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상처입은 용’ 윤이상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상처입은 용’ 윤이상
  •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 /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 객원기자
  • 승인 2023.04.19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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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윤이상(尹伊桑, 1917~1995)을 아시는가? 독일에 머물던 1967년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고문 끝에 ‘동베를린 간첩단’으로 조작된 사람, 조국의 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 모든 걸 바쳤지만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눈을 감은 비운의 음악가. 우리는 아직 그를 온전히 알지 못한다. 분단과 냉전의 기득권 체제가 그의 인간과 음악을 질식시키고 일그러뜨렸기 때문이다. 윤이상의 어머니는 태몽에서 한 마리 용이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는데, 그 용은 상처를 입은 채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 태몽이 현실로 나타난 것일까. 윤이상은 분단과 독재 체제에서 피 흘리며 쓰러진 ‘상처입은 용’이었다.   

그는 20세기 세계의 5대 작곡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현대음악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음악가들은 늘 새로운 기법을 모색했는데, 그 결과 음악은 난해해졌고 대중과 멀어졌다. 존 케이지는 조성 음악은 물론 무조 음악까지 거부했는데, 이것은 클래식 음악의 죽음을 상징했다. 1958년 다름슈타트 음악제에서 음악인지 아닌지 모를 존 케이지의 퍼포먼스를 목격한 윤이상은 “산더미를 준다 해도 이런 짓을 하기는 싫다”고 했다. 그는 슈토크하우젠, 루이지 노노, 피에르 불레즈의 음악에 매료됐지만, “교묘한 형태의 현대식 고층건물” 같은 이런 작품들을 쓸 생각이 없다고 했다. 대신 그는 동양 음악의 ‘주요음’ 기법을 도입, 노자의 철학과 같은 환상의 세계를 그렸다. 서양 음악은 점과 점을 연결하는 직선으로 이뤄진 도형이지만, 동양음악은 한 획으로 이뤄져 있으며 굵기가 계속 변한다. 

1959년 다름슈타트에서 발표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은 ‘주요음’ 기법을 사용한 첫 작품으로, 청중들의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1966년 도나우에싱엔 음악제에서 발표한 <예악>은 목관 연주자 12명, 금관 연주자 10명, 30개 이상의 타악기, 하프 두 대, 그리고 현악기가 등장하는 작품으로, 무한의 시간 속에서 흐르는 소리의 향연이다. 윤이상의 새로운 시도는 유럽 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극도의 추상성, 소리의 계산화, 고도의 지능화로 중심 없이 표류하던 서양 음악은 윤이상의 손에서 새로운 피를 공급받았다. ‘영감’, ‘감성’, ‘민족성’이란 말이 배척되던 유럽 음악에 그는 인간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윤이상은 자신의 음악은 모두 통영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고향에서 들었던 소리가 그의 음악 모티브였다. “그 잔잔한 바다, 그 푸른 물색, 가끔 파도가 칠 때도 그 파도소리는 내게 음악으로 들렸고, 그 잔잔한 풀을 스쳐가는 초목의 바람도 내겐 음악으로 들렸습니다.” 아름다운 고향의 소리는 언제나 그의 마음에 사무쳤고 그의 음악에 메아리쳤다. 이 통영 거리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고, 생가에 그의 이름을 쓸 수 없게 한 야만의 레드 콤플렉스, 그것이야말로 분단과 냉전이 낳은 가장 깊은 적폐 아니었을까. 

윤이상을 정치적으로 만든 사람은 박정희였다. 1917년생 동갑이었던 두 사람은 1964년 박정희가 서독을 공식 방문했을 때 만났다. 환영행사에서 본(Bonn) 시립교향악단이 윤이상의 <낙양>(洛陽)을 연주한 직후의 커피타임, 뤼프케 서독 대통령이 좌중에게 윤이상을 소개하자 박대통령은 아무 말도 표정도 없이 손만 내밀었다. 윤이상, 박정희, 뤼프케의 순서로 앉았는데, 음악에 식견이 있던 뤼프케 대통령은 박정희를 건너뛰고 윤이상을 향해 자꾸 <낙양> 얘기만 했다. 박정희가 이 시간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국가원수’인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가 윤이상과의 첫 만남을 그다지 유쾌하게 여기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윤이상 <낙양> 

4.19 때 피에 묻혀 뒹구는 청년학생들을 생각하며 라디오 앞에서 펑펑 울었던 윤이상…. 민주주의를 군화발로 짓밟은 5.16 쿠데타의 주역 박정희…. 두 사람은 아무래도 서로 좋아할 수 없었다. 박정희와 윤이상은 이 기간에 세 번 마주쳤지만, 단 한 번도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윤이상이 묘사한 박정희의 첫 인상이다. “그의 얼굴에서 덕(德)이나 인(仁)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둡고 강직하고 치밀하고, 그리고 어떤 종류의 ‘범죄형’적인 인상까지 풍겼다.” 

이 불길한 만남은 3년 뒤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비화됐다. 1967년에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동시에 치렀는데, 부정선거 시비가 끊이지 않자 박정희 정권은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여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다.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유럽에 거주하는 예술가, 교수, 의사, 공무원, 외교관 등 무려 194명을 체포할 계획을 세웠고, 박 대통령은 이를 승인했다. D-데이는 6월 18일이었다. 체포된 사람 중에는 작곡가 윤이상 뿐 아니라 화가 이응로, 시인 천상병도 있었다. 

한국의 중앙정보부는 윤이상을 간첩 수괴로 몰기 위해 모진 고문과 구타를 가하며 자백을 강요했다. “너는 북조선의 거물 정탐꾼이다, 특무다, 공산주의자다, 당원이다, 너는 조직의 왕초다….” 고문에 굴복할 수 없었던 윤이상은 자살을 기도했다. 그는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책상 위의 묵직한 유리 재떨이로 자신의 뒤통수를 여러 차례 강타했고, 철철 흐르는 피를 손가락에 묻혀서 벽에 유언을 썼다. “나의 아이들아, 나는 스파이가 아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을 향해 가는 자신의 삶을 서러워하며 정신을 잃었다. 예술가로 성공하여 조국의 명예를 드높이고 동포들의 환영 속에서 귀국하겠다는 그의 꿈은 이렇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