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공예 수상자 유희순 자수 명장 “전통자수는 ‘정성과 인내, 아름다움 집합체’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른 명맥 잇고파”
[Special Interview]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공예 수상자 유희순 자수 명장 “전통자수는 ‘정성과 인내, 아름다움 집합체’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른 명맥 잇고파”
  • 이은영 발행인ㆍ이지완 기자/김재성 사진 기자
  • 승인 2023.03.30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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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년을 이어온 힘, ‘자수’와 나누는 ‘무언의 대화’ 덕분
섬세한 표현부터 상징적 표현까지 아우르는 ‘유희순의 전통자수’
엘리자베스2세 여왕 칠순잔치 ‘방석과 숄’· APEC 정상회담 ‘일월오봉도’, 큰 보람
동국대 등 대학서 26년간 제자양성, 전통자수 보존ㆍ명맥 잇기 위해 혼신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ㆍ이지완 기자/김재성 사진 기자] 아주 작고 가는 바늘로 한 땀 한 땀 그림을 그리듯 옷감 위에 놓아지는 자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정성을 담고 있다. 아주 가는 선 하나를 계속 이어 면을 완성해나가는 일은 단순히 시간만을 들인다고 완성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그 시간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감내하며, 직선과 곡선의 조화로운 조형미를 추구할 때 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쉽게 걸어갈 수 없는 자수의 길을 46년 간 올 곧게 걸어온 인물이 있다. 제14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공예부문을 수상한 유희순 명장이다.

▲유희순, 일월오봉도 (사진=유희순 제공)
▲유희순, 일월오봉도 (사진=유희순 제공)

유 명장은 전통자수에 대해 ‘정성과 인내, 아름다움의 집합체’라고 표현한다. 그는 “바늘 한 땀은 직선이다. 직선을 곡선으로 만들려면 수십 여의 땀이 필요하고, 그 땀들이 모여 면을 메운다. 마음만 급하게 먹는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말 어려운 일이고,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그 인내는 또 얼마나 숭고한 일인가”라고 자수를 정의한다.

세계 시장의 문이 열리고, 자본가들이 국경을 넘어 값싼 노동력을 부릴 수 있는 시대, 기계화가 일반적인 시대에서 전통자수는 점점 위협받기 시작했다. 시간 대비 최고의 효율을 내는 행위가 높은 가치로 평가받는 세상 속에서 정성과 인내로 일궈져, 들이는 시간에 비해 물질적인 규모가 크지 않은 자수는 점점 사라지게 됐다.

특히 한국 전통자수는 중국, 베트남 등에서 생산되는 값싼 자수 상품들에 밀려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유 명장은 한국 전통자수의 명맥을 잇겠다는 신념으로, 46년 간 수틀 앞을 벗어나지 않았다. 또한 전통을 함께 보존하고 이어갈 수 있는 인재들을 위해 26년 동안 쉬지 않고 강의를 해 500여 명의 제자를 가르쳤다. 1998년 동국대학교 미래융합교육원 강사를 시작해 지금까지 강의를 이어오고 있고, 2022년부터는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강사로도 출강하고 있다. 강의가 있는 날에는 초급반 세 시간, 전문반 세 시간씩 연강을 하며 매번 제자들에게 혼신의 힘을 다해 자수를 가르친다. 유 명장의 이러한 46년간의 행보는 비단 천 위에 아름다운 색실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 기도의 행위와도 같았다.

올해 서울문화투데이는 크게 주목받지 않아도 자신만의 신념을 지켜나가며 세상을 좀 더 이롭게 만들어 온 이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조금씩 영향력을 확장해나가며 좀 더 많은 이들에게 문화예술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문화예술인을 조명해보고자 했다. 복잡하고 혼란한 세상 속 자신의 길이 무엇인지 올곧게 믿고 걸어가는 이들에 대한 감사였다.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유희순 명장 ⓒ김재성 사진기자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유희순 명장 ⓒ김재성 사진기자

인터뷰가 끝나고, 수를 놓는 유 명장의 모습을 촬영하고자 자수 작업을 부탁했다. 촬영을 위한 행위이기에 쉽게 마무리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유 명장은 수틀을 준비하고, 도안에 맞는 색 실을 선별하며 아주 차분히 준비를 해나갔다. 수를 놓는 바늘 한 땀이 준비되는 모든 과정을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유 명장이 수를 놓기 위해 천 위로 바늘을 찔러 넣고, 움직이는 두 손과 바느질은 굉장히 고요한 공간을 만들었다.

유 명장은 자수를 하는 시간을 ‘무언(無言)의 대화’라고 표현했다. 인터뷰 중 유 명장은 몇몇 질문에서는 그 답을 어떤 명징한 언어로 발화되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 명장이 수틀에 앉아 작업을 이어가는 그 모습을 보니 그 답들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하나의 직선을 만들기 위해 정해진 행위를 이어나가고, 그 공백을 더듬으며 천천히 걸어 나가는 동작들은 유 명장이 전하고 싶은 가치와 열정에 닿아있었다. 유 명장이 자수와 나누는 무언의 대화를 이 인터뷰는 모두 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유 명장이 일궈왔고 일궈나가고 싶은 세계, 그리고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자수의 의미’는 충분히 담고 있다. 유 명장이 46년 간 이어온 ‘대화’를 담아봤다.

제14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공예부문 수상을 축하한다. 46년 자수 인생에서 이번 수상은 어떤 의미였는가.

서울문화대상을 받음으로써 46년간 해온 작업을 내 영역 안에서 다시 한 번 정의할 수 있는 계기였다. 또한, 그 시간들에 대해 인정받는 느낌도 있었다. 수상 소식을 듣고 SNS에 게시글을 올렸는데 정말 많은 분들이 축하인사를 전해서 굉장히 행복한 경험이었다.

“46년 자수 외길 인생” 유 명장의 수식어와 같은 문장이다. 1976년 자수를 시작해 자수만을 하며 인생을 걸어왔다. ‘자수’의 어떤 점이 유 명장을 계속 작업하게 하는가.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고, 실제로 재능이 있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미술대회에 나가서 수상하고, 학교에서 미술로는 항상 1등인 학생이었다. 그런데 현실이 내 발목을 잡았다. 미술에 계속 미련을 갖고 있는 상황 속에서 20대 초반에 자수를 알게 됐다.

자수를 시작하고 나선, 자수에 푹 빠지게 됐다. 세상 어떤 사람하고 대화하는 것보다, 수와 대화하는 게 가장 즐거웠다. 수틀 앞에 앉아서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 행위와 그 시간 자체가 나에게는 큰 즐거움이고 행복이었다. 언어는 존재하지 않지만, 분명한 대화의 행위라고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계속 도전하고 작업을 놓지 않게 되는 원동력이다.

▲유희순, 길상도
▲유희순, 길상도 (사진=유희순 제공)

故김태숙 선생에게 동양자수를, 故한상수 선생에게 전통자수를 사사했다. 어떤 자수를 배웠는가.

전문가의 길은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많이 달라진다. 나는 각기 다른 장점을 지니고 있는 스승을 둬, 자수의 다양한 면을 습득할 수 있었다. 故김태숙 선생은 자수문화협회장을 지낸 분이다. 동경여대 자수과를 나와서, 자수로 유학을 하신 분이다. 김 선생님은 일본에서 수학했기 때문에, 자수 재료 선택에 있어서 동양자수 경향의 작품과 재료를 선택했다. 김 선생님은 반푼사(가늘게 꼰 명주실)를 사용해서 사실적인 표현을 잘했다.

당시 김 선생님 밑에서 수학하며, 사실적인 표현 뿐 아니라 자수의 기능적인 면도 많이 배웠다. 김 선생님의 추천으로 기능대회에도 나갔었는데, 대회에 나가기 위해서는 자수의 서양기법도 익혀야 했다. 그 경험 속에서 자수의 전체적인 기술을 알게 됐다. 그렇게 수학을 하면서 나는 자수에 대해서 자신감을 갖고, 자수분야에서만큼은 내가 최고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그 시기쯤 한상수 선생님의 자수 전을 보게 됐다.

故한상수 선생의 자수전은 내게 큰 충격을 줬다. 자수에 완전히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경험이었다. 한 선생님의 자릿수(돗자리의 표면처럼 촘촘하게 엮은 모양으로 수놓는 수법) 작품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이후 한 선생님의 연락처를 수소문해서 직접 찾아가 문하생이 됐다. 한 선생님은 반푼사보단 굵은 실인 꼰사(명주실을 꼬아 만든 실)를 사용해서, 사실적 자수보단 상징적인 문양과 기법의 전통자수를 하는 분이었다. 언뜻 볼 때 투박하고 거칠어 보이는 자수 작품이지만, 굉장한 깊이와 매력을 가지고 있는 자수 작품을 보면서 내게는 이 영역이 좀 더 맞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故한상수 선생의 계맥을 잇고 있으면서, 동시에 故김태숙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다. 극 사실적인 표현과 자수의 다양한 기본기는 김 선생님을 통해서 배울 수 있었고, 한국전통자수의 깊이와 기법들은 한 선생님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사실 이 두 분의 스승님보다 앞서서 내게는 어머니가 내 첫 스승이었다고 느낀다. 우리 어머니는 외할머니 어깨너머로 자수와 바느질을 배우셨다. 외할머니는 원래 양반집 규수였는데, 집안이 몰락해서 한미한 가문으로 시집을 온 분이었다. 당연히 궂은일은 못했고, 심지어 외할아버지가 바람도 피웠는데 그 때마다 바늘을 잡았다고 하신다. 어머니는 그렇게 삶 속에서 자연스레 자수를 배우신 분이었다. 어머니가 너무 자연스럽게 수를 놓으시기에, 나는 그 시대의 어머니라면 모두 그렇게 수를 놓으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서, 어머니 시대의 분들을 만나 뵈면서 자수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머니가 내게 남겨주신 유품 중에는 500여 개의 골무가 있는데, 그 골무는 내가 수를 놓고 남은 천과 실오라기들을 다 모아서 만드신 것이다. 외할머니에게서 어머니에게로, 또 어머니가 내게 자수를 알려주셨다.

▲꿈과 사랑, 애환(골무 108개)
▲꿈과 사랑, 애환(골무 108개) (사진=유희순 제공)

스승들에서 자수를 사사하고, 이후 홀로 서면서 유 명장 자수에서 달라진 점이 있을까. 유 명장의 자수는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떤 것이든 다 표현할 수 있는 자수인 이라고 하고 싶다. 자수와 상징적인 자수 양쪽의 스승을 모두 두고 있고, 전통자수 뿐 만 아니라 기능적인 자수도 배웠기 때문에 자수를 폭넓게 구현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내 자수는 색감이 강점이라고 볼 수 있다. 자수를 시작하기 전에 밑 작업을 한다. 도안을 잡고 자수의 색감을 미리 계획하는 것인데, 한 선생님 밑에 있을 때부터 이 색감을 잡는 작업은 항상 내 몫이었다. 도안을 보고 전체적인 작품의 분위기를 읽고 색감을 배합했는데 늘 좋은 평가를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타고난 미술에서 닦은 실력이 발현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박물관의 ‘문화재 자수’가 스승이라고 표현한 수상소감이 인상적이다. 문화재 앞에서 나약해지는 동시에 구원의 말을 얻는다고 했다. 어떤 말들을 듣게 되는가.

정말 많은 박물관을 다녔다. 조금 독특할 수 있지만, 나는 유물을 보는 눈이 남들보다는 좀 더 빠르다는 생각을 한다. 갈 때마다 유물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느낀다. 갔던 곳을 다시 갈 때도 참 많고, 갈 때마다 이전에는 느끼기 못했던 것을 새롭게 느끼곤 한다. 가장 많이 찾아갔던 곳이 허동화 한국자수박물관이었는데, 현재는 서울공예박물관에 다 기증돼 있다.

선조들의 수를 바라보면, 옷깃을 다시 여미게 된다. 마음을 다시 잡는다는 뜻이다. 자수 작품의 색감, 결, 자수기법들을 세심하게 볼수록 그 정성들이 너무나 고귀해 존경과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정성들을 마주하면, 나도 그 길을 함께 묵묵히 걸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수는 엄청난 노동력과 시간이 들어가는 작업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기계로 드르륵 박아버린 수나, 자수로 장난을 친 작품(?)들이 되레 좋은 평가를 받고 인정받는 것을 보면 정말 크게 절망하곤 한다. 기운이 떨어지고, 내가 가는 길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그런 순간에 박물관에 간다. 나도 모르는 새에 내가 혼탁해진 것은 아닌지, 너무 얕게 도전하고 절망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면서, 내가 가야할 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본다.

언젠가 내 자수도 박물관에 전시될 것이라 생각한다. 후대에는 내 자수를 보고, 또 자수를 잇고 공부해나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명징하고 올바른 수를 놔야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이 했던 정성스럽고 올곧은 수를 배우고, 이어가고 있다. 박물관의 자수 유물들에는 오차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수를 놓는 정신이라고 본다. 나는 그 길을 함께 걸어가며 ‘적당히’에서 멈추지 않는 수를 하고자 한다.

▲답하고 있는 유희순 명장, 유 명장의 자택엔 많은 자수 자료들이 있다 ⓒ김재성 사진기자
▲답하고 있는 유희순 명장, 유 명장의 자택엔 많은 자수 자료들이 있다 ⓒ김재성 사진기자

국가 중요행사에 유 명장 자수 작품이 많이 공개됐다.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2세 여왕 방한 시 사용한 <숄과 방석>, 2005년 ‘APEC KOREA 정상회의장’에 걸렸던 <일월오봉도> 등이 있는데 중요한 자리에 작품을 선보인다는 것에 부담이 있진 않았는가.

국가 행사에 선보이는 작품은 마감기한이 있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작업 기간도 긴 편이 아니어서, 시간에 쫓기면서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을 정도로 몰두하고 매진해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1999년에 영국 엘리자베스2세 여왕이 방한을 해 안동하회마을에서 칠순잔치를 했다. 그때 여왕이 사용할 방석과 숄을 제작했다. 그때 방석과 숄의 도안도 없어서, 내가 모두 제작해 작업에 들어갔다. 이 때 숄에 ‘엘리자베스2세’ 영문 사인을 수놓아 달라고 한 것을 내가 주장하여 한글로 바꿔서 수놓았다.

APEC 정상회담에 사용됐던 <일월오봉도>는 가로 624cm, 세로 348cm의 굉장한 크기를 가지고 있는 12폭 연결병풍 작품이다. 처음부터 내게 의뢰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거의 마지막이었는데, 나보다 앞에 사람들이 작업을 거절해서 내게까지 일이 전달된 것이었다. 당시에 나까지 작업을 거절하면, 중국에 맡겨서 작업을 해오거나 실크스크린으로 찍어서 제작하려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얘기를 들으니, 그렇게 둬선 안 되겠다고 느꼈다. 두 달이라는 시간이 주어졌고, 그 시간동안 병풍 도안을 잡고 색을 배열하고 수를 놓아야 했는데 정말 매일 매일이 치열했다. 워낙에 큰 작품이어서 어디 체육관 같은 곳을 빌려서 수를 놨고, 학교에서 가르치던 제자들과 함께 작업했다. 많은 인원이 함께 작업하다보니 자수의 균일성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큰 관건이었다. 그래서 작업자가 한 방식에 익숙해져 각기 다른 색을 드러내지 않도록, 계속 자리를 바꿔가면서 작업을 해 대형 작품의 균일성을 만들었다. 돌아보면 보람찬 일들이었다.

머리카락으로 자수실을 대신 해 작품을 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어떤 이유에서이고 미학적 가치는 무엇인가?

자수 유물을 보러 다니던 중에, 고려시대에 머리카락 자수 유물이 있는 것을 봤다. 그 작품을 본 순간, 한 번 그 유물을 재현해봐야겠다고 느꼈다. 나는 30대 초부터 머리를 한 번도 자르지 않았다. 머리카락 자수는 모두 내 머리카락을 이용해서 제작한 작품들이다.

머리카락 자수는 총 세 작품을 만들었다. 하나는 A4용지보다 조금 크고, 다른 두 작품은 A4용지 정도 된다. 머리카락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수실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갖는다. 머리카락은 자연 그대로, 본연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재료다. 머리카락을 자수 재료로 마주했을 때, 그 존재의 아름다움을 크게 느꼈다. 검은 머리카락과 눈이 딱 맞았을 때, 마치 섬광이 터지듯 확 전달되는 순수함과 고귀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 아름다움이 100% 머리카락에서만 발현된다는 것도 큰 매력이었다. 그래서 머리카락으로는 일반 작품이 아닌 불교 미술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들었다.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 두 점을 만들었고, 공양상(供養像) 한 점을 만들었다.

▲유희순, 구군복 광대 (사진=유희순 제공)
▲유희순, 구군복 광대 (사진=유희순 제공)

후학 양성에 정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98년부터 동국대에서 시작해, 26년간 쉬지 않고 강의하며 500여 명의 제자를 배출했다. 어떤 신념이 있었을지 궁금하다.

전통의 명맥을 이어야 한다는 의지가 있었다. 나 혼자 자수 작품을 하고 남기면, 평생에 할 수 있는 작품이 한정돼 있고 몇 작품밖에 되지 않는다. 전통을 잇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전통의 명맥이 유지된다. 마치 부처의 많은 제자들이 힘을 모아 경전을 만든 것처럼, 그렇게 이 자수를 이어나가야겠다는 신념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제자를 양성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렇지만, 지금 현재에는 최선을 다해서 학교 강의에 모든 것을 다 바치면서 자수에 대해 전하고 있다.

과거에 집집마다 옷을 짓고 그릇을 빚어 사용하던 때엔 모든 이가 공예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산업화가 진행되고, 손으로 하는 노동이 우리의 삶과 점점 멀어졌다. 그럼에도, 현대사회에 공예가 여전히 남아있고, 이어지고 있는 힘을 무엇일까.

전통자수는 우리나라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분야다. 자수는 한국 공예의 핵심이자, 섬유 공예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격을 높이고, 고급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손자수가 필수적으로 들어간다. 조선시대 때 상궁의 계급을 봐도 자수 · 침선 방 상궁을 높이 쳐줬다.

공예는 필수적으로 높은 공력이 들어가는 작업이다. 바늘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 것은 기도를 하는 마음과도 같다. 수 한 땀이 일배(一拜)와 같은 무게를 갖는다고 본다.

강의를 하다보면, 수험생 학부모인 제자들이 종종 있다. 대게 그 제자들은 아이가 공부를 할 때, 함께 자수를 놓곤 하는데 대게 좋은 성적을 얻어 대학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들고 온다. 제자들 사이에선, 자수로 엄마의 기도가 닿아서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간 것이 아니냐는 얘기를 하기도 하는데 나는 일정부분 맞는 얘기라고도 느낀다.

손 자수로 만든 작품에는 힘이 있다. 자수 초급반 수업에서 첫째로 수보자기, 두 번째로 귀주머니, 세 번째로 두루주머니를 만드는데 이 때 나는 재봉틀을 사용하지 말고 전체 손바느질을 하라고 한다. 바느질 연습을 하라는 의미도 있지만, 손 자수만이 가진 힘을 제자들이 느끼길 바라서다. 전통자수와 손바느질은 조금이라도 잡념이 들어가면 일그러지기 일쑤이다. 결국 자수는 고요한 가운데 가장 정갈한 마음으로 나아가는 힘이다.

제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게는 ‘80살 현역’이라는 꿈이 있다. 문득 ‘이러다 내가 갑자기 쓰러지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는데, 내가 제자들에게 알려주지 못한 것이 많고 아직 전승시키지 못한 것이 많다는 걱정 때문이다.

몇몇 제자들은 단 시일 내에 성과를 내거나, 어떤 물질적인 성공을 얻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래서 전통을 이어나가는 힘이 점점 약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조금 쉽게 가려하기도 하고, 비전이 보이지 않으면 물러서는 경우가 다수다. 그럼에도 꾸준하게 자신의 정도를 가는 제자들이 있다. 명인의 자질이 보이는 제자들도 있다.

전통자수는 한 땀 한 땀의 에너지 갖고 하다보면, 기도도 되면서, 행복한 것이 있다. 그 행복을 기억하고, 마지막으로 체력 관리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다.

▲수틀 앞에 앉아 자수 실을 고르고 있는 유희순 명장 ⓒ김재성 사진기자
▲수틀 앞에 앉아 자수 실을 고르고 있는 유희순 명장 ⓒ김재성 사진기자

올해 전시 계획이나 작품 계획이 있는가.

강릉 동양자수박물관에서 올 10월 28일부터 내년 2월 28일까지 전시 예정이다. 강릉 수보자기를 중심으로 네 달 정도 전시를 할 것이다. 그리고 2015년에 출판했던 전통자수의 유물복원 및 응용 전 책 <누에고치에서 꽃을 피우다>에 내용을 보충해서 올해 증보판으로 다시 출판한다.

어떤 자수 명장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앞서 말했듯이 나는 박물관 자수에서 큰 감응을 받고, 그 작품을 통해서 그 시대의 자수 스승님들을 떠올려본다. 나도 후대에 그런 자수 스승으로 남고 싶다. 꾀를 부리지 않고, 올곧은 정도의 길을 가면서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수를 놓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후대들이 내 작품을 보면서 ‘이렇게 자수를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구나’라고 기억해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향낭, 비취발향, 후수, 자수병풍, 노리개 등 후대에도 이어져야 할 가치 있는 전통자수들을 다시 복원하고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 큰 목표다. 유물로만 남아있는 자수들을 내 선에서 최대한 복원해 전통자수 작품들을 계속 남겨놔야겠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열쇠패와 별전 작업을 하고 있다. 동시에 여러 가지 작업을 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전통자수의 원형 그대로를 지켜, 그 정도(正道)가 왜곡되지 않게 힘을 보태는 명장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