 만들었다는 칭찬을 들었을 때 더 좋은 연극을 만들고 싶은 용기가 생기는 것 같다. 연극에 들어가는 제작비는 아끼지 말자는 주의다. 관객에게 풍요로운 무대를 제공하고, 좋은 배우가 함께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결국 오랫동안 사랑받는 연극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좋은 연극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덧붙였다.

국내 초연 당시 조연출로 시작해, 두 번째 시즌부터 지금까지 <레드>의 연출을 맡고 있는 김태훈 연출은 “텍스트가 강렬한 작품이다. 최대한 본질에 충실하면서도 이 극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표현하려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연극 ‘레드’ 4장 장면 시연 중인 배우 정보석과 강승호
▲연극 ‘레드’ 4장 장면 시연 중인 정보석(마크 로스코)과 강승호(켄)

도도한 자의식에 사로잡혀 누구도 넘을 수 없는 완벽한 성을 쌓고 새로운 흐름을 거부하는 마크 로스코와 그의 편협하고 닫힌 사상을 당돌하게 지목하며 변화를 종용하는 켄. 무대 위 두 사람은 움직이고 소통하고 서로 작용하게 하면서 전쟁과도 같은 치열한 논쟁을 펼치며 공생한다.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휘몰아치듯,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작업실을 가득 채우는 두 사람의 말과 몸짓은 한편의 오케스트라 연주를 마주한 듯한 카타르시스를 관객에게 전한다. 배우 유동근과 정보석이 마크 로스코를 강승호와 연준석이 켄 역을 맡았다. 

2015년, 2019년에 이어 세 번째 마크 로스코 역을 맡는 정보석은 <레드>를 “예술을 소재로 인생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라 설명했다. 그는 “<레드>는 나에게 정말 어려운 공연이다. 첫 시즌 당시, 로스코가 가지고 있는 예술적 고민에 대한 갈피를 잡을 수 없어 괴로웠다. 공연장 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나길 바랄 정도였다”라며 “공연을 하겠다고 결정한 순간부터 끝날 때까지 후회를 반복하지만, 마지막에 남는 아쉬움 때문에 다시 한 번 도전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첫 번째, 두 번째 공연과 연기 자체가 많이 달라진 건 없지만, 그래도 지금은 나름대로 로스코의 고민을 이해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이어 “작품은 살면서 내가 터득한 진실과 진리가 영원할 것이라 착각하지만, 누구나 결국 과거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관객 역시 이 부분에 가장 공감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오랜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유동근은 80년대 민중극단에서 연기를 시작 엘칸토 소극장에서 연극을 하며 명배우로 성장하는 발판을 다졌다. 이후 무대에서 좀처럼 만나보기 힘들었던 그는 연극 <레드>를 관람하고 예술가 '마크 로스코'의 열정과 에너지를 느끼고, 용기를 내 출연까지 결심하게 됐다. 그는 “2019년 정보석 씨가 공연한 <레드>를 보러 왔다가 대사가 참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스코가 가지고 있는 철학과 사상, 대본 자체가 연극을 넘어 하나의 고전 미술사 같은 느낌을 줬다.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산맥이 무엇일지 하나하나 찾아가는 과정을 가진 끝에 무대에 오르게 됐다”라며 “로스코가 가진 비극, 삶에 대한 희로애락의 파장이 너무 커, 거기에 너무 치우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인간 로스코를 표현하고자 한다”라고 설명했다. 

▲연극 ‘레드’ 1장 장면 시연 중인 연준석(켄)과 유동근(마크 로스코)

무대 위에서 로스코와 켄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캔버스를 제작하고, 물감을 직접 조합해 만들고, 거대한 캔버스 위에서 춤추듯 밑칠하며, 심지어는 식사까지 한다. 다시 말해, 등장인물들은 말로만 떠드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이다. 

켄 역으로 새로 합류한 강승호는 “다른 작품에 비해 연습 기간이 길어 공연 시작 전 잘 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는데, 막상 당일이 되니 생각보다 긴장이 됐다. 하지만 관객들과 소통하는 지점이 많아 오히려 좋은 자극을 받고 있다”라며 “극 중 공연 조명이 꺼지고 형광등을 켜는 장면이 있다. 연습 당시엔 내내 형광등 아래에서 연습을 하다 보니, 이게 어떤 효과를 줄까 궁금했는데 극장에 와서 보니 관객과 내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인식이 강하게 박혔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로스코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이 그림이 환상을 만들어낸다’라고 얘기하는데, 나에겐 이 공연 자체가 그렇게 느껴진다. 공연을 통해 관객분들과 배우들이 함께 ‘환상의 순간’을 만끽하고 함께 나눌 수 있길 바란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연극 <레드>는 내년 2월 26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