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비평]뮤지컬 <베토벤 시크릿>, 세련된 무대 ‧ 베토벤 음악의 대향연
[이채훈의 클래식비평]뮤지컬 <베토벤 시크릿>, 세련된 무대 ‧ 베토벤 음악의 대향연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3.02.2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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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연인’ 안토니와의 사랑, 단순 멜로에 그쳐 아쉬움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흥겹고 재미있었다. 베토벤의 모티브가 종횡무진 등장하는 음악은 생동감이 넘쳤다. <엘리제를 위하여>와 메뉴엣 G장조 등 친근한 선율, <비창>, <월광>, <열정> 등 유명한 소나타의 주제가 노래로 펼쳐졌다. <합창> 교향곡의 스케르초, <영웅>, <운명>, <전원> 교향곡의 피날레, 심지어 <코리올란> 서곡 등 노래로 변신할 수 있으리라고 예상치 못한 주제까지 베토벤 선율의 대향연이었다. 특히, ‘리드미컬’한 베토벤의 모티브들이 아름다운 선율로 재탄생한 것은 뮤지컬에서만 볼 수 있는 놀라운 변신이었다. 엄숙한 콘서트장과는 다른 편안한 분위기에서 베토벤의 선율에 흠뻑 매료된 것은 클래식을 어렵게 느끼는 관객들에게 소중한 경험이었다. 

베토벤 역의 카이는 뛰어난 가창력과 연기로 많은 갈채를 받았다. 고음과 저음에서 아름다운 음색과 섬세한 표현력을 들려주었고, 베토벤의 열정과 고뇌를 모자람과 지나침 없이 적절히 연기했다. 안토니 역의 옥주현도 열연했다. 그녀가 마음을 담아서 2막 솔로 ‘매직문’을 부르는 서정적인 대목에서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카스파르, 베티나 등 다른 출연자들의 노래도 수준급이었다. 생기있는 액션과 무용을 곁들인 만족스런 무대였다.  

무엇보다 고급스런 무대 디자인과 다채로운 세트가 인상적이었다. 1막 베토벤과 안토니가 만날 때 비가 내리는 장면은 무척 아름다웠고, 1막 피날레에서 조명이 무대 전체로 확대되며 베토벤의 내면을 비춰주는 장면은 관객을 압도했다. 2막에서 프라하 시가 풍경을 실루엣으로 보여준 뒤 카를대교로 장면이 전환되고 달밤 풍경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안토니의 노래 ‘매직문’과 함께 감동을 선사했다. 2막의 비 내리는 장면의 무대 영상도 가슴이 촉촉이 젖게 해 주었다. 뮤지컬 <베토벤 시크릿>의 무대는 완벽, 그 이상의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소품과 음향효과 등 디테일도 매우 치밀했다. 베토벤 장례 장면에서 그의 데드마스크를 보여주고, 안토니가 등장할 때 기타를 등장시킨 것은 매우 성의 있었다. 베토벤이 알고 지낸 여성 중 기타를 칠 줄 하는 사람은 안토니 뿐이었기 때문이다. 베토벤이 피아노를 칠 때 음향효과를 사용했는데, 그 시대의 포르테피아노 사운드가 나도록 한 것은 훌륭했다. 음향효과 사운드와 출연 배우의 액션이 빈틈없이 잘 맞았다. 베토벤과 함께 등장하는 여섯 명의 뮤즈는 분위기를 잘 살린 무용을 선보였다. 다만, 음악을 듣고 나서 춤추는 듯, 액션이 아주 미세하게 늦게 나오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뮤지컬 ‘베토벤_ Beethoven Secret’, 그저 나니까, 루드비히 반 베토벤 역 카이 ⓒEMK
​▲뮤지컬 ‘베토벤_ Beethoven Secret’, 그저 나니까, 루드비히 반 베토벤 역 카이 ⓒEMK

이 뮤지컬은 안토니 브렌타노라는 여성이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이었다는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메너드 솔로몬은 기념비적 저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서 베토벤이 그녀에게 써 놓고 부치지 않은 세 통의 편지를 추적, 안토니가 바로 ‘불멸의 연인’이라고 추론했다. 베토벤을 진심으로 사랑한 여성은 안토니 뿐이었고, 두 사람은 실제 결혼까지 생각했지만 결국 서로 존중하는 사이로 남게 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지식이 없는 관객들은 베토벤의 ‘불륜’에 어리둥절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안토니는 영화 <불멸의 연인>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당혹감이 더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영화 <불멸의 연인>의 문제라고는 할 수 있지만 뮤지컬 <베토벤 시크릿>의 결함은 아니다. 약간의 사전정보를 제시하면 이해를 도울 수 있었겠지만 이 뮤지컬을 통해 베토벤에 대한 인식을 넓힐 수 있다면 그의 ‘불륜’을 다룬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안토니의 남편 프란츠를 돈과 사업밖에 모르는 나쁜 남편으로 묘사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안토니가 베토벤에게 끌린 게 – 물론 그의 음악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지만 – 남편의 냉대와 무관심 때문이며, 홧김에 베토벤과 불륜을 저지른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불멸의 연인’과 베토벤의 사랑을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로 전락시킨 것은 미하엘 쿤체 원작의 결함으로 볼 수밖에 없다. 실제 프란츠는 베토벤을 가족처럼 환대해 주었고, 베토벤도 그와의 우정에서 평화를 맛보았다. 안토니는 프란츠를 가리켜 ‘최고의 남편’이라고 했다. 가족을 자상하게 돌보는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안토니는 가정과 사랑 사이에서 고민했고, 베토벤도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고민했다. 베토벤이 안토니와의 관계를 끊은 것은 자신의 예술을 지키겠다는 의지도 있었지만 안토니의 가정에 대한 존중, 그리고 프란츠와의 우정을 깰 수 없다는 양심의 명령 때문이었다. 이렇게 섬세한 감정의 결을 뮤지컬에 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통속 멜로물의 한계를 너머 베토벤의 고결한 사랑을 그려냈다면 감동이 배가됐을 것이다.     

▲뮤지컬 ‘베토벤_ Beethoven Secret’, 불꽃놀이 ⓒEMK
▲뮤지컬 ‘베토벤_ Beethoven Secret’, 불꽃놀이 ⓒEMK

상상의 산물인 뮤지컬을 다큐멘터리처럼 만들자는 얘기가 아니다. 청각 상실로 인한 베토벤의 고뇌가 극한에 도달한 것은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쓴 1802년 무렵이고, 리히노프스키 등 귀족들의 몰이해로 갈등한 것은 1804년 즈음이다. 이 뮤지컬의 배경이 된 1810년부터 1812년 사이, 베토벤은 빈 사회에서 두루 존경받는 위대한 음악가였고, 루돌프 대공, 로프코비츠 공작, 킨스키 공작은 그를 빈에 잡아두기 위해 연 4,000굴덴의 연금을 지급할 정도였다. 따라서 이 뮤지컬에서 베토벤이 청각상실로 괴로워하고, 귀족들과 충돌하는 것은 극적인 장치일 뿐, 실제와는 맞지 않는다. 하지만, 팩트에 상상을 가미한 픽션으로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설정이다. 다만, 프란츠 브렌타노를 돈과 사업밖에 모르는 탐욕스런 인간으로 설정한 것은 사실과 다를 뿐 아니라 드라마의 약점이 되기 때문에 재고할 필요가 있다.  

안토니는 “베토벤은 음악가로서보다 인간으로서 더욱 위대했다”고 회고했다. 그렇다면 고뇌하고 투쟁하는 베토벤이라는 정형화된 이미지에 그칠 게 아니라 그의 따뜻한 인간성을 부각시키는 내용도 좀 있으면 좋았을 것이다. 베토벤은 가곡 <연인에게>를 안토니 브렌타노에게 헌정했다. 그의 가곡 중 기타 반주로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이 곡뿐이며, 안토니는 기타를 칠 줄 알았다. 그렇다면 뮤지컬에 이 노래를 적절히 삽입해도 좋지 않았을까. 노래의 가사는 그녀의 ‘고요한 눈빛’, ‘사랑스런 모습’, ‘두뺨에 흐르는 눈물’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이미지에 어울리게 안토니의 성격을 재창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베토벤은 안토니와 헤어지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인 1820년, 피아노 소나타 30번 E장조를 안토니의 딸 막시밀리아네 브렌타노에게 헌정했다. 베토벤과 안토니는 사랑을 우정으로 승화시켰는데, 이 점을 표현하기 위해 이 E장조 소나타를 활용하면 어떨까.

▲뮤지컬 ‘베토벤_ Beethoven Secret’, 용납 못해, 루드비히 반 베토벤 역 카이 ⓒEMK
▲뮤지컬 ‘베토벤_ Beethoven Secret’, 용납 못해, 루드비히 반 베토벤 역 카이 ⓒEMK

기악 연주에서 전자악기 음향이 어쿠스틱 악기 소리를 압도한 것은 아쉬웠다. 간혹 플루트와 바이올린 솔로가 들리는 대목은 무척 아름다웠다. 그러나 건반의 전자 음향과 드럼 비트가 끝없이 이어진 것은 다소 거친 느낌을 주었다. 어쿠스틱 사운드가 살아나도록 밸런스를 잘 조절해 주면 베토벤이 들어도 기뻐할 것이다. 많은 넘버들이 대체로 알레그로처럼 들려서 청중의 마음을 쥐었다 폈다 하는 긴장과 이완의 묘미를 잘 살리지 못했다. 피아노협주곡 3번와 5번의 느린 악장, <비창> 소나타의 느린 악장마저 알레그로로 처리했는데, 원곡의 템포를 존중해서 라르고와 아다지오로 노래했다면 청중의 마음을 좀 더 사로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2막 ‘매직문’은 <월광> 소나타 1악장의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느낌을 잘 살려서 청중들의 공감을 얻었다. 

한국에서 세계 초연된 <베토벤 시크릿>은 베토벤 서거 전날인 3월 26일까지 공연을 이어갈 예정이다. 이 뮤지컬이 언젠가 유럽 무대에서 청중들을 감동시킬 날이 오길 바란다. 이를 위해 개선할 점이 있다면 아낌없는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베토벤도 <피델리오>의 성공을 위해 10년에 걸쳐 개작을 거듭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