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연극 <나쁜 자석>, 벌어진 상처를 아물게 할 ‘작은 씨앗’
[리뷰]연극 <나쁜 자석>, 벌어진 상처를 아물게 할 ‘작은 씨앗’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3.04.18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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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8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

[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공기는 달콤하고, 빨갛고, 파랗고, 노랗습니다. 이제 하늘은 꽃잎들로 가득합니다. 하늘이 이렇게 아름다웠던 적은 없었습니다.”

연극 <나쁜 자석>에는 스코틀랜드의 작은 패별 마을 거반(Girvan)에서 함께 유년 시절을 보낸 네 명의 친구들 고든, 프레이저, 폴, 앨런이 등장한다. 그리고 작품은 이들이 기억과 비밀을 공유한 9살, 19살, 29살의 시공간 그리고 고든이 쓴 두 편의 동화 속을 넘나든다. 복잡해 보이는 구성이지만 모든 사건과 이야기는 네 친구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다 보면 ‘하늘정원’과 ‘나쁜 자석’은 네 친구 관계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늘정원’ 속 죽은 왕비를 십 년 동안 애도하던 왕처럼 프레이저는 죽은 고든을 십 년 동안 잊지 않았다. 타임캡슐에 묻을 만한 소중한 물건이 하나도 없던 고든에게 ‘황금’ 같은 우정과 추억을 선물하려 했지만, 결국 그 무게 때문에 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에 휩싸여 끝도 없는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순리를 거스르는 것. 세상은 이를 두고 ‘나쁘다’고 말한다. 물건을 끌어당기는 속성 때문에 한 곳에 모여살 수밖에 없었던 자석들은, 같은 극을 밀어내는 성질 때문에 다가갈 수도, 안을 수도 없이 서로를 밀어내게 된다.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지만 밀어내는 네 친구는 모두 자석이었고, 이 중 고든은 사랑하기 위해 스스로 ‘나쁜’ 자석이 됐다. 

연극 <나쁜자석>은 과거와 현재, 현실과 동화를 오가는 플래시백 기법을 사용해 크게는 네 친구를 주인공으로, 작게는 고든의 이야기와 노래 가사를 통해 인간관계와 그 속에서 받는 상처와 외로움을 표현한다. 아울러, 이들에게 중요한 매개였던 ‘밴드’의 특성을 살린 강렬한 음악들 역시 서사와 관계의 변화에 따라 분위기를 달리하며 작품의 매력을 더했다.

작품은 고든과 프레이저의 관계를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뿔뿔이 흩어졌던 이들을 다시 만나게 한 건 앨런과 폴이다. 뚱뚱하지 않지만 뚱땡이로 불리는 앨런은 바보 같아 보이지만 사실 이들 중 가장 눈치가 빠르다. 최아론은 어리숙한 듯 보이지만 친구들의 눈을 피해 표정을 갈무리하고, 진실을 마주하면 관계가 깨질까 두려워하는 앨런을 섬세하게 보여주며 캐릭터에 대한 답답함 대신 동정과 공감을 불러왔다.

이 작품에서 어쩌면 가장 이해받지 못할 캐릭터는 아마 폴일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프레이저 옆을 졸졸 따라다니면서도 그에 대한 열등감을 숨기지 못했던 폴은 어쩌면 고든을 잘 아는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김찰리의 폴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집안이 부유했던 프레이저, 앨런과 달리 폴과 고든은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비록 고든의 ‘실비아 플라스’와 ‘커트 코베인’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마지막까지 고든을 자신의 방식대로 기릴 최선의 방법을 찾는다. 김찰리가 그려내는 폴은 자신의 과거를 연민하지 않아 오히려 관객의 이해를 얻는다. 

극 후반, 앨런이 친구들을 위해 만들었지만 끝까지 숨기고 싶어 했던 기계는 프레이저에 의해 폭발한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진 기계는 무수한 꽃비를 하늘 위에 흩날린다. 무대 벽면 전체를 덮고 있는 스크린은 화려한 무대 효과나 장치가 없지만, 그 자체로 공연장 전체를 고든의 동화 속 풍경으로 만든다. 공기는 더 이상 달콤하지도 빨갛지도 파랗지도 노랗지도 않지만, 고든이 친구들에게 처음 들려줬던 ‘하늘정원’은 씨앗이 되어 이들 사이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