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아무 것도 아닌 듯’ 그러나 매우 그럴듯한 이야기 Ⅲ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아무 것도 아닌 듯’ 그러나 매우 그럴듯한 이야기 Ⅲ
  • 이지완 기자
  • 승인 2023.04.19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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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 이어서>

그러나 성능경의 퍼포먼스에 반드시 놀이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복과 도발, 풍자와 해학, 융합과 해체, 기성의 가치에 대한 긍정과 부정, 양식화된 퍼포먼스의 순차적 배열13)과 즉흥적 애드리브 등등은 그의 퍼포먼스를 생기있게 만드는 대립항이자, 퍼포먼스 속에 혼재해 있다가 서로 밀치거나 끌어당기는 심리적 뇌관들이다.

성능경이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군대에 갔는데, 1970년부터 73년에 이르는 군복무 기간은 미술활동의 공백기였다. 미술계에 그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 것은 70년에 결성한 ST 그룹에 들어가면서부터 였다. 성능경은 <<제2회 ST전>>에 출품, 작가로 활동하게 된다. 그런데 그 이듬해인 1974년 그는 <신문: 1974.6.1.이후>라고 하는 제목의 문제작을 <<제3회 ST>>전에 출품하게 된다. 이 작품은 매일 집에 배달돼 오는 신문(동아일보)에서 광고를 제외한 기사를 면도칼로 오려낸 뒤, 기사는 커다란 청색 아크릴 박스에, 나머지 부분은 흰색 아크릴 박스에 담는 일종의 오브제, 설치작업이었다. 또한 전시기간 동안 성능경은 매일 새로운 신문을 벽에 붙이고 기사를 오려낸 뒤, 나머지 신문지를 그 위에 연거푸 붙이는 실질적인 퍼포먼스를 행했다.14) 성능경은 이태 뒤인 1976년에 드디어 이벤트란 이름을 걸고 <신문읽기>란 제목의 행위를 하게 된다. 이 이벤트를 기점으로 그는 같은 ST회원인 이건용, 김용민, 장석원 등과 함께 다양한 이벤트 활동을 벌이면서, 나중에는 신문사진을 접사, 인화, 확대하는 등 새로운 방법론을 개척해 나간다.15) 

Ⅱ.

1970년대에 성능경의 작업에서 사진의 등장은 날지 못하는 새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었다. 그는 사진, 즉 카메라를 사용하여 <끽연>(1976), <위치>(1976), <수축과 팽창>(1976), <어느 도망자>(1977), <현장>(1979-2013) 등등 다양한 시각에서 인간, 사물16), 사회와의 관계를 다채로운 기법과 재료를 통해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남보다 먼저 ‘신문’이란 매체에 주목한 성능경은 신문의 내용은 물론 신문에 나오는 화살표와 같은 기호들에 주목했다. 흔히 신문 사진에서 사건 ‘현장’을 가리키는 의미로 이미지 위에 손으로 투박하게 그린 화살표, 점선이 모여 형성된 원, 삼각형, 타원, 옆으로 긴 직사각형, x자 등등은 <특정인과 관련 없음>(1979, 흑백사진, 브로마이드, 실크스크린, 25.3x20.3cm 110점, 국립현대미술관, 작가 소장) 연작에 집약적으로 나타나거니와, 이 일련의 작업은 당시 그가 얼마나 비판적 시각에서 사회를 바라봤는가 하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17)

Ⅲ.

90년대 초에 성능경은 극심한 공황장애를 겪고 심한 경우 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었다.18) 이때는 70년대를 점유한, 단색화로 대표되는 모더니즘과 1979년, <현실과 발언> 그룹의 창립을 기점으로 80년대를 점유하게 된 민중미술이 교체되는 전환의 시기였다. 70년대에 미술대학에서 학창 생활을 보낸 젊은 작가들은 1979년에 발생한 ‘10.26사태(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과 연이어 발생한 ‘12.12사태’, 그리고 1980년의 ‘5.18민주화운동’, 1979-80년에 잠시 찾아온 민주화운동(서울의 봄) 등 일련의 정치적 파동을 겪으면서 이념이나 관점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젊은 작가들이 주축이 돼 많은 미술그룹들이 탄생하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못 된다.

그런 까닭에 이 시기에 성능경이 겪은 정신적 아픔은 정도의 차이만 다를 뿐,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국민이라면 누구든지 공감할 그런 아픔이었다. 성능경이 지금과 같은 형태의 퍼포먼스(품바)를 처음 시도한 것은 사진작가 김장섭이 기획한 [11월 한국 사진의 수평]전(장흥 토탈야외미술관)의 개막식에서 였다. 그 이후 현재까지 32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며, 그동안 성능경은무려 170여 회의 퍼포먼스 발표회를 가졌다. 그 많은 숫자의 퍼포먼스에 대한 상론(詳論)은 생략하련다. 그러나 한가지 밝혀두고 싶은 것은 그 긴 세월을 통해 성능경은 예지에 반짝이는 촌철살인의 경구들을 낳은 것을 비롯하여, 대중의 상식을 뛰어넘는 행위들19)을 시도,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는 일련의 퍼포먼스 레퍼토리를 창출해 냈다.

‘망친 사진이 아름답다’(1991)를 필두로 시작된 반어법(反語法)의 전개는 90년대 이후로 접어들면서 ‘예술은 착란의 그림자‘(2001), ’예술은 무광의 아우라’(2001), ‘어디 예술 아닌 것 없소’(2007), ‘나는 말단입니다.’(2008) 등등 1백 수십여 개의 작품 표제와 어록을 생산했다.

이번 백아트 갤러리의 초대전 제목처럼, 처음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듯’ 하던 성능경의 예술행각은 이제 와 돌아보니, 거대한 의미의 숲을 이룬 것이다. 이제사 세상에 그 해석을 맡긴 형국이니, 아뿔사! 이걸 어쩌랴. 고수의 수에 넘어갔구나. 할!!!


13) 가령, 부채를 태우며 제문을 읽는 행위(도입부/성능경의 용어로는 시축송(始祝頌)를 필두로 새총으로 탁구공 쏘기, 체조하기, 솜방이 로 관객의 등짝 때리기, 관객에게 걷은 돈 나누어주기(전개부)등등 일정한 경계 없이 다소 산만하게 전개되다가 “희망의 나라로---“라는 노래의 끝 구절을 높은 톤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종반부/성능경의 용어로는 종축송(終祝頌))으로 퍼포먼스는 끝이 난다. 성능경 퍼포먼스의 이처럼 양식화된 형식은 작가 자신이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 연로해지면서 아이디어가 고갈돼 그런 것인지 확실치 않다. 여기에는 찬반의 논란이 있다. 가령 변화를 주장하는 행위예술가 이혁발은 “성능경의 퍼포먼스는 매번 똑같다. 그런데 매번 다르다.”고 말했으며, 논란의 중심에 있는 작가 성능경은 “야! 이 나이에 똑같은 거 하기도 어렵다. 아니, 똑같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 야! 다른 놈들 봐라. 나이 들어서 딴짓 하더라.” 그러나 확실한 것은 성능경 예술의 지주인 전위적 정신, 사회와 대중을 향한 예리한 풍자와 비판, 기성의 관념을 깨려고 하는 도전의식, 기존의 미에 대한 반란과 도발 등등은 나이가 들수록 그의 예술을 탄력있고 건강하게 지탱시키는 요인들이다.

14) 성능경은 당시 ‘이벤트(Event)’란 용어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 행위를 했으니, 말하자면 이름 없는 최초의 이벤트를 한 것이다.

15) <8면의 신문>, 1977, 사진 58.5x42cm 128장 설치,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특정인과 관련 없음1>, 1977, 흑백사진, 브로마이드, 실크스크린, 25.3x20.3cm 110점 설치,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6) 가령 <돈세기>(1976), <돌던지기>(1976), <사과>(1976)와 같은 70년대의 행위 및 사진작품들.

17) 그러나 제3공화국의 공안정국에서 그가 벌인 이 일련의 작업은 별 검열 없이 넘어갔는데, 그 이유는 성능경의 작업이 공안요원을 비롯한 경찰이나 일반인들이 해석하기에는 난해하기 짝이 없는 개념미술적 경향을 띠고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훗날 성능경의 작업이 지닌 이 급진성과 사회적 비판의 메시지에 주목한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미술평론가 성완경(1944-2022)을 비롯한 민중미술 내지는 진보진영 계열의 인사들이었다. 성능경은 1989년 당시 동숭동 대학로 옆에 있는 나우갤러리에서 발표한 <넌센스 미술>을 계기로 전환의 시기에 접어든다. 신문지(한겨례신문) 6장과 누런색 포장지 6장을 각기 풀로 붙여 연결한 뒤, 그 위에 검정색 구두약을 밤새도록 반복해서 칠해 완성한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이제까지 지속해 온 신문작업을 마감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만, 심층적으로는 구두약을 칠해 반질반질해진 종이의 표면이 내뿜는 ‘아우라(aura)’의 너머를 보자는데 더 큰 뜻이 담겨 있었다. 즉 반질거려 썩을 줄 모르는, 바보같은 구석이 전혀 없고 이익을 찾아 눈을 번뜩이는 ’여우과‘에 속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란 곧 ’가망이 없는 사회‘임을 역설한 것이다. 성능경은 삶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나름대로 아픔과 소외를 경험한 사람이다. 성능경이 미술 경력 50년, 나이 팔십에 이르러 인정을 받기까지에는 이런 삶의 고뇌가 숨겨져 있다. 그랬던 그가 1989년 <넌센스 미술>로 겨우 인정을 받은 사실은(그것도 50여 년 몸담아 온 모더니즘 진영이 아니라 그 반대인 진보진영의 인사들로부터) 차라리 넌센스 내지는 코미디에 속하는 일이다. 이 시기에 민중 내지는 진보진영의 큐레이터들이 성능경을 초대한 해외전시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987 : 캐나타 토론토의 A-space와 미국 뉴욕의 Minor Injury에서 열린 [민중 ART(Minjoong Art-New Movement of Political Art From Korea)]전에서 <현장a>와 <현장b> 발표(엄혁 기획). 1999 : 뉴욕 퀸즈뮤지엄(Queens Museum of Art)에서 열린 <Global Conceptualism : Point of Origin 1950s-1980s>에서 <신문 : 1974.6.1. 이후>와 <신문 읽기> 발표(한국측 큐레이터 성완경)

(이상의 해외 전시참가 경력은 미술사가 조수진의 앞의 책과 성능경과의 인터뷰를 참고하여 작성함)

18) 필자와의 대화 중. 이에 관한 구체적인 문건은 성늠경이 참가한 2010년에 경기도립미술관이 주최한 [1970-80년대 한국의 역사적 개념미술 : 팔방미인]전 도록에 수록된 세미나 내용을 참고할 것.   

19) 예컨대 얇은 천의 막 뒤에서 행한 의사(疑似) 자위행위를 비롯하여 500cc 호프 잔에 소변을 본 뒤 마시기, 불이 켜진 작은 전지를 국부에 대고 관객을 향해 흔들기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