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비평]<피가로의 이혼> 초연, 창작 오페라 지평 넓혀
[이채훈의 클래식비평]<피가로의 이혼> 초연, 창작 오페라 지평 넓혀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3.02.07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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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패러디’ 등 다양한 작곡기법 활용한 역작
‘블랙코미디’다운 명료한 구성과 음악 아쉬움 남겨

100분의 공연이 끝나자 객석에서 "참 재미있다"는 찬사가 들렸다. “미니멀한 무대여서 편안하게 볼 수 있었다”는 얘기도 들렸다. 2월 3일 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에서 그랜드오페라단(단장 안지환)의 <피가로의 이혼>이 초연됐다.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의 속편으로 21세기 한국 부부와 젊은 남녀의 사랑과 갈등을 그렸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모았고, 모차르트 오페라를 패러디했다니 어떤 음악과 드라마가 펼쳐질지 무척 궁금했다.  

▲창작 오페라 ’피가로의 이혼’ 커튼콜 ⓒ이채훈 기자
▲창작 오페라 ’피가로의 이혼’ 커튼콜 ⓒ이채훈 기자

음악은 가사를 명료하게 잘 담았고, 우리 전통 선율을 적절히 가미하여 친근하게 다가왔다. 유머러스한 불협화음을 구사하거나 휴대폰 신호음을 기악으로 표현한 대목은 재기발랄했다. 피가로의 아리아 <길을 걸어도 네가 있고>는 매우 아름다웠다. 고답적인 전통 오페라도 아니고 흔한 코미디나 멜로물도 아니었다. 현대인의 고독한 삶의 단면을 부각시킨 ‘블랙코미디’였고, 음악도 이에 어울리는 분위기여서 참신했다. 우리 창작 오페라의 ‘단짝’으로 알려진 작곡가 신동일과 작가 박춘근의 협업이 낳은 열매였다. 

무엇보다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에서 주제를 인용하여 자유롭게 변형한 대목들이 흥미로웠다. “산들바람 부드럽게 노래하면”이란 가사에 영화 <쇼섕크 탈출>로 잘 알려진 백작부인과 수잔나의 이중창 ‘산들바람의 노래’가 흐르도록 하여 공감을 일으켰고, 케루비노가 줄자로 의자와 탁자의 사이즈를 재면서 “오, 십, 십오, 이십…” 할 때 <피가로의 결혼> 첫 장면의 이중창을 사용하여 웃음을 자아냈다. 마지막 ‘모두의 시선’이 시작될 때 모차르트 교향곡 40번 G단조의 주제를 사용해서 재미를 더했다. ‘산들바람의 노래’가 다시 등장하는 ‘수잔나의 시선’ 마지막 사중창, 그리고 네 명이 다함께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나는 지금 누구에게 가고 있을까?” 노래할 때 <피가로의 결혼> 피날레 주제를 활용한 대목은 이 오페라에서 가장 훌륭했다.  

언론을 통해 ‘모차르트 패러디’라고 알려진 작품이지만 모차르트 패러디는 예상보다 많지 않았다. 작가가 <피가로의 결혼>을 염두에 두고 쓴 것으로 보이는 대목에서 모차르트 주제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다소 의아했다. 다 함께 “좋은 시절 지나가 버렸네, 행복한 그날들 어디로 갔을까” 탄식할 때 백작부인의 3막 아리아(Dove sono), 케루비노가 “내가 누구인지, 내가 뭘 하는지 모르겠네” 노래할 때 케루비노의 1막 아리아(Non so piu cosa son), 바리나가 “나는 여기에 왜 온 걸까, 내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독백할 때 바르바리나의 4막 카바티나(L’ho perduta)의 모티브를 사용했으면 자연스럽게 다가왔을 것이다. 아예 오페라 전체를 과감하게 모차르트 음악의 변주와 확장으로 가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에 대한 ‘네 개의 시선’으로 구성한 것은 신선했고, 가사는 전체적으로 명료하게 잘 전달됐다. 피가로가 바리나에게 눈독 들이는 걸로 설정한 것은 <피가로의 결혼>에서 백작이 수잔나에게 한눈 파는 것을 피가로가 되풀이하는 재미있는 설정이었다. 그러나 에피소드들이 주제를 향해 모아져야 하는데 나열에 그쳐서 집중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울러, ‘네 개의 시선’으로 구성했다면 시선이 바뀔 때마다 음악도 일정한 변화를 주고, 네 주인공에게 좀 더 뚜렷한 음악적 개성을 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네 등장인물의 성격이 명료하지 않아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대목이 있었다. 피가로의 경우, 아리아 <길을 걸어도 네가 있고>에서 진실된 사랑을 노래하지만 바리나에게 “양평 드라이브 가자”며 간을 볼 때는 단순한 희롱처럼 보인다. 케루비노는 <피가로의 결혼>에서 분명히 이성애자인데, <피가로의 이혼>에서는 동성애자라는 자기 정체성을 감추고 있다. 그동안 바리나를 속이고 이용했다는 결론이니 다소 허망하다. 바리나는 케루비노를 열렬히 사랑하면서도 피가로에게 슬쩍 문을 열어 놓기도 하는데, 현대인의 분열을 풍자하려는 의도인지 모르지만 일관성이 부족해 보인다. 수잔나는 “결혼생활의 가면을 벗어버리겠다”고 노래하지만, 결론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지막 넘버에서 “좋은 시절 지나가 버렸네, 행복했던 그 날은 어디로 갔을까?”를 단순 반복한 게 최선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피날레에서 뭔가 새로운 게 나오는 게 낫지 않았을까? 

▲창작 오페라 ’피가로의 이혼’ 무대
▲창작 오페라 ’피가로의 이혼’ 무대

이 작품은 엄연히 신동일의 창작 오페라다. 신동일은 스케일이 크고 음악적 표현기법의 스펙트럼이 넓은 작곡가다. 피아노 모음곡 <노란 우산>과 <푸른 자전거>부터 다양한 영화음악과 어린이 음악을 거쳐 세월호 레퀴엠 <쪽빛의 노래>까지 그는 매우 다양한 음악 어법을 구사해 왔다. 최근 오페라 <빛아이 어둠아이>(2021)에서는 스토리와 배경에 어울리는 환상적인 음악을 선보였고, ‘부부 맞짱 드라마’ <로미오 vs 줄리엣>(2022)에서는 두 주인공의 심리변화를 자유자재로 표현하는 신공을 발휘했다. <피가로의 이혼>은 이 오페라들의 연장선에서 그가 오랜 세월 축적해 온 음악적 성과를 종합한 작품이다. 

작곡자 자신이 밝혔듯 <피가로의 이혼>은 “전통적인 조성음악 뿐 아니라 대중음악을 연상시키는 화음들, 온음 음계, 다양한 형태의 불협화음 등 여러 가지 작곡기법을 활용한 작품”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음악적 요소를 넣었기 때문에 오히려 음악이 복잡해진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떨치기 어려웠다. 작곡자가 10여년 전 코믹 오페라 <테이크아웃>(2011)에서 보여준 거침없는 활기와 단순한 생명력을 이번에는 찾아보기 어려워서 아쉬웠다. ‘음악에 너무 생각이 많았다’는 건 나만의 느낌일까? 

<피가로의 이혼>은 참신한 아이디어로 우리 창작 오페라의 지평을 넓혔다. 장기 공연을 위해 개선해야 할 점이 없지 않겠지만, 맛갈난 무대로 창작 오페라의 발전된 수준을 확인케 해 준 좋은 작품이었다. 안지환 단장은 공연 다음날 페이스북에 올린 ‘출연 제작진 여러분께 드리는 글’에서 이번 공연의 성과를 정리한 뒤 “오페라 작품을 쓸 때마다 완벽을 추구하지만 늘 불만족스러워 다시 도전해 볼 의무가 있다”는 베르디의 말을 인용했다. 다양한 관객의 피드백을 참고하여 앞으로 있을 더 좋은 프로덕션의 거름으로 승화시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