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열린 하늘’을 향한 천지의 기운
[성기숙의 문화읽기]‘열린 하늘’을 향한 천지의 기운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2.12.30 09: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社稷大祭의 문화유산적 함의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우리는 흔히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史劇)을 통해 “종묘사직에 고하노니”, “종묘사직이 위험하오니” 등의 대사를 접하곤 한다. ‘종묘사직’이란 무엇인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합쳐서 대개 종묘사직이라 부른다. 종묘와 사직은 국가 혹은 왕실을 표상하는 용어로 이해되기도 한다.

봉건전통시대 종묘와 사직에서 거행되는 제향은 이른바 국가의 제사로 매우 중시되었다. 종묘가 왕통(王統)의 정통성 측면에서 중요했다면, 사직은 백성들의 생활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특별하게 인식되었다. 그런데 사직이 더 자주 언급된 것은 백성이 나라의 근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 통치에서 농본이 그만큼 중요했음을 의미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소위 ‘먹고 사는’ 문제가 국가 통치의 관건이 아니겠는가. 

예악사상과 사직대제

주지하듯, 사직대제(社稷大祭)는 사직단에서 토지신과 곡식신에 대한 제향을 올리는 의식을 말한다. 사직은 왕이 백성을 위하여 토지와 곡신의 신께 국가의 안녕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올리는 장소였다. 따라서 종묘대제가 봉행되는 종묘와 사직대제가 거행되는 사직은 국가 존립의 중심체로서 왕권을 표상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1392년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국시로 삼고, 도읍지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긴다. 한양 천도에 있어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전통을 준수했는데, 이는 고대 중국의 법식에 의거한다. 『예기(禮記)』 「제의(祭儀)」에는 “나라의 신위를 모심에 있어 우측에는 사직을, 좌측에는 종묘를 설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조선은 한양 천도에 즈음하여 종묘는 도성 동쪽에, 사직은 도성의 서쪽 안달방에 배치하기에 이른다. 

동쪽의 종묘에서는 종묘대제, 그리고 서쪽의 사직에서는 사직대제가 봉행되었다. 종묘대제는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사후(死後)에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의식으로 왕실 사당인 종묘(宗廟)에서 봉행된다. 사직대제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시고 국태민안과 풍년을 기원하며 드리던 제사였다. 

유가의 예악정신이 스며있는 이러한 국가제례에는 반드시 의례, 진설, 제례악, 제례무가 수반되었다. 먼저 신을 맞이하는 절차로 영신례, 전폐례가 치러진다. 이어 신을 즐겁게하는 절차로서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가 뒤따른다. 신을 보내드리는 절차로서 음복례, 철변두가 이어지고 마지막 망료례로 끝맺는다. 

알다시피, 사직대제의 절차는 유교의 법식에 따라 엄격하게 치러진다. 사직대제의 악무 또한 같은 맥락에 있다. 사직대제에서 연주되는 음악을 일컫어 사직대례악(社稷大禮樂)이라 하고, 춤의 경우는 사직대제 일무(佾舞)라 한다. 사직대제에서 추어지는 일무는 영신례·전폐례·초헌례에서 문무(文舞)를 춤추고, 아헌례·종헌례에서 무무(武舞)가 설행된다. 문무는 문덕(文德)을 기리고 무무는 무덕(武德)을 숭상한 것이다. 

佾舞 _ 질서와 조화

알다시피, 일무는 중국 고대 주(周) 나라에서 유래되었다. 당시 일무는 주대의 예법을 따랐다. 주대는 봉건사회의 계층 간 차별을 유지시켜주는 등급관념이 핵심적 가치로 중시되었다. 사회 모든 분야에 유가의 등급관념이 적용되었고, 이는 반드시 지켜야 할 중요한 규범으로 여겨졌다. 

일무에 내재된 사상적 키워드는 질서와 조화에 있다. 중국 고대 예악사상을 논한 『禮記』 「樂記」에는 “禮는 天地의 秩序이고 樂은 天地의 調和”라는 글귀가 전한다. 공동체의 가치 실현을 위해 예와 악으로서 질서와 조화를 꾀한 것이다. 

우리가 알 듯이, 일무의 형식은 비교적 단조로운 편이다. ‘佾舞’에서의 ‘佾’은 나열한다는 뜻으로 열(列)을 의미한다. 일무의 형식은 무원의 숫자로 가늠되는데, 향유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각기 등급이 다르게 매겨졌다. 

예컨대, 64명으로 구성된 팔일무(八佾舞)는 천자(天子), 즉 황제 만이 향유할 수 있었다. 36명이 등장하는 육일무(六佾舞)는 제후, 그리고 16명이 춤추는 사일무(四佾舞)는 대부 만이 감상할 수 있었다. 최하위 등급인 이일무(二佾舞)는 2명이 춤추는 형식으로 사(士)의 몫이었다. 이처럼 일무의 형식에는 질서와 조화를 꾀하여 유가의 이상사회를 실현하고자 한 예악사상이 스며있다.  

일무에 표상된 주대(周代)의 엄격한 등급관념은 춘추시대에 이르러 무너졌다. 주 왕실의 힘이 미약해지자 예법이 무너졌고, 심지어 천자만이 향유할 수 있는 팔일무가 대부의 뜰에서도 거행되었다. 소위 하극상(下剋上)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무형식에 적용된 등급관념이 점차 쇠락해 갔음을 말해주는 징표라 하겠다. 그만큼 사회가 혼란해졌음을 의미한다.

당시 사회적 혼란상은 『논어(論語)』의 기록을 통해서도 짐작된다. 『論語』 「八佾」 편에는 팔일무를 거행한 대부 계씨(季氏)를 공자가 꾸짖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주대의 예악제도에 따르면 대부인 계씨는 사일무(四佾舞) 만이 허용되었다. 그런데 그가 예법을 무시하고 천자의 춤인 팔일무(八佾舞)를 향유한 것이다. 이는 주대의 전통적인 예법이 붕괴되었음을 반증하는 사례이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유가의 예악사상에 토대한다는 점에서 종묘대제와 사직대제는 상호 유사한 맥락에 있다. 다만 제례공간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가령 종묘대제는 지붕이 있는 유교식 건축공간에서 봉행되는데 반하여 사직대제는 지붕이 없는 제단에서 치러진다. 지붕이 없는, 이른바 ‘열린 하늘’을 향해 제례를 올린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사직대제는 왜 ‘열린 하늘’을 향해 제사를 지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토지신과 곡신신이 자연신이기 때문이다. 공중을 개방함으로써 서리와 이슬, 비, 바람 등 천지의 기운을 직접 맞닿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열린 하늘, 천지의 기운

사직대제는 지난 2000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됐다. 사직대제가 봉행되는 사직단은 경술국치 이후 사직공원으로 바뀌었다. 당연히 사직대제 또한 단절되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문헌자료(『삼국사기』, 『조선왕조실록』, 『경국대전』, 『국조오례의』, 『사직서의궤』)의 발굴, 고증을 거쳐 원형 복원되기에 이른다. 

한편, 사직단(社稷壇)과 직단(稷檀)을 제외한 사직대제 봉행에 필요한 부속건물은 일제강점기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말미암아 적잖이 훼손되어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었다. 지정 당시엔 사직단의 부속건물이 온전히 복원되지 못했으나 현재는 대부분 복원되어 마무리 단계에 있다.

사직대제의 음악 또한 본모습을 되찾아 봉행되고 있다. 한때 종묘대제의 음악을 사용했으나 2021년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 등 문헌기록과 궁중아악을 구전심수로 계승한 전문가들의 노력에 힘입어 본디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봉행되고 있다. 여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해마다 봄과 가을 종묘와 사직에서 수백 년 전부터 봉행돼 온 유교식 국가 제사를 만난다. 오랜 세월 국가 제사를 지켜온 전승자들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가무형문화재 종묘대제 예능보유자인 이기전, 사직대제 예능보유자 이건웅 선생을 비롯 이태우, 이복용 등이 그 중심에 있다. 모두 유교식 국가 제향의 전문가로서 독보적 위치에 있는 분들로 손색이 없다. 

또한 그 아랫세대 전승자들의 노고와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헌신도 빼놓을 수 없다. 일년 내내 이른바 3대 제향으로 불리는 종묘대제, 사직대제, 환구대제 그리고 조선왕릉 제향 등 유교식 국가 제사를 모시기에 쉴 틈이 없다. 이분들의 노력과 헌신으로 유교식 국가 제사에 담지된 문화유산적 가치를 새삼 재음미하게 된다. 

몇 년째 지구촌 전체가 유례없는 역병으로 큰 홍역을 치루고 있다. 사직대제는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최근 몇 년 약식으로 치러졌다. 작년에는 의례 진설만 하고 악무는 생략되었다. 다행히 올해 9월에 봉행된 사직대제는 황사손(이원)이 초헌관으로 참여한 가운데 제례의 전과정이 온전한 모습으로 치러졌다. 

특히 돈화문에서 시작된 대취타를 앞세운 어가행렬은 장관을 이루었다. 사직단에서의 제례는 절차에 따라 엄격이 봉행되었고, 제례악무 또한 엄숙하고 장엄하게 표현되었다. 토지신과 곡식신께 정성을 다한 사직대제를 통해 하늘을 감동시키고 나아가 천지(天地)의 기운으로 조금이나마 역병을 물리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