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이종숙, 학자인가. -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자세로 왜곡을 시정하라!
[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이종숙, 학자인가. -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자세로 왜곡을 시정하라!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23.01.11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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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학자는 ‘편의적인 추측’과 ‘의도적인 해석’을 경계해야 한다. 댄스포럼 2022년 12월호에 실린 이종숙의 글(故 이애주선생 유고도서 3권을 읽고)을 보았다.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의 교육과정과 시대적 맥락을 깊게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함에도 글에서 왜곡과 과장이 존재한다. ‘시각의 차이’를 바탕으로 시시비비를 가릴 만한 내용도 아니다. 어떤 의도가 있진 않고 이렇게 쓸 수 있을까? 

돌아가신 분에 관한 언급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 선생을 윤중강이 만났는가? 이종숙이 만났는가? 우리는 직접 만난 적이 없다. 따라서 그런 인물에 관해서는 매우 입체적이고 다각도의 접근을 요(要)한다. 다행히 지금 국내와 해외에 김보남 선생의 지도를 받은 몇 분이 생존해 계시다. 그 분의 증언을 통해서, 이종숙 글의 김보남에 관한 내용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가 백일하에 드러날 거다. 그러함에도 나는 평자로서 인물에 대한 곡해(曲解)를 준엄히 꾸짖으려 한다. 

김보남과 성경린은 이왕직아악부의 아악부원 양성소 3기생. 그들은 선배들과 다르게 매우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재학시절부터 자발적으로 회람(문집)을 발행하는 등 매우 활발히 활동을 했다. 그 때 유난히 친한 3기생 5총사가 있다. 이주환, 봉해룡, 성경린, 태재복, 김보남으로, 함께 찍은 사진이 증명한다. (1973년 5월 26일자, 경향신문 4면) 성경린이 쓴 글에선, 성적의 1등 김보남, 2등 성경린이었음을 밝히면서, 술과 담배도 또한 그러했다고 술회한다. 

성경린의 글에 김보남의 술에 관한 에피소드가 나오는 건 분명하다. 이종숙은 이걸 읽고 김보남은 “술과 유흥을 유난히 즐겼던 인물”로 단정해 버렸다. 원문(原文)을 교양있는 독자에게 읽도록 해보자. 과연 ‘유흥’을 키워드로 꼽을 사람은 있을까? 

‘개인의 관심사’라고 쓴 이유는 뭔가? 

첫째, 이종숙의 ‘개인의 관심사’란 표현이 우습다. “김보남이 한성준에게 춤을 배운 것은 개인적인 관심사를 따른 것”이라 한다. 최승희도, 조택원도 ‘개인적인 관심사’로 한성준과 인연을 맺었다. 아악부의 일개(一介) 아악생의 관심이라 ‘개인의 관심사’인가? 이왕직 아악부 자체에는 무용전공이란 아예 없다. 악기전공(피리, 대금, 해금 거문고, 가야금, 비파)으로 나뉜다. 궁중의례를 수반하는 목적으로 양성하는 교육기관이었기에 궁중무용은 필수였다. 

해방이후, 대한민국의 국악발전에 혁혁하게 공헌한 분은 모두 ‘개인의 관심사’에서 출발했다. 김천흥(2기)과 김보남(3기)은 무용을 배웠고, 이병성(2기)과 이주환(3기)은 외부에서 가곡을 배웠고, 홍원기는 최상욱이란 분을 찾아가 시조(우조시조)를 배웠다. 그러했기에 맥이 이어진 거다. 일찍이 ‘춘앵전’을 잘 추기로 알려진 이병호(예명 이병우, 1기)는 다양한 악기를 연마해서, 조선악극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끌려간 영친왕 앞에서 연주했다. 안익태가 귀국을 해서 ‘코리아 환상곡’을 연주했을 때 오보에 솔로를 했다. ‘개인의 관심사’라는 말로 김보남의 활동을 일축(一蹴)하는 저의는 무엇인가? 

이종숙도 글을 보았을 텐데, 어찌 이토록 문해력(文解力)의 차이를 보일까? “전공인 피리보다 오히려 무용으로 둘레인 소지(素地)는 이 때의 박람(博覽)인 것”으로 김보남의 무용계의 정진을 아주 높이 평가한다. 한성준 문하에서 춤을 배우고 익히며 견문을 넓히면서 사물을 넓게 본, 곧 박람(博覽)으로 아주 높이 평가한다. 

둘째, ‘잡수입’이란 표현을 끄집어낸 게 참 얄궂다. 성경린의 글에도 분명 잡수입이란 말이있다. 이종숙도 인용문을 게재하기는 했으되, 이종숙은 ‘피리 전공 관악 차비로서 잡수입도 추구했던 당시’라는 말로 압축한다. 성경린 글의 행간은 무슨 뜻인가? 성경린은 거문고전공, 김보남은 피리전공이다. 관악은 현악에 비해 외부활동 및 무용 반주의 기회가 많았다. 이건 재학시절 일이등을 다투던 절친 사이에서 김보남을 부러워하는 맥락이다. 외부와도 접촉을 가져 견문도 넓히면서, 또한 용돈벌이(잡수입)를 할 수 있는 일거양득을 부러워한 맥락이다. 

실언(失言)과 망언(妄言) 

셋째, ‘유흥’이란 단어를 끄집어 낸 것에 대해서, 학자 이종숙에게 묻고 싶다. 성경린이 쓴 ‘유흥’과 이종숙이 쓴 ‘유흥’은 매우 다르다. 그 시절 ‘매일 같은 유흥의 비용은 대개 그의 주머니에서 나왔다’라고 써 있다. 이건 김보남과 성경린이 유흥을 즐겼다는 말이 아니라, 외부활동의 수입이 있던 김보남 자신이 늘 술값을 냈다는 얘기다. 일반 독자라면 한 번에 알 수 있는 내용인데, 그걸 가져와서 이종숙은 김보남을 ‘술과 유흥을 유난히 즐겼던 인물’로 둔갑시켜 버렸다. 이러한 실언(失言)이자 망설(妄說)은 ‘사자(死者)에 대한 명예훼손’의 범주에서 따져야 할 사안이다. 

해방 이후, 김보남의 활동은 이미 국악계나 무용계에서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부산시절부터 10년 남짓 병마와 싸우다가 결국 1964년 4월 15일 위암으로 별세했다”고 한 문장으로 정리해 버린다.

이종숙은 한자 표기 잘못한 것을 문제 삼고 있는데, 실제 김보남은 이왕직 아악부의 수장(首長) 역할을 했다. 이왕직 아악부 3기 출신의 리더로서, 해방이후 여러 역할을 했다. 일찍이 경성방송국(JODK) 시절부터 ‘봉해룡의 단소와 김보남의 양금’은 유명했는데, 이걸 무용음악 반주로 정착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해방 후, 나라의 재정이 열악한 상황에서, 1947년 “정악강습회”가 시작되었다. 이왕직아악부에서 전승된 전통음악과 전통무용을 일반인에게 알리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혜구(경성방송국 아나운서 겸 프로듀서, 훗날 서울대교수)와 아악부 3기생의 3총사 성경린, 이주환, 김보남이 주도했다. 

무용역사가라면, 1947년에 설립한 ‘교육무용연구소’를 알 것이다. 1947년 5월 함귀봉이 중심이 되었는데, 여기에 김보남이 힘을 보태서 무용을 지도했다. 이 시기를 회고하는 국악계는 김보남을 가리켜서 ‘광복 전후를 통하여 한국무용을 대표하는 제 1인자’라고 한다. 

1949년 2월, 문교부 예술위원회가 발족했다. 문학,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무용의 6개의 분과였다. 예술계가 이념의 대립을 겉으로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이전이었는데, 김천규, 함귀봉, 김민자, 조용자. 김보남. 5인을 분과위원으로 위촉했다. 

1950년대의 궁중무용 학습을 기억하는 생존 국악인들  

1950년대의 한국사회가 정재(궁중무용)에 관심을 둔 시기가 아니었음에도 김보남은 국악사양성소에서 궁중무용을 가르쳤다. 1955년부터 1959년까지 국악사양성소에 입학한 학생들은 모두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아울러 KBS국악연구회 출신들이 조직 개편으로 해서 국립국악원 여자연구원으로 활동을 시작했을 때, 궁중무용을 다시 다듬어 준 분도 김보남이다. 여창가곡 예능보유자 조순자 명인은 이 시절 김보남 선생이 장구를 잡으면서 휘파람을 불면서 춘앵전을 지도했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1950년대 김보남은 국립국악원(운니동 98번지)에서 오후에 일반인 강습을 참 많이 했다. 그들에게는 궁중무용을 쉽게 가르쳤다. 지금도 무용지도자가 대학에서 전공자를 가르치는 것과 문화센터에서 취미로 하는 가르침은 레벨이 다르지 않은가? “당시 김보남은 궁중무용을 특히 지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이종숙의 글은 틀린 것은 물론, 궁중무용을 생명처럼 여기며 산 분께 정말 커다란 무례(無禮)를 범한 거다. 

국립국악원의 도일(度日) 공연을 앞두고 서울에서 시연이 있었다. 이 때 작곡가 김성태는 처음 본 궁중무용을 보고 감탄해서 글을 썼다. (1964. 3. 9. 동아일보) 이 때 궁중무용을 총괄한 분이 누군가? 김보남이다. 그러함에도 안타깝게도 그는 건강 악화로 최종적으로 도일공연 명단에는 빠질 수밖에 없었다. ‘10년 남짓 동안 병마와 싸우다가, 결국’ 타계한 분이라 써야 했는가? 

김보남 선생은 1955년에 직접 무대에 올랐고, 1959년에는 무용대회의 심사를 맡는 등, 1950년대 김보남의 대외적 활동은 매우 활발했다. 무용을 연구하는 학자라면, 그 기간 그가 얼마만큼 한국무용 및 궁중무용을 위해서 애썼음을 알리는 게 오히려 도리가 아닐까? 이종숙은 성경린의 예전 글(1975년)을 인용했는데, 이후의 글(1996년)은 읽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펼치는 주장과 상당히 거리감이 있어서 뺀 것일까? 

평소 맥주를 즐겼던 것으로 알려진 김보남은 매우 성실한 분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아악부 시절, 아들이 세상을 떠났음에도 출근을 한 분이다. 아들의 참척(慘慽)에도 방화훈련을 받았다고 해서, 이왕직 장관의 표창을 받은 바 있다. 

타계 한 달 전에도, 자신의 역할을 다 했던 김보남   

1964년 4월 15일, 김보남은 타계했다. 1964년 3월 19일, 성균관에서 봄 제사가 열렸다. 일무(佾舞)를 가르치고 악사를 동원해서 춘석전의 주악(奏樂)이 잘 마무리되었다. 이에 대해 국악계는 김보남 선생의 마지막 봉공(奉公)으로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 타계하기 한 달전까지도 궁중제례와 궁중무용을 위해서 심신을 다 받친 분께, 어떻게 ‘병마와 싸우다가 결국 1964년 4월 15일 위암으로 별세했다’고만 적을 수 있겠는가! 

그의 글은 김보남이란 개인은 물론이요, 1950년대의 국립국악원 및 국악사양성소의 교육과 관련해서, 잘못된 내용을 기정 사실화 할 수 있는 위험성이 다분하다. 고인의 명예와 정재의 교육과 관련해서, 한국전통악무연구소 이종숙 소장의 이후 태도를 예의주시하겠다. 당사자의 결자해지(結者解之)를 주문한다. 왜곡된 부분에 대한 철회(撤回)를 전제로 해서, 국악계와 무용계에 공식적으로 사과할 사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