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소재와 형식 면에서 의미 있는 2022년 무용공연 10선
[이근수의 무용평론]소재와 형식 면에서 의미 있는 2022년 무용공연 10선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23.02.15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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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단의 역사와 자기 무용의 정체성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2년여 동안 침체했던 공연계가 코로나 위기의 한복판을 벗어나면서 모처럼 활기를 찾은 2022년이었다. 전처럼 빈번하진 않지만, 공연장을 찾는 내 발길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내가 보았던 공연 중 작품의 소재와 공연형식 면에서 의미 있었던 10편을 소개한다.

이경은의 ‘복bok’(6.17~19, 아르코대극장)은 ‘리케이댄스무용단’의 창립 20주년 기념작이다. “내 몸이 내몸인가 네몸인가”란 구호아래 무용수의 몸에 초점이 맞춰지고 몸들의 향연을 보는듯한 밝은 에너지가 무대와 객석을 가득 채워준 작품이다. 9명 출연자는 리케이댄스가 뿌리내리고 성장해온 폭넓은 관객층을 대리한다. 발레와 현대무용, 민속무용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춤사위는 무용단의 광범한 공연 스펙트럼을 반영하고 전자 건반에서 태평소까지를 넘나드는 소리 들은 거침없는 음악성을 보여준다. 춤의 구성 요소 들을 한 작품에 망라함으로써 무용단의 정체성을 관객들에게 조리 있게 설명하고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시각을 표현한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다.  

차진엽의 ‘몽유도원무’(4.21~24, 국립극장 달오름극장)는 조선 중기 화가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무대로 소환했다. 현실과 자연과 미래를 한 폭 평면에 자연스럽게 배치해 놓은 그림의 서사적 평면구조를 차진엽은 시공간(時空間)으로 확장한다. 속세와 자연을 무대공간으로 양분하고 현실과 미래를 시간적으로 배열하며 서사력(敍事力)을 확대한다. 고전에서 찾아낸 신선한 소재를 바탕으로 감성적인 의상, 거문고와 전자음악의 조화, 춤과 영상을 날줄과 씨줄처럼 유기적으로 연결하면서 보여준 작품의 전달력이 돋보인다. 국립무용단원들의 완숙한 춤과 차진엽의 현대적 안무감각이 화학적으로 결합하며 관객들에게 깊은 위로를 전한 작품이었다. 

창무회의 ‘모시나비’(12월 7일, 달오름극장)는 46주년을 맞는 창무회의 올 정기 공연이다. 최지연, 김지영, 김미선, 김성의가 각각 안무한 작품을 한 무대에 모아 작품을 완성하는 ‘모듈형안무법’을 도입했다. 단 한 번 짝짓기를 통해 알을 낳고 일생을 마치는 모시나비의 순수성, 안팎의 몸체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양 날개의 투명성, 한줄기 실에 묶여 평생을 함께하는 무용수들의 질긴 인연과 경계선에 우뚝 서서 붉은 줄을 힘있게 당기고 있는 절대자의 존재까지 창무회의 내력을 담아보고자 한 의도가 역력했다. “전통춤을 기반으로 당대의 살아있는 춤을 창작하겠다”라는 창무 정신으로 모시나비처럼 다시금 힘차게 날아오르길 기대케 한 작품이다. 

육완순-그녀에게’(7.21, 아르코 대극장)는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영결식도 못하고 스승을 떠나보내야 했던 제자들이 1년 만에 올린 추모 공연이다. 예술가로서의 완성도와 교육자로서의 공헌성 그리고 춤과 삶을 일치시킨 생활인으로서 고인의 풍모를 남김없이 보여준 55분 공연이었다. “춤이 돼야 해, 지금 춤을 추지 못하더라도 춤과 같이 살아야 해” 영상이 들려주는 육성이 실제로 88년 평생을 춤과 함께 살아온 고인의 일상과 오버랩 되며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짧은 시간 안에 6개 작품을 담아내면서 추모 공연이 갖는 상투적인 요식 절차를 모두 생략한 기획과 연출형식이 돋보인 공연이었다. 

김보라의 ‘유령들’(9.14~15, CJ토월극장)은 25주년을 맞는 ‘SIDance’의 개막공연이다. <춤에게 바치는 춤들>이란 축제 표어가 창단 이래 여자의 ‘몸’에 일관된 관심을 보여온 김보라의 춤 주제와 상통한다. 춤의 재료이며 주제이고 관객들과 소통하는 언어로서의 몸을 통해 공연 속에서 안무가와 무용가, 무용가들 간의 관계를 정립하고 서로 간 간섭의 경계를 찾는 것이 작품의 주제다. 옷을 벗어 던지고 출연자들은 모두 나체가 되어 당당하게 무대를 누빈다. 그가 찾는 아름다움의 본질이 자연스러운 몸에 있다는 것, 유령의 영역이라고 표현한 안무가와 무용수의 관계가 수평적임을 찾아낸 것이 작품의 가치일 것이다. 

서연수가 안무한 ‘걷다, 바라보다, 서다’(2.6, 국립극장 해오름극장)는 KUM무용단의 올 정기공연 ‘그 길 위에 서다’ 중 3부를 장식한다. 무용단 창립자인 김운미 교수의 퇴임기념공연을 겸했다. 꿈을 찾아 무용과의 문을 두드린 학생들 앞에 길이 생기고 사람들이 그 길을 걷기 시작한다. 춤 길에서 사람들이 만나고 무리를 이뤄 그들은 함께 성장한다. 작은 나무에 물을 주면서 정성껏 가꿔 커다랗게 성장한 나무들이 숲을 이룬다. 우뚝 선 나무에서 씨앗이 우수수 떨어지고 씨앗이 무수한 열매를 맺는다.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교육자며 무용가로서의 삶을 수제자인 서연수의 안무로 보여준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겨울나그네-시간에게’(12.9~11,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는 1년 전 김원, 안영준, 차진엽의 세 버전으로 초연한 ‘겨울나그네’를 남정호식으로 만든 새 버전이다.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나그네’ 24곡 중 10곡을 선택하고 아버지와의 추억이 섞인 ‘보리수’를 중심에 두었다. 60분 공연에 음악과 춤을 절반씩 섞고 연극적인 연기가 중심이 된 무대를 보면서 ‘무용과 연극은 연인, 무용과 음악은 형제’라고 정의했던 안무가의 말이 떠올랐다. 무용가의 원숙한 연기와 음악가의 정다운 노래가 하나로 합체된 작품은 노년에 접어든 남정호의 예술혼을 숨김없이 드러내 준 편안한 작품이었다. 

정보경이 안무한 ‘안녕, 나의 그르메’(12,23~24, 대학로예술대극장)는 그림자로서 살아온 삶에 안녕을 고하고 자신의 춤으로 홀로서기를 다짐하는 의지가 담긴 작품이다. 그르메는 햇빛 아래서만 존재하며 자유의지 없이 누군가의 그늘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시간을 기다리는 숙명적 존재다. 결별해야 할 과거인 동시에 간직하고 싶은 기억이지만 오랜 시간 품어온 꿈을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내고 싶은 소망일 수도 있다. 평범하면서도 현대적인 의상, 조용하면서도 변화 있는 음악, 힘과 속도감, 맺고 끊음이 분명한 춤사위가 정밀(靜謐) 속에 스스로 절제하는 묵직한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춤이다. 한국춤과 현대춤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춤사위가 돋보였다. 

안애순의 ‘몸쓰다’(4,1~3, CJ토월극장)란 제목엔 사용하는(using) 도구로서의 몸과 두뇌활동의 산물인 ’writing‘이란 이중적인 의미가 들어있다. 안애순은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자연스러운 충동에서 발현되는 본능적인 몸짓이 아니라 안무가가 미리 계획하고 되풀이 학습한 정교한 안무의 소산이라고 인식한다. 평범한 동작들에 강력한 개념을 부여함으로써 개념이 동작에 선행하고 관념과 아이디어가 작품의 핵심이란 개념예술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이다. 작품에 대한 방대한 언어적 설명을 필요로 하고 난해하며 볼거리가 없으므로 대중성을 얻기 어렵다는 개념무용의 한계 역시 보여준 작품이다. 

국립무용단의 ‘2022 무용극 호동’(10,27~29, 해오름극장)은 60년을 맞는 국립무용단의 창단 기념공연이다. 송범이 안무한 원작 ‘왕자 호동’(1974)을 재창작하면서 ‘왕자’란 단어를 빼고 ‘미래의 무용극’이란 수식어를 붙였다. 원작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사건을 충실하게 극화한 데 비해 이 작품은 사건 뒤에 숨겨진 인물들의 심상을 표현하려 시도했다. 호동왕자를 부왕과 갈등을 겪는 반전론자로 변신시키고 공연요소 중 음악, 의상, 조명, 춤사위에서 한국무용의 전통적 성격을 최대한 배제하고 뮤지컬 무대나 현대무용화를 지향했다. 미래의 한국무용이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꿔야 할 것인가란 문제를 제기했다는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