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충무로야사] -까페와 대폿집과 영화인들-
[연재 충무로야사] -까페와 대폿집과 영화인들-
  • 이진모 시나리오 작가(영상교육원 교수)
  • 승인 2010.02.08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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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모 시나리오 작가(영상교육원 교수)

▲75년 작 '바보들의 행진'
시나리오작가들 중엔 주류와 비주류가 있었다. 무슨 정치집단처럼 주류와 비주류를 분류했던게 아니라 술마시는파와 못마시거나 안마시는파를 그렇게 지칭했던 것이다.

주류엔 윤삼육형을 비롯한 허진,이종호,김하림,한유림,송장배,강대하,문상훈등이 있었고 비주류는 대선배격인 최금동선생,신봉승,김지헌,동료 유동훈등 몇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은 술을 아예 못마시는게 아니라 주류파처럼 과음이나 폭음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주류파는 또 양주파,맥주파,소주파,탁주파 등으로 나뉘었다. 주류파수장은 아무래도 윤삼육형이었다. 그는 철저한 탁주파여서 주로 대폿집만 드나들었다.

당시 충무로주변엔 소위 니나노집이라는 대폿집이 여기저기 골목마다 산재해있었는데, 윤삼육형과 탁주파들은 지금 명보극장과 풍전호텔 사이에 있던 이층집이라는 니나노집을 풀방굴에 쥐 드나들 듯 했다.

이층집은 아래층에 이만희감독, 영화 ‘고교얄개’를 연출했던 석래명감독, 시나리오작가이자 영화제작자였던 김원두군이 단골이었다. 이층엔 주로 탁주파인 윤삼육사단이 상주하다시피 했다.

거기엔 ‘월매’ 라는 별명을 가진 중년의 황마담이 종업원으로 몇몇 아가씨들을 데리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서울 변두리나 시골서 올라온 여고중퇴생으로 얼굴도 꽤 반반했고 노래나 춤도 잘하는 끼 많은 여자들이었다.

단골들 중엔 시나리오작가외에 감독이나 남녀조연배우, 심지어는 코미디언, 창하는 여자들까지 끼어 한바탕 술판이 벌어지면 취흥이 도도했다.

당시 이미자의 히트곡 ‘동백아가씨’, ‘흑산도아가씨’, ‘섬마을선생’등은 아가씨들의 18번이었고 시나리오작가들은 백년설의 ‘나그네설음’, 남인수의 ‘청춘고백’, 고복수의 ‘애수의 소야곡’으로부터 시작해 남진의 ‘가슴아프게’, 나훈아의 ‘물레방아는 도는데’ 따위의 뽕짝을 아가씨들의 젓가락장단에 맞춰 밤이 새도록 열창하곤 했다.

김하림군과 유동훈과 나는 니나노집 취향이 아니어서 주로 명동이나 신촌, 대학로쪽 까페에서 회동했다. 당시 명동엔 주로 양주와 맥주등을 요즘 호프집처럼 잔술로 파는 까페가 즐비했다. 화이어 버드, 오비스 캐빈, 마음과마음 등, 그곳에선 주로 외국의 팝송과 우리나라 최초의 그룹사운드인 키보이스, 히식스등의 ‘정든배’, ‘해변으로가요’, ‘초원’등을 들을 수 있었고, 박인희, 이필원 듀엣이 ‘세월이가면’, ‘그리운 사람끼리’등을, 양희은 등 여대생 가수들이 ‘아침이슬’,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 같은 노래를 통기타연주로 불렀다.

신촌이나 대학로엔 겨울나그네, 시나위, 가을, 태, 오감도, 마로니에등 고전문학이나 베스트셀러소설, 잘 알려진 시의 제목을 상호로 차용한 까페들이 성시를 누렸다. 그 까페의 여주인들이나 마담등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할 필요는 없겠으나 그들이 운영했던 까페는 언제나 영화인, 연극인, 소설가, 시인, 화가등으로 붐볐다.

나는 두주불사는 아니었지만 주종불사, 장소불문쯤은 되어서 이층집이건 까페건 별달리 가리지 않고 무리 없이 잘 적응했다. 당시 명동과 신촌 등 까페에서 자주 마주치는 영화인들은 ‘겨울여자’와 ‘영자의전성시대’를 연출했던 김호선감독, 허리우드에서 연출수업을하고 귀국해 ‘바보들의 행진’으로 일약 스타감독이 되었던 하길종감독, ‘애마부인’의 정인엽감독, ‘나와 나’의 감독 이원세 등이었다.

내가 하길종감독을 처음만난 곳도 오비스 캐빈이었다. 비교적 과작이었던 그는 동료영화감독들이나 시나리오작가 등 다른스텝들과 어울리기보다는 늘 혼자이거나 영화평론가나 다른분야의 인사들과 함께였다.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하명중의 형이며 한때 검은의상과 검은스카프를 쓰고 명동을 풍미하다가 요절한 전혜린의 여동생 전채린과는 부부사이였다. 귀공자처럼 핸썸한 인상에비해 언제나 펄렁한 베이지색 버버리를 걸치고 부수수한 장발을한 그의 까칠한 표정은 매우 독특한 뉘앙스로 주변사람들에게 이질적인 거리감을 주었고 그의 그런 유아독존적 오연함은 기존의 영화인들로부터 가끔 오해와 빈축을 샀다.

“야! 미국에서 유학 못한 놈들은 어디 영화감독 하겠냐?”

다른 영화감독들은 맞대놓고 그를 향해 비아냥거리거나 시비를 걸었지만 그는 오불관언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며 담배연기만 풀풀 날리다가 어디론가 휙 나가버리곤 했다.

내가 하길종감독을 알게된것은 영화 ‘바보들의 행진’ 주제가 ‘날이 갈수록’을 작곡·작사했던 당시 연세대학생 가수 김상배군과 지연때문이었다. 김상배군은 ‘겨울나그네’, ‘별들의고향’ 등 무수한 베스트셀러소설과 몇편의 시나리오까지쓴 최인호의 연세대 국문과 후배로서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 최인호와 함께 대학축제 사회자역으로 잠시 출연한 다재다능한 학생이었다.     

(정리/조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