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리뷰]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展, “은유로 전하는 시대의 대안”
[현장리뷰]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展, “은유로 전하는 시대의 대안”
  • 이지완 기자
  • 승인 2023.04.19 16: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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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비엔날레 전시장, 총 5개 주제 공간
물처럼 여리고, 번지듯 퍼져나가는 연대와 힘
원로 및 신진, 여성, 원주민 출신 등 다양한 작가 참여

[서울문화투데이 이지완 기자] “‘인종 차별이 싫다’,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라는 직접적인 언어가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시대가 가지고 있는 주제나 문제들이 전달되는 작품들을 선정해 보여주고자 했다” 제14회 광주비엔날레 본 전시《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soft and weak like water)를 기획한 이숙경 예술감독이 지난 5일 이뤄진 전시투어 중 전한 말이다.

▲팡록 술랍 〈광주 꽃피우다〉 (2023) ⓒ서울문화투데이
▲팡록 술랍 〈광주 꽃피우다〉 (2023) ⓒ서울문화투데이

전시 주제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는 도가(道家)의 근본 사상을 담은 『도덕경』에서 차용해왔다. 전시는 ‘물’을 전환과 회복의 가능성을 가진 하나의 은유이자 원동력, 혹은 방법론으로 삼는다. 이를 통해 우리가 사는 지구를 저항과 공존, 연대와 돌봄의 장소로 상상해 볼 것을 제안한다.

이 예술감독은 테이트모던에서 갖게 된 ‘이주민 큐레이터’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주류 세계 밖의 목소리들을 이번 비엔날레 안으로 가지고 왔다. 제14회 광주비엔날레 참여 작가는 세계 각국 79명의 작가로 구성됐다. 서로 다른 세대와 문화적 배경, 지역을 바탕으로 동시대 예술을 실천하는 작가들이다. 원로 및 신진, 여성, 원주민 출신 등 다종다양한 스펙트럼의 작가들은 다층적이면서 평등한 시선들을 발산한다.

▲‘일시적 주권’(Transient Sovereignty)(제 4전시실)에서 전시투어를 진행하는 이숙경 예술감독 ⓒ서울문화투데이

시대, 국가, 경계를 넘어서는 연대

이번 비엔날레 작품 캡션은 조금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 캡션에는 작가의 국적이 아닌 출생지와 거주지, 활동 지역 등이 기재돼 있다. 이 예술 감독은 “같은 국적을 가진 작가라도 다른 문화권에서 자라오고, 환경이 다르면 전혀 다른 정서를 가지고 있다. 지금 시대를 가로지르고 있는 초국가성에 대해 드러내고자 했다”라고 설명했다.

이번 비엔날레의 본 전시는 과거 비엔날레에서 전시가 끝나는 공간으로 사용했던 좁은 복도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두운 공간이라 시작을 알리기에 적합지 않고, 전시장으로서도 좋지 않은 공간이라고 평가되지만 이 예술감독은 이 공간을 시작 지점으로, 조상들의 의례, 기독교와 아프리카 정신성의 관계를 주제로 작업해 온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불레베즈웨 시와니(Buhlebezwe Siwani)의 설치 작업 <바침>(An Offering)을 선보인다. 제 1 전시실 전체가 거대한 자연과 생태의 현장이 돼 관람객을 맞이한다. 전시실 가운데에는 물을 활용한 설치 작업 <영혼 강림>(The Spirits Descend)이 배치돼 회복의 기운을 전한다.

이 예술감독은 어두운 복도에서 전시투어를 시작하면서 유쾌하게 “기존 광주 비엔날레에서 관례적으로 행해온 것이나 사용한 것들을 대부분 존중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얼핏 흘려들을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그의 선언과도 같은 그 한마디에는 올해 광주비엔날레가 기존과는 다른 모습을 준비했다는 힘이 담겨있었다.

▲이승애, 〈서있는 사람〉 (2023) (영상 스틸).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제14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션. 작가 및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사진=광주비엔날레 제공)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는 저항, 해체, 탈식민주의, 생태, 환경 등의 ‘힘찬’ 메시지를 던지기도 하며 연대와 사유, 포용, 회복의 ‘부드러운’ 장을 제공하기도 한다. 즉, 강하면서도 서정적이며, 깊은 밀도감 속에서 창출되는 절제미가 돋보이는 전시 구성은 이질성과 모순을 수용하는 물의 속성을 반영하고 있다.

물이 휘몰아칠 때의 힘은 거대한 산을 무너뜨릴 수도 있지만, 잔잔하게 흐를 때는 종이 한 장 조차 밀어내지 못한다. 대신 물은 희미하게 종이와 옷깃을 적시며 번져나간다. ‘물’은 세상과 인류의 근원이면서, 모든 것을 연결하고 있는 물질이다.

이번 광주비엔날레 본 전시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에는 ‘미술’의 ‘물’과 같은 시도들이 담겨 있었다. 선명하게 선과 악을 구분 짓기보다, 이미 주류와 비주류로 나뉜 세계 속 살아가고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래리 아치암퐁 <글리스 연작1 #3>(2013)) 쉽게 인지하지 못한 경계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주류에 들어설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주목할 수 없었던 기록, 역사, 시도를(베티 머플러 <나라를 치유하다>(2019), 마타아호 컬렉티브-네 명의 마오리 여성 협업 공동체) 중심부로 가져와 ‘세계의 중심이 과연 단 하나여야 하는 가’라고 넌지시 묻기도 한다.

▲래리 아치암퐁 <글리스 연작1 #3>(2013) 등 ⓒ서울문화투데이 

광주비엔날레 전시장에서 선보이는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는 ▲들어서며 ▲은은한 광륜 ▲조상의 목소리 ▲일시적 주권 ▲행성의 시간, 총 5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들어서며’에서는 현 인류를 치유하는 자연의 목소리들이 담겨있다. 한국의 민간 신앙에서 망자의 비탄과 슬픔을 씻어내기 위해 치르는 씻김굿에서 착안한 이승애 작가의 <서있는 사람>(The Wanderer)이 이곳에 전시 된다. 작가는 씻김굿의 장면을 그대로 묘사하기보다 나무나 돌, 흙 등의 일상적인 물질을 종이에 문질러 얻은 추상적인 조각들로 오려낸 후, 벽면에 그린 드로잉과 연결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구현한다.

‘은은한 광륜’(Luminous Halo)(제 2전시실)에서는 팡록 술랍(Pangrok Sulap)의 5·18과 연관된 집단적 저항과 연대, 애도의 순간들을 포착한 〈광주 꽃피우다〉(Gwangju Blooming)(2023) 목판 작업이 오윤의 판화 작업과 공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상의 목소리’(Ancestral Voices)(제 3전시실)에서는 노에 마르티네스(Noé Martínez)의 가운데 매달린 <송이 3>(Bunch 3) 작품과 열한 개의 도예 조각으로 구성된 설치 작품이 펼쳐진다. 16세기 멕시코 사람들이 겪었던 집단적 트라우마를 조명하고, 서구적 세계관이 형성한 역사를 바라보는 대안적 해석을 제안한다.

‘일시적 주권’(Transient Sovereignty)(제 4전시실)에서는 호주 중앙 사막 지역 이완차 아트센터 소속의 존경 받는 여성 원로이자 아티스트, 전통 치료사인 베티 머플러(Betty Muffler)의 <나라를 치유하다>(Healing Country) 라는 대형 회화 작업을 만나볼 수 있으며, ‘행성의 시간들’(Planetary Times)(제 5전시실)에서는 디 왓슨(Judy Watson)의 인디고 물감, 캥거푸 풀 등의 재료를 활용한 <죽은 나무가 있는 버룸 강>(burrum river with dead tree) 등 회화 연작을 등을 선보이며 관람객을 마치 생태학적 환경에 놓이게 하면서 회복하고 치유하는 시간과 조우하게 한다.

▲불레베즈웨 시와니(Buhlebezwe Siwani) <영혼 강림>(The Spirits Descend) ⓒ서울문화투데이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대해

이번 비엔날레는 물처럼 여리지만, 강한 힘을 가진 흐름들을 많이 담고 있다. ‘은은한 광륜’(Luminous Halo)(제 2전시실)에서 볼 수 있는 작품으로 김순기 작가의 <광주, 詩>(2023) 라는 4채널 영상 설치작업이 있다. 이 작품은 전남여고 학생들과 함께 작업한 작품으로 조선시대 주요 여성 작가들의 시를 현재의 전남여고 학생들이 낭독하는 작품이다. 학생들의 낭독 모습 영상과 함께 폭풍우와 태풍의 영상이 함께 재생된다. 이는 목소리를 잃었던 전근대 여성들에게, 미래를 이끌 현재 청소년의 목소리를 입힘으로써 떨어져 있던 두 목소리를 하나로 합치는 작업이다.

담담하게 시를 낭독하는 현재 학생들의 모습과 함께 어우러지는 폭풍우와 태풍의 영상은, 청소년들에게 무언의 목소리를 전하는 과거의 움직임과 같이 느껴진다. 또한, 이 목소리가 현재 우리에게 닿기까지의 시간과 역경을 막연하게나마 느껴볼 수 있는 공간을 제안한다. 영상에서 낭독하는 시로는 ‘손가락에 봉선화를 물들이고’(허난설헌), 옛님을 그리워하며(매창), 청산은 내 뜻이요(황진이), 난설헌의 시에 의작하다(오효원) 등이 있다.

▲ 김순기 작가 <광주, 詩> ⓒ서울문화투데이

‘일시적 주권’(Transient Sovereignty)(제 4전시실)에서 볼 수 있는 한국으로 이주한 고려인 청소년과 함께 만든 작업 고이즈미 메이로의 <삶의 극장>(2023)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활동하는 고이즈미 메이로는 가족적인 것부터 국가적인 것에 이르는 권력의 역학을 다루며 정치적, 심리적 통제에 주목하며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삶의 극장>은 고려극장의 역사를 추적하는 과정 속에서 광주 고려인마을의 현재와 과거를 다루고 있다. 1932년에 설립된 카자흐스탄의 고려극장은 20세기 동안 고려인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상의 광주 고려인 공동체에 속한 15명의 청소년들과 워크숍을 갖고 연극적 장면을 연출해 담고 있다. 동시에 현재 아이들의 모습 위로 과거 고려인의 사진 자료들을 엮어서 선보인다. 시대를 뛰어 넘어 연결되고 있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것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을 모두 느껴볼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고이즈미 작가는 고려인의 이주가 일본의 식민지배 역사 속에서 시발됐다는 점을 인지하고 이번 작업을 진행했다.

▲고이즈미 메이로 <삶의 극장> ⓒ서울문화투데이

이외에도 본 전시는 외부 전시 공간인 국립광주박물관, 무각사,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 예술공간 집 등에서도 공간의 건축적, 역사적, 문화적 배경과 맥락에 상응하는 작업들을 선보이며, 시대의 새로운 지표가 될 목소리들을 전하고 있다.

또한 9개국이 참여해 본 전시와 연결되면서 각 국가만의 특성을 보여주는 ‘파빌리온’도 이번 비엔날레의 주목할 지점이다. 물의 은유를 통해 인간과 자연환경의 관계를 탐구해보는 이탈리아 파빌리온 《잠이 든 물은 무엇을 꿈꾸는가?》, 이누이트(Inuit) 예술 협업 공동체(웨스트 바핀 코어퍼레이티브)의 작품을 선보이는 캐나다 파빌리온 《신화, 현실이 되다》등이 있다. 또한, 동시대에 진행되고 있는 전쟁을 전면으로 드러내는《우크라이나: 자유의 영토》는 우크라이나 영화 3편을 공개하며 즉각적인 날 것의 감정을 전달한다.

▲알리자 니센바움, <신명, '어느 봄날', 드레스 리허설> (2022). 린넨에 유채. 2패널, 각 190.5 x 241.3 cm. 작가 및 뉴욕 안톤 컨 갤러리 제공. 사진: 토마스 바렛. © 알리자 니센바움 (사진=광주비엔날레 제공)

광주비엔날레 박양우 대표는 올해 비엔날레가 지금 이 시대에 새로운 담론을 제기할 수 있는 시도가 담기길 바란다고 밝힌 바 있다. 2023년 제 14회 광주비엔날레는 무조건 강한 ‘힘’만이 세계를 변화시키고, 이끌 수 있다고 믿는 세상의 주류를 흔들어 놓는 시도를 담고 있었다.

이 예술감독은 ‘은은한 광륜’에 전시된 브라질 작고 작가 루시아 노게이라의 작품을 선보이며, 서양미술에서 주도했던 ‘개념 미술’에서 다르게 뻗어나간 그의 작품을 주목했다. 이 예술감독은 “서구 중심에서 벗어나 미술을 바라본다면 ‘개념 미술’이라는 개념도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기준이 아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한 번 생각해보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인류는 오랫동안 하나의 기준, 몇 개 없는 가치들에 집중하며 살아온 지도 모른다. 이번 광주비엔날레는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그 기준들을 여리면서 강하게 흔드는 시도들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