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기획ㆍ평론 수상자 윤진섭 평론가 “모르면 쓰레기, 알면 예술”
[Special Interview]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기획ㆍ평론 수상자 윤진섭 평론가 “모르면 쓰레기, 알면 예술”
  • 이은영 발행인ㆍ이지완 기자
  • 승인 2023.02.15 10: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병상서 들은 수상소식, 사회에 대한 감사함 느껴
‘단색화’ 명명 이후 20년, 본질 조명 안 돼 아쉬워
자본주의 시대, 파편화된 예술계…‘사회 환원’ 중요한 가치
교육자ㆍ비평가ㆍ기획자ㆍ작가, 모두 아우르는 삶 꿈꿔
“사소한 것으로부터 예술 시작한 ‘마르셸 뒤샹’ 존경하는 아티스트”
▲오더(order), 《모르면 쓰레기, 알면 예술》(2021.12.11.) 퍼포먼스 현장 (사진=윤진섭 SNS 캡쳐)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ㆍ이지완 기자] 오더(Order) 작가(윤진섭 평론가 예명)는 목포에서 《모르면 쓰레기, 알면 예술》(2021.12.11.)이라는 퍼포먼스를 했다. 폐업한 해장국 집 앞에 뒹굴고 있는 잡뼈를 나무 쟁반 위에 담아 들고 가서, 예술 공간에 들어가는 철문 위에 하나씩 올려놓는 행위였다. 오더의 지인이 그 퍼포먼스를 핸드폰 영상으로 담고 있자, 지나가던 한 남자 행인이 오더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오더는 자신이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고 답했고, 그 남자 행인은 “알고 보면 예술인데, 모르고 보면 쓰레기네.”라고 말을 하고 떠났다고 한다.

윤 평론가는 자신의 얼굴책(Facebook)에 “내게 지고(至高)의 가치가 있는 것도 남에게는 빵 한 조각만큼의 가치가 없는 것이 있다. 오브제(objet)가 바로 그런 경우다. 남이 버린 물건을 주어다 재활용하는 일은 새로운 창조에 버금가는 일인데, 그렇게 만든 것들이 남에게는 한 푼의 가치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역사라는 것은 참으로 묘해서 미술관은, 특히 현대미술관은 오브제의 관점에서 봤을 때 ‘쓰레기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르셀 뒤샹, 쿠르트 쉬비터스, 백남준, 피에로 만조니, 아르망, 로버트 라우센버그, 이승택 등등 오브제를 활용한 작품을 만든 아티스트들은 일종의 넝마주이가 아닌가?”라는 글을 남긴 바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하나의 고정된 이념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우리는 무엇을 예술이라고 할 수 있고, 무엇이 예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독일의 행위 예술가 요셉보이스가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라고 말한 지도 벌써 오랜 시간이 흘렀다. 예술, 예술가, 그리고 한 인간. 우리는 이 가치와 존재들을 명징하게 명명할 수 있을까.

2월 초 서울문화투데이 사무실에서 진행된 제 14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기획ㆍ비평 부문 수상자 윤진섭 평론가의 인터뷰는 하나로 정의 될 수 없는 그의 100여 개 자아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 시간이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및 같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한 윤진섭은 1976년 《한국미술대상전》에서 입선을 하면서 작품을 선보인다. 이후 S.T그룹에서 활동하며 행위예술가의 길도 걸어간다. 1977년 《제6회 S.T 그룹전》에선 <서로가 사랑하는 우리들(We stroke)>을 발표했다. 또 한 번의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된 때는 1990년 동아일보 미술평론에 등단하면서다. 그 이후 윤진섭은 예술가이자, 평론가, 기획자로서의 길을 걸어간다. 평론가 등단 이후에도 그는 꾸준한 작품을 선보였다. 2013년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대중의 새 발견-누가 대중을 상상하는가》에 참여해 똥 드로잉을 발표하고 ‘똥 선언문’을 배포했고, 2021년에는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서 개인전 《아트 오브 도플갱어 윤진섭》을 개최한 바 있다.

이번 수상자로 선정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고려됐다. 한국의 ‘단색화(Dansaekhwa)’를 과감하게 정의하고, 2004년 《제 4회 서울미디어아트비엔날레》 총감독,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의 단색화》전 초빙큐레이터, 《2016 창원조각비엔날레》의 총감독을 맡으며 굵직한 전시를 기획한 그의 공로에 주목했다. 또한, 등단 이후 쉬지 않고 이어온 노련한 비평적 시각도 주목했다. 서울아트가이드와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에 비평을 꾸준히 실어왔고, 본지에 칼럼을 연재한 지는 올해로 10년이 됐다.

이번 인터뷰 역시 그의 ‘기획ㆍ평론’적 시각을 들어보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터뷰는 예상과 다르게 흘렀다. 두 시간 여의 인터뷰는 윤진섭이라는 예술가의 무한한 깊이를 만나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작품 활동부터, 대학시절 선배 예술가와 함께 했던 시간들, 그리고 ‘단색화(Dansaekhwa)’라는 용어 정착의 시작과 과정까지 담겨있었다. 동시에 앞으로 꾸준하게 이어질 그의 창작과 작업에 대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올해는 건강을 지키며 조금은 차분한 시간들을 보내겠다고 했지만, 잘 모르겠다. 그의 활력 넘치는 100여 개의 자아가 윤진섭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것 같다.

▲윤진섭 평론가 (사진=윤진섭 제공)
▲윤진섭 평론가 (사진=윤진섭 제공)

제14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기획ㆍ비평 수상을 축하한다. 이번 문화대상 수상은 어떤 의미였는지.

문화대상 시상식 현장에서도 말했지만, 이번 수상 소식을 병상에서 듣게 됐다. 12월 초, 밤중에 귀가하던 중 음주운전자가 모는 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다. 자칫 잘못하다간 죽을 수 있는 위기였다. 중환자실과 일반병동에 40여 일 동안 누워있으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그때 수상 소식을 듣게 됐는데, 굉장히 겸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아직 이 사회로부터 버림받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무한한 고마움을 느꼈다. 5백 명 넘는 사람에게서 축하를 받기도 해 더욱 고마움과 기쁨이 배가됐다.

데뷔 후 지금까지 33년간 평론 활동을 했고, 동시에 퍼포먼스도 해왔다. 내 퍼포먼스와 사유를 기록하고 있는 얼굴책(facebook)은 13년간 지속해왔는데, 어느 순간 게재된 수많은 콘텐츠를 보면서 내 행위가 자칫 욕망의 투사로 비칠까 봐 걱정이 들기도 했다. 작품이 유명해지고, 예술이 자본과 이어지면 많은 것이 망가진다. 인간성 또한 망가진다. 미술계에서 그런 경우를 수없이 봐 왔다. 살면서 돈을 경계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왔다. 이번 수상은 내게 그런 내 의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줬다. 혹시라도 내가 작품으로 부를 얻게 된다면, 사회로 환원을 하고 싶다. 앞으로 더 이 사회를 생각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다짐의 의미 같은 거다.

2013년부터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에 <윤진섭의 비평프리즘>칼럼을 연재해왔다. 2023년, 칼럼을 연재한 지 10년째 되는 해다. 감회가 어떤가.

얼마 전에 원고를 정리하다 보니, 108회 차까지 쓴 것을 봤다. 정말 놀라웠다. 서울문화투데이에 게재된 원고를 보면서 ‘그간 내가 뭘 하긴 했구나.’라고 생각했다. 긴 지면은 아니지만 원고지 10매에서 15매, 길게는 30매까지 글을 작성했다. 보람이 있는 일이었다. 예전 글을 읽으면서 ‘그래, 해야 할 소리를 제대로 했네.’라든지 ‘그때 저건 왜 저렇게 생각했을까.’하는 식으로 스스로를 돌아보곤 한다. 그때그때 사유의 씨앗을 돌아볼 수 있어서 감회가 새롭다.

▲《제 14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문화대상(기획,평론) 수상자 윤진섭 평론가 ⓒ서울문화투데이
▲《제 14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문화대상(기획,평론) 수상자 윤진섭 평론가 ⓒ서울문화투데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에 당선 전에는 S.T그룹에서 활동하는 등 행위예술가ㆍ화가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은 어떻게 평론에 영향을 끼치는지.

비평은 원리에 의해서 글을 쓰는 것이다. 섬세하게 관찰하고 분명한 비평적 관점에 의거해서 써야 한다. 그러려면 비평의 기준이 명확해야 한다. 나는 비평 글을 쓰는 행위가 벽돌공이 담을 쌓은 행위와 같다고 생각한다. 한 문장을 쓰면 다음 문장은 앞의 문장을 설명하거나 증명해야 한다. 이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해 전체적인 구조가 허물어질 틈을 주지 않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평론은 평론가가 얼마나 구조를 자기화해서 쉬운 말로 쓰는지가 중요하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고 겪어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글을 잘 쓰지 못한다. 90년대에 평론 등단을 하고 루카치 책을 읽다가 머리가 아파서 집어던진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내가 끌리는 것과 아는 것에 대해서만 썼는데 이렇게 평론을 할 수 있는 것이 용한 것 같기도 하다. (웃음) 아무래도 내가 창작자이기도 해서 가능한 일인 것 같다. 창작의 프로세스를 알고 있기 때문에 작가들과 말이 잘 통하기도 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잘 읽는 것 같다. 내게 작품을 보는 행위는 참조물(레퍼런스)을 만나는 행위이기도 하다. 내 오랜 시간의 화단 경험이 평론 곳곳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 같다.

▲《제6회 S.T 그룹전》(1977) <서로가 사랑하는 우리들(We stroke)> 퍼포먼스 현장 (사진=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1976년 《한국미술대상전》에서 입선을 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S.T그룹에서 이건용, 성능경과 함께 활동하며 퍼포먼스(이벤트)를 선보였는데, 어떤 시간들을 보냈는가.

《한국미술대상전》에 얼음에 구두끈을 묶어 얼음이 녹아가는 과정을 사진으로 찍어 입선했다. 그때 성능경 선생이 사진 촬영을 도와줬다. 그리고 대학교 3학년 때 S.T그룹에 들어가 이벤트(Event)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퍼포먼스’라는 말을 쓰지 않고 ‘이벤트’라고 불렀다.

1977년 나는 서울화랑에서 연 이건용과의 2인 이벤트 쇼 《조용한 미소》를 통해 퍼포먼스에 입문했다. 이때 <반죽과 돌>, <종이와 물>, <노랑구두> 등 3개의 이벤트를 발표했다. 주로 사물과 언어의 문제를 다룬 것이었다. <노랑구두>는 내가 노란색 비닐 서류봉투 하나를 들고 입장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전시장으로 들어와, 바닥에 앉아 서류봉투 안에 있는 노란 국화 꽃잎, 흰 자갈, 노란 크레용, 노란 고무줄을 꺼내 바닥에 늘어놓는다. 앉아있는 나는 노란 국화 꽃잎을 모두 따고, 흰 자갈을 노란 크레용으로 칠한 후 노란 고무줄로 칭칭 감는다. 그리고 다시 그것들을 서류봉투 안으로 집어넣어, 봉투 겉면에다가 검정색 매직으로 ‘신촌을 지나가는 여자의 구두 색’이라고 썼다. 불교의 ‘불립문자’와도 비슷한 이야기다. 노란색을 노란색이라고 부를 때 이미 그것은 노란색이 아닌 것이다.

같은 해에 열린 《제6회 S.T 그룹전》에서 <서로가 사랑하는 우리들(We stroke)>이란 ‘유목적(nomadic)’ 성격의 이벤트를 선보였다. 노란색 장난감 수레에 나뭇가지, 자갈, 색지, 색실을 싣고 입장한다. 그리고 바닥에 앉아서 관객들과 함께 색지 위에 놓인 자갈을 색실로 싸고 다 싸면 장난감 수레에 싣고 화랑의 구석으로 간다. 빨간색 종이에 싸인 자갈만을 골라 둥근 울타리를 쌓고 길을 상징하는 동글게 만 붉은 한지를 가지고 귀틀집과 울타리 사이를 일렬로 연결시켜 길을 만들었다. 작은 나뭇가지로는 직육면체 모양의 작고 귀여운 귀틀집을 만들었다. 이 모두는 우리의 삶을 상징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흰 백묵으로 전시장 바닥에 “철수네는 영희네 집보다 부자입니다.”와 같은 문장들을 썼다. 이보다 앞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제6회 앙데팡당》전에 <어법>을 출품했는데, 이때는 언어의 문제에 깊이 빠져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언어’는 나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다.

그 당시에는 관념적인 논리적 이벤트가 주를 이루는 때였다. S.T그룹의 멤버 중에서 이건용은 논리적 이벤트에, 김용민과 장석원은 선(禪)적이고 불교적인 이벤트에 관심이 많았고, 성능경은 신문을 이용한 미디어 관련 이벤트에 큰 관심을 보였다. 놀이에 관심이 많았다. <서로가 사랑하는 우리들>에서 보듯이, 장난감을 이벤트에 사용했고, 관객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관심을 보인 ‘언어유희’, ‘놀이’ 등의 발상은 지금까지도 내 작업의 근간이 되고 있다.

평론가로 활동하면서도 예술가의 정체성을 놓지 않았다. 100여개의 예명을 사용하며 퍼포먼스를 선보였고, 페이스북에도 이를 공유했다. 어떤 작품들을 해왔는가.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평단에 등단했다. 제목이 <로즈 셀라비여, 왜 재채기를 하는가?>였는데, 마르셀 뒤샹의 <로즈 셀라비여, 왜 재채기를 안 하는가?>란 작품 제목을 뒤튼 이 제목이 암시하듯,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현대미술의 제 경향을 살핀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평론을 해 왔다. 1987년부터는 전시기획자의 삶도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내 예술가적 자아를 다시 깨운 일이 있었다.

2007년 한국미술평론가 협회장을 맡고 있을 때였는데, 협회의 고문이신 당시 오광수 평론가의 칠순 행사가 있었고 나는 이 행사를 주관하느라 《한국 퍼포먼스아트 40년 40인》 이벤트 전에 참석하지 못했다. ‘한국실험예술정신’이 주최하는 이 행사에 초청을 받았지만, 마침 행사가 겹치는 바람에 홍대 앞의 공연장에 갈 처지가 못 되는 나는 하나의 퍼포먼스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홍대 앞의 클럽씨어터 벨벳바나나에서 행사를 진행하는 김백기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급히 작성한 문장을 전화로 읽어줬다. 내가 한 문장을 읽으면 김백기 선생이 현장에서 그것을 다시 외치고, 행사장에 모인 관객들이 다 함께 복창하는 퍼포먼스였다. <무선전화-김백기와의 대화-전화하시겠어요?>였다. 당시 현장에 있던 성능경 선생이 김백기의 대독 중간 중간에 추임새를 넣으면서 퍼포먼스가 더욱 활발하게 이뤄졌다.

이의 모태는 1994년에 터갤러리에서 벌어진 유선전화 퍼포먼스다. 압구정동 현대백화정 현대갤러리 관장실에서 내가 유선전화로 인사동의 터갤러리에 있는 이건용 선생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이는 사전에 미리 각본을 짜놓은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전화퍼포먼스의 원조가 된 <유선전화-이건용과의 대화 : 전화하시겠어요?>이다. 여기서 패턴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시대가 흘러 유선전화에서 무선전화로 이행하는 변화가 있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행위예술가로서의 정체성에도 좀 더 무게를 싣게 됐다.

▲HanQ,<살불살두 살두살왕/부처를 만나면 부처를죽이고, 뒤상을 만나면 뒤샹을 죽여라. 뒤샹을 만나면 뒤샹을 죽이고, 왕치를 만나면 왕치를 죽여라>, found objet/소뼈에 먹, 2009 (사진=윤진섭 제공)

2009년에 열린 경기도 세계도자비엔날레의 특별전인 《국제도자퍼포먼스 Ceramic Passion》에선 <우주의 소리Ⅳ>, <예술과 정치Ⅰ> 등 2개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때 방독면을 쓰고 퍼포먼스에 임했는데, 이후 가면은 내 퍼포먼스에서 중요한 소재가 됐다. 다양한 형태의 가면을 사용하거나 여성으로 분장하거나 왕치(Wangzie), HanQ 등 다양한 예명을 써 신분을 숨기는 등 이후 약 70여 회에 걸쳐 정체성을 묻는 퍼포먼스를 발표했다.

HanQ라는 예명으로 발표한 오브제 작품에 <살불살두 살두살왕(殺佛殺頭 殺頭殺王):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뒤샹을 만나면 뒤샹을 죽여라. 뒤샹을 만나면 뒤샹을 죽이고, 왕치를 만나면 왕치를 죽여라)>라는 게 있다. 중국의 식장에서 갈비를 먹고 가져온 굵고 잘 생긴 소뼈에 이 여덟 글자의 한자를 먹으로 직접 글씨를 쓴 작품인데, 이는 언젠가 뒤샹(Marcel Duchamp)을 뛰어넘겠다는 내 의지가 담긴 작품이자, 근간에 나의 사유를 잘 담고 있는 작품이다.

선(禪)의 유명한 화두에 ‘살불살조(殺佛殺祖)’, 즉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라는 말이 있다. 이 작품에 나오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두상(頭上: 뒤샹)을 만나면 두상(頭上)을 죽여라”라는 구절은 이를 빗댄 것이다. 현대미술에서 마르셀 뒤샹을 죽이지 못하면 진정한 작가라 할 수 없다. 뒤샹은 팩스가 나오기 전인 1968년에 죽었다. 55년이 흐른 지금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이용해서 세계 70억의 인구가 한 가족이 된 SNS 시대다. 그런데도 아직 뒤샹의 자장(磁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작품을 만들었다.

<살불살두 살두살왕>은 손가락의 터치(Touch)로 모두가 예술가가 될 수 있고, 모두가 연결될 수 있는 현 사회에 대한 내 시각이 담겨있다. 요셉 보이스는 “모든 사람이 예술가다”라고 말한 바 있다. 나는 이것이 스마트폰 발명 이후 점점 더 현실이 돼가고 있다고 느낀다. 이에 관해서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2011년 유럽문화예술학회에 발표한 「소셜 네트워크와 대안적 사회 교육의 가능성 - 나의 얼책(facebook) 활동에 얽힌 이야기를 중심으로」가 그 중 하나다. “새로운 창조는 손끝에서 나온다(New creation comes out of the fingertips)”는 게 중심 내용이다.

2000년 《제3회 광주비엔날레》에서 특별전 ‘한일현대미술의 단면’을 기획하면서 ‘단색화(Dansaekhwa)’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용어가 사용된 지 20년이 넘어서고 있다. 단색화 명명은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있다고 보는지.

당시 ‘한일현대미술의 단면전’을 기획하고 전시 서문을 썼다. 그때 영문판 번역본을 보니 단색화를 ‘코리안 모노크롬 페인팅(Korean monochrome painting)’이라고 했더라. 번역자가 그렇게 한 것은 이해가 되는데, 서양인들에게 과연 우리 ‘단색화’가 제대로 전달이 될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옛날부터 생각해 오던 결심을 굳혀 ‘단색화(Dansaekhwa)’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사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만약에 이게 실패하면 망신이 아닌가? 하지만 그때 속으로 ‘나중에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이건 바꿔야겠다.’라고 외치면서 단행했다. 그런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단색화(Dansaekhwa)’라는 고유명사가 세상에 등장할 수 있었다.

사실 2000년 첫 발표 이후 미술계에 단색화를 정착시키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정말 수많은 글을 썼고, 이곳저곳 열심히 뛰어다녔는데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의 단색화》전시를 기획하면서 서구권에 단색화를 제대로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열게 됐다. 그리고 2014년에는 뉴욕에 있는 알렉산더 그레이 어소시에이츠 갤러리의 샘 바더윌과 틸 펠라스가 공동으로 ‘Dansaekhwa’라는 고유명사를 써 박서보, 윤형근 등 한국의 단색화전을 서양인 최초로 기획했다. 그 후 이들은 독일 베를린에 있는 함부르크 반호프 뮤지엄의 공동 디렉터가 됐다. 참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내게 단색화 명명은 정말 큰 시도였다. 실패할 것이라고도 생각했지만, 한다면 하는 정신으로 밀고 나갔던 일이다. 단색화 용어 정착을 위해 정말 많은 글을 썼고, 많은 연구를 했다. 그런데 최근 단색화가 미술계 일각에서 상업적인 용어로 치부되고, 용어만 존재하고 알맹이, 즉 담론이 없는 명명으로 일컬어지고 있어서 많이 씁쓸하다. 단색화에는 서양에 없는 차별화된 우리만의 고유한 미(美)의식이 배어있다. 전기 단색화는 끝없는 반복행위와 거기서 빚어지는 촉각성(물성), 그리고 그 바탕을 이루는 정신성 등 세 요소가 결합된 결과물로서 우리의 집단적 미의식이 반영된 고유의 미학이 있다. 그 이면에는 ‘발효의 미학’이 깔려있다. 이것이 핵심이다. 전기 단색화 작가들이 작품이 끝나는 시점을 언제로 잡을까? 아무도 모른다. 오직 작가의 마음만이 알 뿐이다. 그것은 예민한 감각에 의존한다. 발효라? 쉬운 예를 들어보자. 역사와 전통이 있는 ‘곰탕집’의 팔십대 할머니는 손주 며느리에게 비법을 전수할 때 어떻게 할까? 쉽다. 탕이 펄펄 끓는 대형 가마솥에서 국물을 조금 떠 맛을 보고 난 후 “됐다!” 이 한 마디면 끝이다. 이 경지는 서양 사람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 그게 한국의 단색화다.

▲몽골초원에서 윤진섭 평론가 (사진=윤진섭 제공)

미술계는 늘 사조가 있어 왔다. 오늘날 미술계의 사조는 뭐라 할 수 있을까?

사조(思潮)라…. 어려운 질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지금 시대를 설명할 수 있는 사조는 없는 것 같다. 앞서 말했듯이, 지금은 모든 사람이 예술을 할 수 있는 시대다. 점점 더 파편화되고 점점 더 개인화돼 가고 있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모든 것이 ‘게임’이 되곤 한다. 예술 역시 그렇게 변해가고 있는 것 같다. 이미 미술계는 거대자본에 의한 상업주의 내지는 자본시장에 놀아난 지 오래다. 나는 요즘 쇠만 보면 집어먹는다는 신화 속의 불가사리를 자주 떠올린다. 끊임없이 쇠를 먹어치우는 불가사리가 꼭 자본주의와 같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각 시대의 중심적 사조들은 이전 시대의 이념과 싸워 변화를 추구하면서 나타난다. 그게 아방가르드(avant-garde), 즉 전위(前衛)다. 그렇기에 선언문이나 강령 같은 것이 많이 발표된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싸울 이념은 어디에 있는가. 이미 모두 개인화됐고, 파편화됐고, 정말 수없이 다양해졌다. 각자의 작업을 하고 모두 각개전투하는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굳이 특정한 사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게 이념적으로 싸우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시대인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개인으로만 파고드는 지금 현실이 과연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은 있다. 요즘 미술계나 젊은 세대를 보면 소라나 고둥. 조개처럼 살짝 건드리면 숨어버리는 갑각류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리고 돈이 중요해지는 시대 속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 즉 부자들의 사회 환원에 대해서 많이 생각한다. 돈을 중심으로 세계가 돌고 있을 때, 가진 이들의 사회 기여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NFT 미술 시장이 점점 커져왔다. 미술계 원로 작가들도 NFT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는데, NFT의 미래를 어떻게 보는가.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NFT는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일종의 거품과도 같은 현상이라고 본다. 아마 NFT는 앞으로 힘들어지지 않을까 싶다. 새로운 기법이 등장했고, 위품 문제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술이라고 보지만, 항구적으로 계속 이어지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는 사견임을 전제로 한 의견에 불과하다.

NFT는 가상코인의 거래로 인간과 인간의 거리를 점점 멀게 만드는 일이다. 인간은 상호 간에 접촉이 필요한 동물이다. 데스몬드 모리스라는 인성학자가 원숭이 사회를 관찰했는데, 그는 원숭이들이 끊임없이 상대방의 털을 헤집고 쓰다듬는 행위들이 원숭이 사회를 결속시키는 요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인간사회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서로 소통하면서 끊임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찮아 보이는 일상적 대화가 쓸 데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거야말로 서로를 쓰다듬는 행위라고 본다.

사람들이 만나면 흔히 서로의 안부를 묻고 가벼운 농담을 나누면서 친밀한 관계를 쌓는다. 미술 거래도 이런 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전시장에서 만나 소통하면서, 작품을 매개로 작가와 화상, 컬렉터 간의 믿음직한 관계를 쌓아야 한다. 가상공간에서 행해지는 거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더욱 단절시키게 될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계속 유지될 순 없을 것이라고 본다. 인간은 결국 ‘관계’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일상 속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윤진섭 평론가 (사진=윤진섭 제공)

지난해 키아프ㆍ프리즈 공동 개최 등, 한국미술 시장으로 쏠리는 세계의 관심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미술계 전문가로서 현 한국 미술계의 자리는 어디 쯤 위치하고 있다고 보는지.

옛날에 비하면 모든 조건이 나아진 것만은 확실하다. 미술정보, 작가, 작품, 전시기획 역량, 컬렉터의 수준, 유통구조, 작품 운송을 비롯한 디스플레이 기법 등등 많은 요소들의 수준이 전에 없이 상승했다. 하지만 미술시장에 대해 워낙 다양한 견해들이 등장하고, 미술계 역시 자본주의 논리 안에서 움직이다 보니 시장들 간에 보이지 않는 기싸움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이 나아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옛날 우물가 풍습이 남아있는 것은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가십이 너무나 많으면 해롭다. 이럴 때일수록 원대한 비전을 품어야 한다. 경쟁의 대상을 서구의 정상급 페어에 맞추고 그 수준을 따라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작년의 키아프· 프리즈 공동 개최는 언젠가는 치러야 할 관문이었다. 결과는 긍정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하루 빨리 수준을 높여서 미술계의 인사들이 서로 건강하게 소통하고 담론을 나눴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나는 한국 미술계와 미술시장이 더욱 튼튼해지기 위해서는 그림을 제대로 팔고, 이익을 얻은 이는 일정 부분 사회로 환원하고, 좋은 작가, 좋은 작품을 끊임없이 발굴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느린 것 같지만 그게 시장 경쟁력을 얻는 가장 빠른 길이다. 각 분야의 능력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해당 분야의 일원은 각자가 맡은 역할을 최대한 경주해야 한다. 원론적인 이야기 같지만 그 길 밖에 더 좋은 방책은 없다. 더 나은 미술계를 위해서는 화랑, 작가, 평론가, 언론이 각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다 함께 나눌 수 있는 미술 공동체가 되길 바란다.

근간에 이건희 컬렉션 기증, 국민의 문화예술향유권이 주요 이슈로 떠오르면서 공공미술관의 역할이 커졌다. 공공미술관이 그 역할을 잘 하고 있다고 보는가.

1969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세워졌다. 미술 전문 인력이나 학예사가 없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성장해왔다. 정말 대단한 역사다. 1981년 부임한 이경성 관장이 국립현대미술관의 최초의 미술계 전문직 인사였다. 지금은 조그마한 시 단위까지 미술관을 만든다고 한다. 우리나라 문화 수준이 많이 나아졌다. 하지만, 많은 것이 좋긴 한데 미술관들이 다 그 밥에 그 나물같이 색깔이 없는 것이 문제다.

공립미술관 관장의 임기제 운영이 미술관 발전에 저해가 되는 이유 중 하나라고 본다. 민주국가에서 임기제가 공평하고 합리적인 장치이긴 하지만, 효율 면에서는 사립미술관에 떨어질 수도 있고 무엇보다 무사안일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정치가 문화계에는 힘을 미치지 않았으면 한다. 또한 각 지방의 자치장들이 가능한 한 문화계에는 손을 대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립미술관의 관장들이 너무나 많은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진다. 임기제는 선용될 수도 있고 악용될 수도 있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역량과 업적이 탁월하다면, 그 한 사람에게 꾸준히 일을 맡기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뉴욕 모마(MoMA)가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근간에는 초대 관장인 알프레드 H.바 주니어(Alfred H. Barr, Jr.)가 30여 년을 재임하면서 미술관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지방 곳곳에 산재해 있는 공립미술관의 자문위원으로 조언을 건넨 경험이 있다. 나는 몇몇 미술관에 한국 목판화 작품 소장을 제안했었다. 저예산으로 좋은 컬렉션을 구성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선 자신이 없다. 좋은 제안을 해도 내부적으로 시도할 수 없는 분위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 사회가 좀 더 직능을 존중하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일을 해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문화는 문화계 인사들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상 속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윤진섭 평론가 (사진=윤진섭 제공)

올해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가.

지난해 연말 큰 사고를 당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남들은 나를 친 운전자를 원수라고 생각할 거라 보지만, 나는 그를 내 삶을 바꾼 계기를 준 수호천사라고 생각하려 한다. 중환자실에 누워있거나, 병원을 오가면서 아흔세 살에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와 여든여덟 살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많이 생각했다. 부모님이 나를 지켜주고 계시다는 생각이 든 기간이었다. 이번에 아프면서, 내 지난날에 대한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 올해는 건강하게 사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다. 그리고 글보다는 창작 쪽으로 더 많은 무게를 실을 것 같다. 이 말은 건강을 중요하게 생각하겠다는 것이지, 멈추겠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내 몸이 허락하는 한 계속해서 창작하려 한다.

앞으로 어떤 평론가ㆍ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은지.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는 미술평론가이자 작가, 시인의 삶을 살았다. 해외에는 다양한 업(業)을 일궈나가는 예술가들이 많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직 여러 가지 업을 아우르며 사는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나를 100여 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는 에듀크리큐라티스트(educricurartist)라고 명명하고 싶다. educator(교육자), critic(비평가), curator(전시기획자), artist(작가)의 합성어다. 나는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을 소신껏 계속해서 이어나갈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 그런 ‘에듀크리큐라티스트’로 기억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