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고결한 선비 우계 성혼을 만나다
[성기숙의 문화읽기]고결한 선비 우계 성혼을 만나다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3.02.08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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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록 성의순 선생의 성균관 여정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말 없는 청산이요 태 없는 유수로다/ 값 없는 청풍이요 임자 없는 명월이라/ 병 없는 이내 몸도 분별없이 늙으리라”
  
조선중기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철학자이고 교육자인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이 지은 시조다. 함께 있을 때면 늘 이 시조를 읊조리는 분이 계신다. 바로 혜록(惠祿) 성의순(成義順) 선생 얘기다. 우리말로 또는 영어로 낭송하는 모습이 수준급이라서 보는 이를 매료시킨다. 

우계 성혼의 정신과 업적을 선양하는 재단법인 우계문화재단(이사장 성유경) 일로 성의순 선생을 가끔 뵌다. 우계의 시조를 달고 사시는 선생 덕분에 필자 또한 시조 몇 수를 흥얼거리는 습관이 생겼다. 시어를 곱씹고 음미하다보면 저절로 마음수양에 도달하는 것이 실로 경이롭다. 이렇듯 우계에 대한 성의순 선생의 사랑과 관심은 주변에 선한 바이러스를 선사한다.   

그런 선생이 얼마 전 『고결한 선비 우계 성혼을 만나다』(글벗교양, 2022)라는 제목으로 단행본을 냈다. 이 책에는 우계 성혼을 기리고 선양한 성의순 선생의 정성과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책은 우계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물은 아니다. 이른바 ‘유교문화 지킴이’로서 성의순 선생의 다양한 활동을 촘촘히 묶은 개인 기록물에 가깝다. 그럼에도 책에 수록된 우계의 선양작업과 성균관에서 보낸 인생 후반기의 삶의 여정은 깊은 감동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놀아도 성균관에 가서 놀자”

창녕(昌寧) 성씨(姓氏) 후손인 성의순은 1938년 경기도 양주에서 10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일제지배 말기에 유년시절을 보내고 1950년 발발한 6.25 전쟁을 몸소 겪었다. 당시 경험한 전쟁의 상흔은 그에게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 그리고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 투철한 국가관과 민족애 그리고 애국심을 갖도록 불을 지폈다.

성의순은 또래에 비해 정규 학교 입학이 늦어졌다.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궁핍이 가장 큰 이유였다. 집안의 가부장적 유교문화의 완고함도 한몫 했다. 여자라는 이유도 있었을 게다. 그러나 ‘여자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큰 오빠의 지원과 격려로 뒤늦게 학업에 뛰어들었다.

한국 여성교육의 명문사학으로 손꼽히는 정신여고와 숙명여대에서 수학한 것은 큰 행운이었다. 1959년 숙명여대 상학과를 졸업하고 동(同) 대학원 경제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전 학년 장학금을 받고 다녔을 정도로 학업에 대한 성취욕이 높았다.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모교에 교육자로 남을 계획이었다. 아쉽게도 교수사회의 파벌싸움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국가공무원시험에 합격하여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에서 약 40여 년간 봉직했다. 여성으로서 개발도상국 시절 한국의 경제 정책 구현의 최전선에 있었음을 특별한 자부심으로 여긴다. 1960~7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토대한 ‘한강의 기적’이 실현되는 초고속 성장의 숨은 주역이었음을 숨기지 않는다.

성의순의 제2의 인생은 경제기획원 퇴임 이후 화려하게 만개된다. 우연한 곳에서 인연이 시작됐다. 평소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그는 서울 사대문 안 조선시대 궁궐을 자주 찾았다. 어느 날 경복궁에서 개최된 전통강좌를 통해 여러 전문가를 만나면서 새로운 인생이 펼쳐진다. 제례 전문가인 김득중 선생, 성균관 여성유도회의 손영희 회장, 우계문화재단의 성기웅 교수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후 성의순의 인생은 큰 변곡점을 맞는다. “놀아도 성균관에 가서 놀자”를 모토로 성균관 여성유도회중앙회에서 실시하는 명덕학당 제15기로 본격 발을 내딛었다. 여러 강좌를 통해 유교사상을 비롯 의례, 전통예절, 인성교육, 다도 등을 전문적으로 배웠다. 내친김에 석전교육원에 등록하여 석전대제(釋奠大祭) 전반을 폭넓게 섭렵했다. 

주지하다시피, 석전대제는 문묘, 즉 성균관 대성전에서 유교의 성현을 제사 지내는 의식을 말한다. 문묘에는 인류의 스승 공자를 비롯 공문 4성(孔門四聖: 안자·증자·자사·맹자), 공문 10철(孔門十哲: 민손·염경·염옹·재여·단목사·염구·중유·언언·복상·전손사), 송조 6현(宋朝六賢: 주돈이·정호·정이·소옹·장재·주희), 그리고 아국 18현(我國十八賢: 설총·최치원·안유·정몽주·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이이·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시열·송준길·박세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우계 성혼, 참 선비의 표상

알다시피, 우계 성혼은 문묘에 배향된 아국 18현 중 한 분이다. 우계는 한마디로 참 선비의 전형으로 손꼽힌다. 종이로 옷을 지어 입을 정도로 궁핍했음에도 부귀영화를 탐하지 않았다.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고 파산(坡山, 지금의 파주)에 은거하며 학문에 탐닉했다. 

성혼의 부친 성수침(成守琛)은 기호사림을 상징하는 인물로 회자된다. 그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삶의 대부분을 은둔하며 도학(道學)을 강명하는데 힘썼다. 1535년 한성의 순화방에서 태어난 성혼은 부친을 따라 외가가 있는 파산으로 옮겨 일생을 보낸다. 

경기도 파주는 조선 중기 성리학자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터 잡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은 형제 이상으로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 두 사람은 더없는 절친이면서도 대립과 갈등의 정점에서 치열한 논쟁도 서슴치 않았다. 예컨대,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하면서 벌인 이른바 우율논변(牛栗論辯)은 당대 주목도가 높았다. 

찬찬히 살펴보면, 성혼의 배움은 깊고 넓었다. 부친 성수침을 통해 가학(家學)을 이었고, 퇴계(退溪) 이황(李滉) 문하에 사숙하면서 학문을 익혔다. 또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이 파산의 우계 집에 머물 때 공부를 청하여 사유의 깊이를 더했다. 

그는 평생 임금의 부름에도 나아가지 않고 학문정진과 후학양성에 전념했다.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을 지녀 선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조헌, 안방준, 이시백, 정엽 등이 언급된다. 제자들을 중심으로 우계학파가 형성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귀결이라 하겠다. 

우계학파의 도통(道通)은 사위 윤황을 거쳐 외손자 윤선거, 그리고 외증손자 윤증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견고하게 구축된다. 특히 윤증은 송시열과 더불어 당대 유림을 호령한 최고 실력자였다. 그러나 후일 두 사람은 이념적 견해 차이로 관계가 틀어졌다. 이후 기호유림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되었다. 성혼의 외증손자 윤증은 소론의 영수가 됐다. 말하자면, 우계 성혼의 학통은 소론의 사상적 원류가 되는 셈이다.  

성혼은 임진왜란 때 모함을 받아 고초를 겪다가 1598년 타계했다. 그후 1602년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삭탈관직(削奪官職) 되었다가 1633년 관직이 복권되었다. 인조 11년(1633년) 문간공(文簡公)이라는 시호를 받고, 이후 율곡과 더불어 문묘에 배향되어 오늘에 이른다.

문간(文簡)이라는 시호에서 ‘문(文)’은 도덕에 대한 견문이 넓음을 의미하고, ‘간(簡)’은 한결같은 덕을 간직하여 게으르지 않음을 뜻한다. 이렇듯 성혼의 시호 문간에는 심오한 뜻이 깃들어 있다. 혜록 성의순 또한 문(文)·간(簡)의 의미를 내면화하고 실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선생을 존경하는 이유다. 

혜록 성의순, 유교문화 지킴이

성의순의 우계 성혼을 기리고 선양하는 작업은 실로 다채롭다. 우선, 우계의 정신을 반추하고 알리는 독서토론회를 이끌었다. 독서토론회는 우계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파주지역을 거점 삼아 경기도 전역으로 확대되어 큰 관심을 모았다. 

우계 선생의 춘향제 때에는 제례가 끝난 후 다양한 문화행사를 곁들여 호응을 얻었다. 우계의 시조를 원천으로 음악을 작곡하여 선뵈었다. 또 스스로 우계가 지은 시조를 영어로 낭송할 정도로 열정적이다. 우계를 널리 알려야 한다는 신념으로 콘텐츠 확장을 위해 늘 고심한다. 우계 성혼 만화책을 각급 학교에 배포하는 일도 같은 맥락에서 열심이었다.

뿐만 아니다. 성혼과 부친 성수침이 모셔져 있는 파산서원 인문학 답사를 주도했다. 우계 사당에서 봉행되는 제례의식 때엔 절차, 예복, 예찬 등 전통법식을 준수하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선생은 지금도 우계의 정신적 흔적이 남아있는 유적지 발굴을 숙제로 안고 다니신다. 이렇듯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우계 성혼을 기리고 선양하는 일에는 늘 앞장선다.

한편, 성균관 일에도 열과 성을 다한다. 성균관의 석전교육원, 명덕학당에서 수학하고 여러 직책을 맡았다. 석전교육원 교육부장, 문묘 해설사를 지내고 성균관 전학 및 전례사로 활동하고 있다. 2년 전 여성으로서는 두 번째로 손영희 선생에 이어 성균관 부관장에 선임되는 영광을 안았다.   

혜록 성의순 선생은 일상에서도 늘 예학을 숭상하고 실천한다. 선생의 절제된 언행에는 공손과 겸양 그리고 배려의 미덕이 넘친다. 상대방에게 진심이 스며들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렇다. 성의순 선생은 사랑(愛)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조화롭게 하는, 이른바 인(仁)의 실천자로서 유교문화의 진정한 지킴이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