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더 룸(The Room)’- 김설진과 국립무용단의 이질적 만남
[이근수의 무용평론]‘더 룸(The Room)’- 김설진과 국립무용단의 이질적 만남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23.03.15 10: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상징과 은유, 리듬과 여백이 아쉬웠던 재공연 무대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비좁고 허름한 원룸 공간에 가구들이 다닥다닥 자리 잡고 있다. 한쪽 벽에 더블 침대가 붙어 있고 좌우 양쪽 출입문 사이에 3인용 소파가 가로로 놓여 있다. 그 옆에 작은 화장대와 의자,  화장대와 대각선 쪽에 의자 두 개가 딸린 원형 탁자가 있고 그 뒤편에 붙박이 옷장과 책장이 숨기듯 드러나 보인다. 정면에 보이는 출입문 두 개로 사람들이 쉼 없이 드나든다. 남자 다섯, 여자 셋, 그들의 관계는 일정하지 않다. 연인 같기도, 가족 같기도 하고, 때로는 손님 같아 보이기도 하는 그들은 한 공간을 번갈아 점유하고 마임 같은 동작을 계속한다. 로맨틱한 장면도 보여주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가족간의 모습과 함께 부부간의 이기심과 무관심도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이 좁은 무대 위에 연속으로 펼쳐진다. 창밖엔 태풍이 불고 지진이 난 것처럼 주변이 흔들리기도 하고 계절이 바뀌듯 조명은 암전을 거듭한다. 시간이 흘러가지만 그들이 동일한 시간대를 살고 있는지도 불확실하다. 공간과 사람과 시간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일까, 국립무용단 여덟 명 무용수들의 다양한 움직임이 춤을 대신하는 무대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들은 제 나름대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가사가 있는 재즈풍 혹은 샹송 풍의 음악이 나직한 음정으로 80분 공연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함께 한다. 음악은 배경일 뿐, 무용수의 움직임과는 별개로 들려온다. 

김설진이 안무하고 국립무용단원 8명이 출연한 ‘더 룸’(The ROOM, 3,2~4, 달오름극장)의 무대를 그려본 것이다. ‘더 룸‘은 2018년에 초연한 동 명작품의 리바이벌 공연이다. 초연 시 출연했던 김현숙, 윤성철, 김미애, 김은영, 문지애, 황용천, 박소영, 최호종 등 동일한 출연자들이 달오름극장 무대에 다시 오른 것이다. 출연자와 무대가 동일하지만 그곳엔 시간이란 변수가 개입되어 있다. 지금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는 그들의 움직임이 5년 전 처음 무대에 섰을 때와 달라졌을까? 힙합을 위주로 성장해온 현대무용가 김설진과 한국무용으로 60년을 맞은 국립무용단과의 기묘한 만남은 어떤 시너지를 창조할 수 있을까. 이러한 만남을 통해 국립무용단이 보여주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공연을 보기 전 내가 가졌던 관심사였다. 김설진은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무용가다. 그는 자신을 댄서(dancer)라고 부르는 대신 무버(mover)라고 칭한다. 그가 만든 단체의 이름 역시 ‘무버’다. 길거리에서 힙합(Hip Hop)을 추던 시골 소년에서 인기 있는 현대무용가로 성장한 그에게는 ‘댄싱 9 시즌 II(2014) 우승자’,란 이력과 벨기에 ‘피핑톰(Peeping Tom)’ 무용단원이란 이력이 꼭 따라다닌다.

그의 작품을 매년 한 편씩은 보아왔다. 국립 현대무용단이 3인의 무용가를 초청하여 안무를 맡긴 ‘HIP 합’ 중 <등장인물>(2021, 토월극장), LG아트센터가 기획한 트리플 빌 중 하나인 <MARRAM>(2019. LG아트센터), 국립 현대무용단이 기획한 쓰리 볼레로 중 <볼레로 만들기>(2018. 토월극장) 등을 모두 보았다. 작품들의 공통점은 단독공연 아닌 30분 이내의 짧은 초청공연이었다는 점, 춤이라고 보기엔 어색한 힙합이나 즉흥 위주의 움직임이었다는 점, 책상과 가구들이 어지럽게 놓인 복잡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무용수들의 거친 움직임, 그리고 음악이 무대와는 독립적으로 움직인다는 느낌이었다. 2023년 ’더 룸‘도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다. 시간이란 변수가 개입되었음에도 움직임 위주의 안무에 국립무용단의 춤이 묻혀버린 것이 아쉬웠다. 국립무용단에겐 왜 이런 이질적인 만남이 필요했을까? 여전한 의문이 남는다. ‘한국을 빛내는 해외 무용 스타 초청공연’(2018, 아르코 대극장)에서 선보였던 김설진의 ’고막 속 난쟁이‘에 대해 썼던 리뷰를 그에게 전하고 싶다.  

“난쟁이는 귓속에서 들려오는 내면의 소리를 상징한다. 먼바다에서 바람결을 타고 들려오는 인어공주의 목소리처럼 나윤선이 부르는 ’사의 찬미‘가 나직하게 배경에 깔린다. 음악에 맞춰 김설진은 즉흥 아닌 즉흥 춤을 춘다. 복잡한 무대 도구를 사용하면서 힙합 계통의 움직임을 통해 다양성을 실험하던 전작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감지된다. 움직임에 시적인 리듬이 살아 있다. 진정성보다 장난기가 살짝 느껴졌던 전작들과 차별화되면서 그의 성장을 발견할 수 있어 좋았다.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무대미술과 함께 김설진의 서정적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던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생략과 상징을 통해 메시지를 은유적으로 전달하는 데서 예술은 가치가 있다. 리듬과 여백이 필요하다. 단순한 무대에서 감성이 깊숙이 녹아든 작품을 보고 싶은 바람을 여기에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