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청명(淸明), 김백봉의 삶과 미학
[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청명(淸明), 김백봉의 삶과 미학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23.04.19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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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 평론가/연출가

‘서울로 가겠습니다. 공산당 치하에선 예술 활동을 할 수 없어요.” 한국전쟁 초기였던 1950년 11월 12일, 평양에서 활동하던 무희(舞姬) 김백봉이 남측에서 온 유력자를 보고 한 말이다. 한 시절 김백봉은 ‘반공(反共)무용인’으로 불렸다.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프로파간다(propaganda)로 이용될 소지가 충분했다. 

낙원동 164번지 

냉전체제의 덕을 본 무용가로 김백봉을 기억하는가? 아니다. 때론 이중간첩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귀순의 의도를 의심하기도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김백봉은 오직 춤에 전념했다. 1953년 3월 4일, 김백봉은 여자연구생 50명을 모집한다고 광고한다. 3월 15일, 김백봉무용연구소가 개소했다. 여기는 묵정동이 아니다. 미군의 지원을 받아서 만들어진 600평 공간이 아니다. 서울에서 김백봉이 자력으로 처음 둥지를 튼 곳은 낙원동 164번지. 

1953년은 ‘김백봉의 해’라고 불러야 한다. 5월 2일부터 4일까지 배재학당에서 열린 무용콩클에서 김백봉무용연구소는 군무부(群舞部)에서 1등을 했다. 10월 23일과 11월 3일, 각각 배재학당에서 열린 공연에서 김백봉이 만든 어린이춤은 주목을 받는다. 그 해 11월 27일, 충무로 2가 카페 ‘카네기홀’에 무용가들이 모였다. 마산에서 활동하던 김해랑(1915~1969)도 오랜만에 서울에 왔다. 12월 8일, 김해랑을 회장으로 추대하며 ‘한국무용예술협회’가 정식으로 발족했고, 김백봉무용연구소가 협회 사무실이 되었다. 김백봉은 이렇게 한국춤의 새 흐름을 만들어내고, 한국무용계가 새 판을 짜는데 조력자로서 큰 역할을 했다. 낙원동 164번지는 한국 근현대무용사와 연관해서 표지석을 세워야 할 곳이다. 

김백봉과 지영희 

1954년, ‘한국예술무용연구소’란 이름으로 묵정동에 넓은 무용공간이 생겼다. 김백봉을 중심으로, 여러 무용가가 이 장소를 공유하게 된다. 여기서 김백봉은 점차 많은 인원이 출연하는 대작을 준비하게 된다. 11월 26일, 한국예술무용연구소가 주최한 김백봉의 무용공연은 대성공이었다. 날마다 3회씩 사흘 동안 공연을 했는데, 일반 관객이 가장 좋아한 프로그램은 역시 부채춤이었다. 김백봉은 안무뿐만 아니라 의상도 직접 고안했다.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지영희(1909~1980)의 무용음악이다. 지영희 성금연 부부를 포함해서 4인이 맡았다. 최초 부채춤의 무용음악은 지영희가 구성했다는 것도 정확히 알려져야 한다. 

프로그램이 매우 버라이어티했는데, 평양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대표작 ‘녹음방초’(1947년)도 재연되었다. 50년대와 60년대 김백봉의 대표작 중의 하나다. 1962년 5월 20일, 제 6회 세계민속예술제가 파리에서 열렸다. 서방국가들이 참여하는 최고의 축제로, 대한민국정부(공보부)는 16인의 예술인을 파견한다. 여기서 ‘녹음방초’는 김백봉과 허경자의 듀오로 공연했다. 

김백봉의 작품이 이 때 유독 주목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무용의 계보, 한국정치의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다. 무용평론가 조동화(1922~2014)의 확실한 리뷰가 있다. 당시 대개의 무용가가 한국적인 정조(情調)에 치중함에 반해서, 김백봉은 유독 무용 자체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데 주목했다. 조동화는 건강한 템포, 드라마틱한 기법, 현대적 표현방식을 김백봉춤의 세 가지 특징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무대를 활용할 줄 아는 무용가’로서 김백봉을 자리매김한다. 

1956년 4월 12일, 시공관(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김백봉무용발표회가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대한민국의 큰도시 중고생들은 이 공연을 영상을 통해서 만났다. 당시는 미공보원(USIS)가 제작한 리버티뉴스를 시민회관 등에서 단체관람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여기서 부채춤과 함께 무용극 ‘우리 마을의 이야기’를 다뤘다. 혹 달린 할아버지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김백봉이 할아버지, 허경자가 천사 역을 맡았다. 김기수(1917~1986)가 작,편곡을 했고, 국립국악원 악사가 참여했다. 단소와 거문고 등 국악기 솔로를 잘 살렸다. 정악적인 느낌이 곳곳에 배어있으나, 진도아리랑과 같은 민요를 기악화해서 반주로 잘 활용한다. 

대한민국 무용극의 한 축을 담당했던 김백봉과 관련해서, 김희조(1920~2001)와 박만규를 빼놓을 수 없다. 1975년 7월 16일, 무용극 ‘심청’이 공연을 시작했다. 김백봉(안무) 박만규(대본) 안제승(연출) 김희조(작곡)의 4인이 의기투합했다. 이런 인연을 시작으로 박만규의 한국적 뮤지컬작품은 김백봉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애정있게 안무를 했다. 

김백봉과 성금연 

평생 춤만을 위해서 살아온 김백봉! 많은 작품 중, 가장 김백봉다운 작품은 무엇일까? ‘청명심수’를 뽑겠다. 산조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성금연이 타는 가야금산조가 기본이 되었다. 

1993년 5월 17일과 18일,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초연한 ‘청명심수’는 가장 김백봉다운 작품이다. 1972년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무용가로서 좌절했던 김백봉은 가야금산조를 통해서 자신의 춤세계를 다시금 정립했다. 당시 산조를 바탕으로 50분을 독무 중심으로 이끌어간다는 건 누구든 무대에서 실행하기 어려운 도전이었다. 이 때의 무용음악은 지미자(성금연 차녀)와 이생강이 맡았다. 

김백봉은 산조를 ‘마음의 노래’요, ‘영혼의 속삭임’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자신의 산조춤에 청명심수(淸明心受)란 이름을 부쳤다. 김백봉의 춤은 이렇듯 맑은 것[淸]과 밝은 것[明]을 지향한다. 

가야금산조의 명인 성금연(1923 ~ 1986)과 청명심수라는 산조춤의 걸작을 남긴 김백봉(1927~2023)은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산조를 사랑했지만, 방송이나 공연 등에서 시간의 구애를 받았다. 산조연주와 산조춤이 마치 조각보의 한 조각과 같았다. 두 사람은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의 삶을 건 작품을 만들어냈다. 성금연이 1980년대 이국땅 하와이에서 ‘장편의 산조’를 완성했다면, 김백봉은 1970년대초반부터 시작해서, 1993년에 완성했다. 김백봉의 말을 빌리자면, ‘산조가락에 맞춰 발표해온 소품들을 일관된 흐름을 지닌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시킨 적이 청명심수! 이 작품은 다섯 부분으로 이어간다. 명상 – 개안 - 법열 - 공 – 환생인데, 이는 진양조의 명상적인 가락으로 시작해서, 새로운 삶을 지향하며 휘모리의 판타지로 가는 장단 배열과도 병치해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옛날엔 기술, 지금은 기분 

김백봉의 ‘청명심수’에는 기쁨과 비애, 구원과 번민 등 인생사의 여러 단면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걸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 청명심수를 초연하면서, 김백봉이 남긴 명언이 있다. “옛날엔 기술로 춤을 추었다면, 지금은 기분으로 춤을 춘다.” 

많은 한국무용가들이 한, 흥, 멋을 내세웠다면, 김백봉은 좀 다르다. 김백봉은 감정으로 춤을 추지 않았고, 기분으로 춤을 부었다. 기분(氣分)이란 무엇일까? 기(氣)의 나눔[分]이다. 세상과 자신의 기운을 바르게 널리 나눌 때, 기분이 좋아진다. 김백봉은 그렇게 청명의 기운과 청명한 기분을 세상에 전해주었다. 천지에 맑고 밝은 기운이 가장 충만한 때가, 24절기 중 다섯 번째 청명이다. 2023년 4월, 무용가 김백봉은 청명 절기를 보내고서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는 김백봉의 춤에 내재한 ‘맑고 밝은 기운’을 더욱더 새겨야 한다. 김백봉은 ‘춤을 통해서 기(氣)를 아름답게 나눈(分) 무용가’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