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속 깊은 사유에서 빚어낸 냉철한 진단
[성기숙의 문화읽기]속 깊은 사유에서 빚어낸 냉철한 진단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3.02.15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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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문숙 선생 추모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지난달 27일 한국무용계의 원로 김문숙(金文淑, 1928~2023) 선생이 향년 95세로 타계했다. 예상은 했었다. 부고 소식을 접하자 선생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작년 겨울 마포 아파트로 선생을 찾아뵌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동안 거주했던 동부이촌동을 떠나 마포 아파트로 옮겨 생활하고 계셨다. 동부이촌동 아파트가 리모델링에 들어가 잠시 거쳐를 옮긴 것이다. 남편인 조택원 선생 사후(死後) 선생은 일평생 동부이촌동 아파트에서 아들 내외와 함께 지냈다.   

선생은 반갑게 맞아주셨다. 휠체어에 의존하고 있는 것 이외 건강은 크게 무리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선생의 모습에서 한 치의 흐트러진 정황을 찾을 수 없었다. 워낙 깔끔한 성품인데다가 아들 내외분의 극진한 보살핌 덕분일 게다.

영민하고 이지적인 엘리트 춤꾼

김문숙 선생을 처음 뵌 것은 1990년대 초반 무렵으로 소급된다. ‘해방직후 무용사’를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면서 면담조사 차 선생을 처음 뵈었다. 그후 조택원 선생을 조명하는 일 등 크고 작은 무용계 일로 자주 뵙는 편이었다. 펜데믹 이후 선생은 외출을 제한적으로 조율하였고 자연히 사람들과의 만남도 뜸해졌다. 

작년 마포 아파트로 선생을 찾아뵌 것이 영영 마지막이 되었다. 그날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선생은 무용가로서의 일생을 압축해서 들려줬다. 춤입문 동기, 조택원 선생과의 인연, 무용계 야사 등등.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말씀 속에 숨어있는 몇 몇 키워드는 유의미한 방점으로 깊이 되새겨야할 값진 증언이라 여겨진다.

김문숙은 신무용 제2세대에 속한다. 1928년 서울에서 출생한 그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대학교육을 받은 엘리트에 속한다. 중앙여자대학 재학 중 함귀봉이 운영하는 조선교육무용연구소에 첫 발을 딛으면서 무용과 인연을 맺었다. 조선교육무용연구소는 1946년 일본 유학파 함귀봉이 설립한 일종의 무용 전문교육기관으로 명성이 있었다. 

설립 당시 조선교육무용연구소는 학교무용의 체계화와 자유로운 창작이념을 표방했다. 특히 신문광고를 통해 연구생을 모집한다는 파격적인 발상은 세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신청 자격을 ‘대학 재학생 이상’으로 제한하여 엘리트 의식을 자극했다. 해방직후 부유하던 젊은이들이 지적 호기심에 이끌려 문을 두드렸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명문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중앙여자대학에 다니던 김문숙이 연구소에 합류한 것은 큰 행운이었다.

행운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의 무용인생에 긍정적으로 영향미쳤다. 우선, 몸에서 몸으로 전수되는 도제식 답습 차원을 벗어나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무용교육을 접할 수 있었던 점이다. 이론과 실기, 교육과 창작이 병행된 최고 수준의 무용교육 덕분에 오늘의 김문숙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전에 종종 말씀하신 것이 새삼 기억난다.  

한편, 조선교육무용연구소에서 함께 공부한 동학들의 면면은 후일 김문숙의 무용가 활동에 도움이 되었다. 서울대의 조동화·정순영, 연세대의 차범석, 고려대의 최창봉·김경옥, 중앙대의 정병호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후일 무용전문지 발행인, 무용평론가, 극작가, 대학교수, 정책 전문가 등 예술현장의 최전선에서 맹활약하며 한국의 문화예술 발전을 견인했다.    

1950년 발발한 6.25 전쟁은 이들과 동지적 연대감으로 뭉치게 하는 동인이 되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조동화의 기지로 한국무용단을 결성하여 대구로 피난을 떠나게 된다. 피난길에서 콘사이스 영어사전을 불살라 어둠을 밝히며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조택원과의 운명적 만남

서울수복 후 김문숙은 영화배우와 무용가 활동을 병행한다. 미국의 NBC TV에 출연할 정도로 미모와 재능이 출중했다. 한편 문학소녀의 꿈을 키웠을 정도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독서광으로 이름난 김문숙은 영민하면서도 지혜롭고 이지적이었다. 자신의 전공인 무용 외에도 문학에 심취해 있었다. 일본 근대문학 작품을 원어로 읽을 정도로 일본어에도 능통했다. 

신무용가 조택원과의 만남은 한마디로 운명적이었다. 1960년 1월 어느 날 도쿄의 청향원(淸香園)이라는 한국음식점 계단에서 두 사람은 우연히 조우한다. 당시 김문숙은 미국 공연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일본 도쿄 공연 일정이 잡혀있었다. 공연 전날 식사하러 한국음식점에 갔다가 조택원을 만난 것이다. 너무 놀란 김문숙은 아무 말도 못했고 나중에 전화를 걸어서 자신의 공연에 초대한다. 결국 두 사람은 1960년 백년가약을 맺는다. 스승과 제자뻘 되는 두 사람의 결혼은 당시 장안의 화젯거리였다. 

일제강점기 조택원은 최승희와 쌍벽을 이룬 신무용가로 당대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가였다. 일찍이 세계무대에 널리 알려진 글로벌한 인물이었다. 불행하게도 해방직후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간 이후 약 14년 간 귀국하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다는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조택원은 1960년 5월 6일 꿈에 그리던 고국 품에 안긴다. 이후 자신의 작품 활동보다는 한국 무용계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다. 

예컨대, 1969년 한국민속무용단을 창단하여 후배 무용가들에게 활동 발판을 마련해 줬다. 이는 한국무용사상 최초의 사단법인체이자, 단원들에게 정기적으로 월급을 지급한 단체로 기록된다. 그 이듬해에는 한국민속예술단을 조직하여 동남아 순회공연을 통해 한국 전통예술의 문화적 우수성을 널리 알렸다.  

이와같이 조택원의 예술 행보엔 늘 아내 김문숙이 함께했다. 한마디로 실과 바늘이었다. 조택원은 1970년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하고, 1973년 자서전 『가사호접』(서문당)을 출간한다.  1974년 한국 최초로 금관문화훈장을 서훈하고 그 이듬해 수상기념 축하공연을 가졌다. 이 무대에서 김문숙은 국립발레단장 임성남과 2인무로 조택원의 신무용 명작 ‘만종’을 선보였다. 

김문숙은 스승이자 남편인 조택원에게 신무용 명작을 습득했으나 공연무대에 자주 나서지는 않았다. ‘대궐’, ‘모란등기’, ‘귀의’, 수평선 등이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여기서 보듯 김문숙은 다작(多作)의 무용가는 아니다. 대신 1960~70년대 국립무용단 공연에서 주인공으로 자주 발탁되는 행운을 누렸다. 

무용계 ‘큰 어른’ 지다

국립무용단 초창기 10여년의 역사에서 김문숙은 주역의 역할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무대 은퇴 후에는 국립무용단 지도위원, 고문 등을 지내며 후배들을 지원하고 성원했다. 서울춤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신무용 매소드를 전수한 이력도 빼놓을 수 없다. 한편 중앙대, 한국예술종합대학 등에 출강하며 후진양성에도 열심이었다. 작고하는 날까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무용계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다. 

김문숙 선생은 늘 세계적인 무용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남편 조택원과 더불어 회자된다. 언젠가 선생은 조택원의 제자이자 아내로 특권을 누렸다고 술회한 바 있다. 선생은 늘 솔직하고 담백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스스로 집요하고 치열한 무용인생은 아니었다고 회고한다. 자신의 예술적 업적에 대해서는 언제나 겸양의 미덕을 견지한다. 그렇기에 무용계를 통찰하는 시선은 다분히 객관적이고 날카롭다. 선생은 종종 무용계에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작년 마포의 아파트에서 뵈었을 때 선생은 무용계의 미래를 걱정하고 우려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 6.25 전쟁 그리고 산업화, 민주화 등 격동의 시기를 관통한 원로의 말씀이기에 와닿는 바가 컸다. 애통하고 아쉽다. 선생의 속 깊은 사유에서 빚어낸 냉철한 진단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말이다. 부디 평온한 귀천(歸天)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