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별사 전문수록]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시절인연(時節因緣) 다 돼 떠나는 것”
[고별사 전문수록]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시절인연(時節因緣) 다 돼 떠나는 것”
  • 이지완 기자
  • 승인 2023.04.18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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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현에 보내는 고별사, 담담히 지난 4년간 성과 짚어
윤 관장 “하고 싶은 말 많으나 참겠다”…뼈 있는 말 남겨
▲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사진=MMCA 제공)

[서울문화투데이 이지완 기자] 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이 18일 고별사를 보내왔다. 윤 관장은 지난 13일 홀연히 문체부에 사표를 제출하고 관장직을 사임해 미술계와 문화예술계에 적잖은 충격을 줬다. 전 정부에서 연임된 윤 관장은 정부가 바뀌면서 그동안 끊임없이 사퇴 압박에 시달려 온 것으로 알려졌다. 사표 제출 하루 만에 문체부가 전격적으로 사표를 수리한 것이 이를 방증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윤 관장에게는 18일 전날 사표 수리가 통보된 것으로 알려졌다. 윤 관장은 ‘국립현대미술관 가족 여러분에게’라는 제목으로 고별사를 전했다. 글은 “뭐라고 서두를 꺼내야 할지 망설여진다. 한마디로 나는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다되어 미술관을 떠나고자 한다”라고 시작된다.

200자 원고지 15매 남짓되는 윤 관장의 고별사에는 관장직을 수행했던 지난 4년간 국현의 성과와 아쉬움이 담겨있다.

윤 관장은 관장 재임 시절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여러 사업들에 대해 전반적으로 언급하며 코로나19로 인한 미술관이 처한 어려움 속에서도 ’세계10대 온라인미술관‘으로 올라선 것과 미술한류를 이끌어 낸 점 등을 우선으로 꼽았다.

그가 주요 성과로 언급한 것은 ▲세계 10대 온라인미술관 선정 ▲‘미술한류’ 사업 ▲‘미술관 소장품 1만 점 시대’ ▲국립기관 지역분관시대 ▲이건희컬렉션 전시 ▲백남준의 대표작 <다다익선>의 보존처리 등의 사업성과를 언급하며, 코로나시국을 이겨내고 새로운 도전을 했던 지난 시간을 회고했다. 또한, 대 내외적으로 자신이 이룬 업적이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담담히 회고했다.

말미에 붙인 내부 직원들에게 당부하는 말에는 황망하게 떠나게 돼 미안함을 표하면서 “역사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행보를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운을 뗀 후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참겠다”라며 뼈있는 말을 남겼다. 이는 그간 미술관 내부 직원들 간의 알력으로 인해 불거진 여러 문제에 대한 회환으로 보인다. 끝으로 윤 전 관장은 회자정리를 언급하며, 시절인연의 다함을 고했다.

한편, 지난 13일 문화체육관광부에 사의를 표명한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의 사표가 18일자로 수리된 것으로 알려졌다. 문체부는 누리집을 통해 윤 관장의 의원면직 처리를 게시했다. 앞으로 국립현대미술관장은 박종달 기획운영단장 직무대행 체제로 운영된다. 새 관장 선임을 위해 인사혁신처는 내달 초 추후 공고를 낼 예정이다.

다음은 고별사 전문 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가족 여러분께

그동안 안녕하셨는가요. 뭐라고 서두를 꺼내야 할지 망설여집니다. 한마디로 저는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다되어 미술관을 떠나고자 합니다. 이에 작별 인사를 올립니다.

4년간 관장직을 맡아 미술관 업무에 동참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여러분과 동고동락하면서 유익한 시간도 많았고, 또 아쉬운 시간도 많았습니다. 세월은 정말 빠르게 흘러 갔습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는 오랜동안 미술관 문을 닫게하면서 어렵게 했습니다. 그렇다고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에 우리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순발력과 저력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었습니다. 세계 10대 온라인미술관의 하나로 선정된 것은 이와 같은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코로나19 사태도 진정된 상황이고, 지금은 꽃 피는 봄날입니다. 미술관의 새로운 분위기를 염원하게 합니다.

재임 당시 제가 추진한 중점 사업은 몇 가지 있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회고해 본다면, 우선 ‘미술한류’ 사업을 들고 싶습니다. 한국 현대미술의 국제화 사업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미술한류를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문판 한국현대미술사의 출판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갖가지 난관을 뚫고 『한국미술 1900-2020』을 출판한 것은 참으로 다행입니다. 우리는 지난해를 ‘미술한류 원년’으로 삼고 로스엔젤레스 LACMA에서의 근대미술 특별전 공동주최를 비롯해 보스턴 지역에서의 한국미술주간 행사 등 나름 화려하게 출발했습니다. 올해는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실험미술전과 샌디에고미술관에서의 채색화전 등 대륙별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미술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미술한류 사업은 대중문화 중심의 한류 바람에 이은 순수예술의 동행이라는 점에서 뜻깊습니다.

‘미술관 소장품 1만 점 시대’에 진입했다는 기록도 세웠습니다. ‘동산방컬렉션’ 기증에 이어 우리는 삼성가의 이건희 회장 유가족으로부터 다량의 미술품을 기증받았습니다. 거국적 관심사로 부상된 이건희컬렉션의 기증품은 여러 가지 형식의 전시로 이어졌고, 늘 장사진을 이루게 했습니다. 이건희컬렉션 때문에 미술관을 평생 처음 찾은 사람도 많아지면서 미술 대중화에 기여했습니다. 서울관 전시의 경우, 입장을 기다리는 관람객의 줄이 종친부 앞마당까지 길게 늘어선 광경, 참으로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저는 삼성가 출신으로 미술관 재임시에 이건희컬렉션 기증의 중간 역할을 한 것을 커다란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희컬렉션은 거국적으로 미술(관) 문화를 일상화‧대중화하는데 기여했고, 더불어 기증문화에 대해서도 새롭게 부상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미술관 내부로 눈을 돌리면, 우리는 4관 체제로, 국립기관 지역분관시대를 새롭게 열었습니다. 각 기관마다의 성격 부여라는 특성화 사업은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제 우리는 제5관으로, 대전관의 개관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더 기억하고 싶은 쾌거가 있네요. 바로 미술관 개관 반세기 만에 ‘1급 미술관으로의 격상’입니다. 진행 과정의 비화는 나중에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국립현대미술관은 오랜 숙원으로 남아 있던 1급 기관으로 상향 조정되었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런 일입니다.

백남준의 대표작 <다다익선>의 보존처리 이후 다시 불을 밝힌 일은 정말 흐뭇했습니다. 또한 지역 미술관 협력망 사업을 통해서 미술관 문화를 활성화하고자 했습니다. 우리 미술관은 대중적 관심을 듬뿍 받았고, 언론으로부터도 그랬습니다. 초기와 비교하여 거의 두 배에 이르는 언론 보도 건수가 이 점을 의미합니다. 연간 언론 보도 건수는 5천 건 이상일 정도로 우리 미술관은 언론 노출의 빈도수가 높았습니다. 그만큼 미술관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의미일 겁니다. 그 외 소외된 장르와 작가를 통한 균형 잡힌 전시를 개최했고, 이런저런 다양한 일과 이야기꺼리는 미술관을 살아 있는, 그야말로 역동적인 예술공간으로 거듭 태어나게 했습니다.

우리 미술관은 항상 좋은 일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안타깝고 아쉬웠던 시간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국립현대미술관은 이제 국제 사회에서 우뚝 솟아 존재감을 높이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미술관 가족 여러분의 노고에 따른 결과입니다. 많이 고맙습니다. 물론 미술관 밖에서 음으로 양으로 도와준 따듯한 손길도 너무 많았습니다. 이에 그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국립현대미술관 가족 여러분

이제 저는 사랑했던 미술관을 떠납니다. 임기 도중에 황망하게 떠나게 되어 미안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도 미술관은 새로운 환경으로 더욱 발전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일찍이 어느 선각자는 사람은 역사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역사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행보를 함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참겠습니다. 아무튼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만나면 꼭 헤어지는 게 이치 아닙니까. 이제 시절인연이 다한 것 같아 자유 찾아 저는 미술관을 떠납니다. 그동안 너무 고마웠습니다.

미술관 가족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2023년 4월 18일     

 윤 범 모 드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Park Jung Hoon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Park Jung Hoon (사진=MMCA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