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Interview] 카탈리나 메사 영화감독 “영화 속 마법이 현실로도 전달 될 것이라 믿어”
[Artist Interview] 카탈리나 메사 영화감독 “영화 속 마법이 현실로도 전달 될 것이라 믿어”
  • 이은영 발행인ㆍ이지완 기자
  • 승인 2023.05.10 0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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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코: 무한한 비상』 제작, 여성의 삶 담아
경영학 전공했지만, 프랑스 이주 후 문학ㆍ사진의 길 찾아
『제리코』 제작 후, 운명처럼 찾아온 ‘생태활동가’ 역할
아시아 국가, 내 내면 영혼이 충만해지는 공간 같아
광화문 이순신 동상서 한국의 힘 느껴, 인상적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을 찾는 삶의 태도 전하고파”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ㆍ이지완 기자/ 김지수 사진가/ 안신영 통역가] 영화 『제리코: 무한한 비상』(원제: Jericó, el infinito vuelo de los días)은 콜롬비아의 작은 도시 ‘제리코’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수도도 아닌, 작은 시골 마을이 소재고, 다큐멘터리 형식이기에 자칫 ‘지루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제리코: 무한한 비상』은 국경을 넘어 프랑스, 스페인 등 7개국에서 펼쳐진 어워드에서 수상을 했고, 40개국 축제에서 상영됐다. 한국에선 정식 개봉되지 않았지만, 지난달 15일 부산 영화의전당에 이어 서울 자하미술관에서 상영회를 열었고, 한국 관람객들에게 큰 공감과 호응을 이끌어냈다. 영화는 어떤 힘을 품고 있었을까.

▲『제리코 무한한 비상』 장면, 저녁식사를 하며 음악을 즐기는 칠리타의 모습 (사진=카탈리나 제공)
▲『제리코 무한한 비상』 장면, 저녁식사를 하며 음악을 즐기는 칠리타의 모습 (사진=카탈리나 메사 제공)

『제리코: 무한한 비상』은 지역의 광활한 자연경관을 보여주고, 남미 특유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감으로 물든 도시 이곳저곳을 천천히 비추면서 시작된다. 원경과 근경을 망설임 없이 오가는 장면들은 영화 속에서 제리코 마을의 외부적인 이미지와 깊숙한 이야기까지 만나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품게 한다. 영화는 제리코 마을에 사는 고령 여성들의 대화를 담고 있다. 영화를 보다 보면, 맥락 없이 흩어지는 여성들의 대화가 도대체 어디로 흐르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영화 속 여성들은 대화를 나누며 화장을 하거나, 예수 석상의 먼지를 닦고, 목장 일을 한다. 그럼에도 관람객들은 자꾸만 영화 속 그들의 이야기로 빨려 들어간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이나, 눈물이 펑펑 쏟아질 것 같은 감동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무엇이 관람객을 끌어당기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그들이 살아온 시간의 깊이와 그들이 삶을 대하고 있는 태도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아름다운 영상미도 눈을 뗄 수 없는 지점 중 하나다.

『제리코: 무한한 비상』의 카탈리나 메사 감독을 인왕산자락이 보이는 삼청동 자하미술관에서 만났다. 카탈리나 감독은 한국의 이명호 사진가와 협업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 상영회 또한 이 사진가와 협업 과정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카탈리나 감독은 굉장히 긍정적인 에너지를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인터뷰 질문을 신중하게 듣고, 생각을 하고 답을 전하는 그는 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감정의 파고를 설명하고자 손으로 물결을 표현하기도 하고, 장소에 대한 설명을 할 땐 그 공간을 연상할 수 있는 손동작을 하기도 했다. 그의 활발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친절한 마음도 느껴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카탈리나 감독은 자신과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기자 앞에서, 통역이 돼 자신의 대답이 한국어로 전달되기 전 최대한 자신이 말하고 싶어하는 바를 설명하고자 하는 듯 했다. 인터뷰 질문을 들을 때면,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마주치는 그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소통에 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감독의 에너지가 콜롬비아의 작은 마을 제리코를 전세계 이곳저곳으로 소개할 수 있는 동력이 됐을 것이라 생각한다.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카탈리나 메사 감독 ⓒ김지수 사진가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카탈리나 메사 감독 ⓒ김지수 사진가

『제리코: 무한한 비상』은 여성들의 삶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영화이다. 연애를 하고, 실패를 하고, 미래에 대한 꿈을 꾸기도 하고, 상실을 겪는 모든 순간들이 나온다. 관람객들은 그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과거나 미래들을 생각해보며 내면을 돌아볼 평온을 얻게된다. 영화 후반부 쯤 칠리타라는 여성은 “살다보면 달콤한 순간도 있어야지. 안 그럼 그 수많은 고통 속에서 어떻게 살아”라며 자신이 겪은 인생의 단면을 얘기한다.

카탈리나 감독도 평범한 삶의 길을 걸어오진 않은 인물이다. 콜롬비아에서 나고 자란 카탈리나는 원래 경영학과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다. 그러나 사회로 나와 활동는 과정에서 자신의 새로운 길을 찾고,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공연예술학, 문학 등을 공부했다. 2008년 자신의 제작사 Miravus(미라버스)를 설립하고 2017년엔 장편 영화를 제작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욱 세계를 확장한다. 현재 카탈리나 감독은 영화 제작을 하면서, 생태활동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녹색 외교관이라고도 불리우며, 콜롬비아를 중심으로 환경운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종로구 자하미술관에서 지난 달 20일 오후 두 시부터 진행된 두 시간여 인터뷰에서 카탈리나 감독의 세계를 다 만나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영화에 관한 이야기, 그의 인생사, 최근 관심을 갖고 있는 생태운동 등 다양한 주제들이 오고 간 인터뷰였다. 마치 『제리코: 무한한 비상』에서 펼쳐졌던 무한한 여성들의 대화와도 같았다. 카탈리나는 영화를 제작하면서, 현실이 더욱 영화같은 순간들을 만나게 됐다고 한다. 그의 말을 빌려 당시의 인터뷰를 설명하고 싶다. 한 편의 영화 같은 두 시간여의 대화였다.

한국에는 처음 방문했는가. 인도, 일본, 네팔, 부탄 등 동양의 국가를 여행했다고 알고 있다. 한국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는가.

한국에는 처음 방문했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내게 정신적으로 더 많은 영감을 주는 나라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렸을 적 천주교 집안에서 쭉 자라왔는데, 그런 종교적인 영역에서 동양이 지닌 불교적 가치관이 내게 좀 더 많은 세계를 열어주는 것 같다.

서울에 와서 특히 내게 크게 느껴진 것은 산으로 둘러싸인 한국의 지형이었다. 서울은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이 둘러싸고 있는데, 나 역시 산이 많은 지역에서 유년기를 보내 반가운 느낌이 있었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도시 중심부에 있던 동상과 기념비였다. 굉장한 힘과 강인함이 느껴졌다. 동상을 보면서 한국이 많은 어려움을 직면하면서, 그 역경을 통해 한국이 힘을 길러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광화문에서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봤을 때 약간 소름이 돋을 정도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이순신 장군 동상 뒤로 보이는 북악산의 기운도 내게 큰 힘으로 전달 됐다. 이 땅이 가지고 있는 기운이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자하미술관에서 만난 카탈리나 메사 감독 ⓒ김지수 사진가 

첫 번째 장편 영화 『제리코: 무한한 비상』은 어떤 영화인가.

나의 가족 중에 굉장히 유머러스하고 재밌는 이모할머니가 있다. 그 분은 제리코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가족들에게 그 시절 이야기를 많이 전해줬다. 이모할머니 이후에 세대는 모두 도시에서의 삶을 시작했기 때문에, 할머니 세대와 다른 방식으로 요리를 하고, 사고 방식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사라지고 있는 할머니 세대의 시간들을 알고 싶었다.

이모할머니가 병상에 누웠을 때부터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녹화하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땐 마치 이제 나의 가족의 한 페이지가 막을 내린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당시 프랑스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프랑스 유명 영화감독들이 만든 기억으로 어느 시대를 저장하고 또 보존하는 작품들에서 영감을 받게됐다. 현실을 담고 있는 영화들을 많이 접하면서, ‘나도 우리 동네를 담을 수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 내 가족만의 이야기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이 마을 공동체 전체의 기억을 더 담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제리코: 무한한 비상』 한 시대의 추억을 담고 있는 영화가 됐고, 여성의 입으로 전해지는 그 시절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직접 영화에 참여한 출연진들이 일반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보는 장면을 찍은 필름이 있는데 영화에 대한 반응이 처음엔 담담히, 점점 웃음이 만발하고, 눈물을 훔치다가, 마지막엔 웃음으로 표정과 감정의 변화가 이어진다. 다양한 세대의 여성과 젊은 남성들의 반응이 대체로 비슷하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감독으로서 소회를 듣고 싶다.

처음 영화를 찍으면서 의도한 것은 각기 다른 여성들의 색깔을 보여주면서 세계가 다채로운 색상으로 채워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다양한 색을 지닌 인물을 찾다 보니, 35명의 여성을 만났고, 만나서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살도 정말 많이 쪘다. (웃음) 최종적으로는 여성들과의 대화를 담은 총 90시간의 녹화분량이 나왔고, 편집과정에서 무지개처럼 아주 다채로운 색을 표현할 수 있는 인물들을 찾았다. 이 색들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감정을 뜻한다. 편집을 반복하면서 여성들이 어려운 고통 속에서도 유머를 찾고, 연약하지만 강인한 모습도 보여주고, 두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보여주는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양 극단의 감정 속에서 중간점을 찾아내 살아가는 그 모습이 인상 깊었다. 이를 영화 속에 담고 싶었고, 관객들이 이 지점에서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면 칠리타라는 여성분은 카드놀이를 하시면서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전하고, 셀레나라는 분은 아들을 잃은 슬픔을 말하면서 동시에 다른 자식들이 현재까지 잘 성장해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를 전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어려움 속에서도 즐거운 삶의 순간들을 찾아가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계속 고통 속에만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늘 즐거운 것도 아니고, 늘 어려움 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삶 속에서 계속 기쁨과 행복을 찾아가는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제리코 무한한 비상』 장면, 도리안이 친구와 지난 연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제리코 무한한 비상』 장면, 도리안이 친구와 지난 연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사진=카탈리나 메사 제공)

영화 포스터가 굉장히 인상적이다. 아름다운 무지개 색깔이 모두 담겨 있는 것 같은데, 각각의 색깔이 상징하는 감정이 있다면?

포스터는 제리코 마을 집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하게 됐다. 콜롬비아가 굉장히 색채가 다양한 나라이기도 하고, 제리코 마을 또한 화려한 색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몬드리안의 작품과도 같은 인상을 받아서, 그것을 토대로 제작한 포스터다. 무지개 빛깔을 언급한 것은 하나의 예시였고, 어떤 감정에 색을 딱 지정한 것은 아니었다.

포스터에서 ‘창문’에 대해서 좀 더 언급을 해보고 싶다. 영화에서 ‘창문’은 중요한 소재다. ‘창문’은 다른 시대로 넘어가는 ‘문’과 같은 역할을 해줬다. 영화를 보면, 창문 너머로 보이는 집의 공간이 굉장히 종교적인 색채가 강해서 범접할 수 없는 느낌을 주는 곳이 있다. 그런데 창문을 넘어서서 그 집으로 들어서면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다른 시대로 여행을 간 것처럼 새로운 이야기를 맞이하는 것이다.

작품은 프랑스와 스페인 등을 비롯 전 세계에서 7개 어워드에서 수상을 했고, 40개의 축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이렇게 관심을 많이 받게 된 배경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콜롬비아 사람들조차 볼 수 없었던 콜롬비아의 숨겨진 면모를 보여줬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 영화가 특히 반응이 좋았던 때는, 해외에 거주하는 콜롬비아 국민이 이 영화를 봤을 때다. 왜냐하면, 해외에 있는 콜롬비아 국민은 항상 콜롬비아의 어떤 아프고 폭력적이고 슬픈 이야기들을 많이 듣기 때문이다. 영화를 다 본 후 해외에 있는 콜롬비아 국민들은 감동에 북받쳐서 질문을 하지 못할 때도 많았다. 영화 속 여성들이 자신의 어머니와 할머니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게는 관객들이 그렇게 감동이 벅차서 뭔가 말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있는 그 고요한 시간이 되레 선물과도 같았다. 그 분들이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느꼈는지 나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를 불문하고 공감되는 어떤 여성의 정신이 이 영화 속에 담겨 있기에 많은 관심을 받은 것 같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이야기가 ‘사랑 이야기’다. 그런 러브스토리는 국가를 불문하고 모두가 사랑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여성’을 주제로 한 영화들은 많다. 『제리코: 무한한 비상』만의 차별점이 있다면.

이 영화 여성주의 영화는 아니다. 여성의 인권을 얘기하거나, 여성을 보호할 의도를 가진 영화가 아니다. 『제리코: 무한한 비상』은 나를 키우고, 성장시킨 여성들의 정신과 사랑을 담고 있다. 마치 아름다운 사랑 노래 같은 그들의 영혼, 내면을 담고 싶었다.

『제리코: 무한한 비상』에서 여성성이 느껴지고, 다른 영화들과 다르게 느껴진다면, 그건 영화 속에서 이야기를 전해주시는 여성 인물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미 충분히 완벽한 인물들이었고, 삶을 살아가는 강력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이미 한 여성으로 한 생애를 살아온 존재들이기에, 그 점이 전해졌다고 본다.

▲질문을 듣고 있는 카탈리나 메사 감독 ⓒ김지수 사진가

서울 자하미술관, 부산 영화의전당 두 곳에서 행사를 하게 됐는데, 두 곳 모두 미술계와 영화계에서 입지를 가지고 있는 유력한 기관이다. 사뭇 성격이 다른 두 기관에서 하는 게 특색있다. 어떻게 이런 행사를 기획했는가.

두 곳의 장소를 선택하게 된 데에는 이명호 사진가와 안주은 매니저의 역할이 컸다. 서울 자하미술관은 이 사진가가 소개해줬고, 부산 영화의전당은 안주은 매니저가 추천한 장소였다. 부산에 갔을 때 안 매니저는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소극적이어서, 질문이 나오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런데 상영회가 끝나고 2시간 동안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한국에 오기 전, 한국 관객이 내 작품을 어떻게 생각할지 정말 많은 기대를 하고 왔다. 이번 한국에서의 상영회는 나에게 굉장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타국의 기관들을 알게 되고, 네트워크도 만들 수 있었다. 한국 산업이나 문화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 기회였다.

현대무용과 발레로 예술과 정신 표현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했는데, 미국 보스톤에서 경영학과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다. 이후 프랑스에서 공연예술사와 문학 석사 취득 등, 시 창작, 사진, 비디오 등 다양한 영역의 공부를 하고 현재는 영화를 제작하고 있는데, 영화의 어떤 면에 이끌렸는가.

나는 콜롬비아에 메데진이라는 도시에서 유년을 보냈다. 메데진은 한국의 부산처럼 상업적으로 굉장히 발전한 도시다. 나는 어릴 적부터 예술 분야에 관심이 있었지만, 가족들 대부분이 상업 활동을 하고 있었다. 부모님의 압박은 전혀 없었지만, 부모님이 하고 있는 비즈니스에 나도 언젠가 종사를 해야 한다고 느꼈다.

어렸을 적의 나는 친구들과 춤을 추고 노는 놀이를 즐겨 하는 아이였다. 그런 성격이 뉴욕에서 제작자로 활동하면서 발현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당시엔 제작자였지만, 창작 활동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모임에서 문화예술계에서 활동하는 분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게 나의 전환점이었다.

문화예술인과 그 업계에 종사하는 이들을 만나면서, ‘과연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실 이 시기가 내 인생에 있어서 정말 힘들고, 고된 시기였다. 마치 죽음에 가까워진 것 같이 절박함을 느꼈고, 그 과정에서 찾게 된 나의 길은 내가 살아왔던 세상을 송두리째 바꾸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었다. 그것이 나에게 완전한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고 느꼈다. 2002년에 나는 바로 프랑스로 갔고, 그곳에서 내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거침없이 다 했다. 문학, 사진 등,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배웠다. 일을 병행하면서 학업을 이어가야했기에 고단하기도 했지만 정말 기쁜 순간이었다. 프랑스로 이주하고 첫 2년은 정말 어려운 시기였다. 언어에서도 어려움을 느꼈고, 장기적인 미래를 계획하거나 상상할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그 때도 나는 일상 속 자그마한 소재들에서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고 그것에서 힘을 얻었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문학과 사진이라는 장르가 하나로 융화되면서 나를 ‘영화’의 길로 이끌었다. ‘영화’를 시작하게 된 때는, 내가 지금까지 조금씩 짜왔던 길들이 하나로 뭉쳐진 때였다.

▲『제리코 무한한 비상』 속 마을 전경
▲『제리코 무한한 비상』 속 마을 전경 (사진=카탈리나 메사 제공)

제작자로서도 2008년에 파리에서 Miravus를 설립했고, 그곳에서 다양한 브랜드, 아티스트 및 기관과 트랜스미디어 프로젝트 등을 수행했다. 현재도 진행 중인지?

제작사를 설립하고 5년은 ‘내가 이 일로 살아갈 수 있을지’ 검증해보는 시간이었다. 5년 동안 모든 일을 다해봤다. 장식, 음악, 패션 등 섭렵할 수 있는 분야는 모두 하다보니 다양한 작업을 남길 수 있었고, 각 분야마다 특징적인 기술도 배울 수 있었다. 이후 프랑스 시민증을 얻고, 프랑스에서 확실하게 거주하게 될 수 있었을 때 나는 좀 더 본격적인 프로젝트들을 시작했다. 그게 바로 장편 영화 <제리코> 촬영이었다. 현재도 다양한 방면으로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올해는 두 번째 장편 영화를 준비 중인데, 나와 함께 시나리오를 만들어줄 작가들을 찾고 있다.

인도, 일본, 네팔과 부탄 등 첫 동양을 여행한 후 그 결과물로 첫 번째 시와 사진을 담은 책인 『엘릭시르 델 드래곤』을 펴냈다. 제목이 독특하기도 하다. 책 소개를 듣고 싶다.

나는 항상 아시아 지역을 여행하고 싶었다. 어디를 갈지 명확하게 정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꿈을 꿨다. 꿈에서 나는 높은 산을 오르고 있었고, 그 곳에서 말 한마리가 뛰어다니는 것을 봤다. 나는 산을 계속 올랐고, 그러다가 말을 다시 마주치게 됐는데, 그 순간 말이 하얀색 용으로 변하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용의 이마 맡으로 손을 가져다 댔고, 그 때 내 손에는 잿가루 같은 것이 떨어졌다. 이상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 꿈을 꾸고 나서 보름 정도 후에 집 근처 책방을 방문해서 아시아 구역의 서적을 보고 있던 때였다. 그때 내 시야에 『부탄, 용의 왕국』이라는 책이 들어왔다. 곧장 책을 집어들어 읽어봤고, 그렇게 부탄 여행을 결정했다. 부탄은 불교 색채가 뚜렷한 국가였다. 집집마다 불교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내 여행을 안내해 준 가이드는 젊은 사람이었는데, 부탄의 문화를 잘 알려주고 싶다며 라마가 있는 수도원으로 날 데려갔다.

나는 라마를 만나 내 꿈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자 라마는 그 꿈은 아주 간단하다고 말했다. 말은 이곳으로 오기 위한 이동수단을 뜻하고 있었고, 용은 라마들이 입고 있는 붉은색 승복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리고 라마는 서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내게 건넸는데 그 안에는 내가 꿈에서 봤던 재와 같은 검은 찻잎이 들어있었다. 라마는 그 찻잎이 용의 재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주위에 누가 아프다면 이 차를 마시고 안정을 취하면 된다고 했다. 굉장히 신기한 경험이었다.

책 『엘릭시르 델 드래곤』에서 ‘엘렉시르’는 ‘선물’이라는 뜻이다. 삶에 있어서 외부적 요인뿐 만 아니라, 정신도 중요하다고 느낀다. 『엘릭시르 델 드래곤』은 내가 아시아를 여행하면서 느낀 감정들을 토대로 우리 내면의 여행을 이야기 하는 책이다.

▲『제리코 무한한 비상』 장면, 동네를 산책하는 파비올라
▲『제리코 무한한 비상』 장면, 동네를 산책하는 파비올라  (사진=카탈리나 메사 제공)

한국에 관한 책도 펴낼 의향이 있는가?(웃음)

용의 꿈을 꾼 이후, 나는 계속 아시아 지역을 방문했고, 그럴 때마다 내 꿈의 과정들이 똑같이 구현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의 내면은 아시아에 왔을 때 더욱 충만해지는 느낌이다. 그건 한국에서도 동일 한 것 같다. 한국에서의 여행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이다. 한 번 발상을 해 보겠다.

예술가이면서, 생태활동가이다.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됐고, 어떤 활동을 했는가.

생태활동가는 내가 선택해서 시작한 일이 아니다. 운명처럼 내게 찾아온 일 같다. 영화 <제리코>가 개봉하고 2년이 지나서, 제리코 주민들이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한 다국적 광산 기업이 제리코를 광산지역으로 바꾸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논쟁과 분쟁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활동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제리코 지역 주민을 모두를 알고 있었고, 그들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일에 경험도 없었고, 어떻게 도와줄지 정말 막막했다.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공부였다. 광산이 어떤 산업이고, 제리코가 어떤 지역인지 공부하기 시작했다. 제리코 지역에는 1200여 종의 새들이 살고 있고, 열대 안데스 산맥과 초코 텀블스 막달레나의 경우 아마존과 맞닿아 있는 지역으로, 동물 종의 축제 현장과도 같은 곳이다. 그곳을 지켜내야 했다. 이 과정 속에서 나는 영화 속에 내가 담고자 했던 ‘여성성’이 지구로 확장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진정한 여성성이란, 바로 이 땅과 자연에서 오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인간의 엄마로서가 아니라 모든 종을 다 품는 그런 어머니로서, 이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들었다.

이후에 나는 이 광산 산업과 관련된 주요 기관, 기업을 초청했고, 지역 보호를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법적인 보호, 사회적인 보호 체계를 갖췄다. 그리고 1년 후, 지역을 보호만 하고 재생산 하지 않는다면 장기적으로는 지역이 망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착취를 막는 것만이 아니라 재생산할 수 있는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느꼈다. 마치 현실에서 영화가 재생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제리코에서 또 다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지역 안에서 재생산만으로도 많은 걸 이루어낼 수 있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4년간의 노력 끝에 콜롬비아 정부 환경부에서, 제리코의 광산 사업을 일단 중단하겠다는 결정을 얻어냈다.

광산 산업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성과를 얻긴 했지만, 사실 에너지 전환 부분에서 결과적으로는 광산 산업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는 것은 인정하는 바다. 산업의 발달, 에너지 전환에 있어서 광산 산업은 필요하고, 그것을 부인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콜롬비아 전 지역의 사람이 모여서, 이 광산 산업을 어떻게 추진하고 어떻게 에너지 전환을 이룰지 토의해보자는 것이다. 단순히 민간기업 손에 맡겨, 무분별하게 모든 자연을 파괴하지 말고 우리 모두가 머리를 맞대 가장 똑똑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한국 이명호 사진가와 협력을 준비하고 있다. 어떤 프로젝트인가.

이명호 작가가 나를 한국으로 초청해준 것처럼, 나도 이 작가를 콜롬비아로 초청해 작업을 도울 예정이다. 인물 사진 및 풍경 등의 작업 등을 진행할 예정인데, 이 작가에게 콜롬비아가 어떤 변화를 이끌어 낼 지 궁금하다. 이 작가의 작품도 자연이나 나무를 소재로 한 것이 많고, 그 소재들이 가진 미학을 쫓는 경우가 많다. 나와 이 작가는 작품의 형태는 다르지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방식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느낀다. 또한, 일상이나 세계 어디서든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는 것도 비슷한 점이라고 느낀다. 이런 교류들이 서로에게 굉장히 많은 것을 창조할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에게 ‘영화’란?

‘영화’라는 것은 감정의 파고를 서핑하는 느낌이다. 인생이라는 모험이 더 모험스러워지는 느낌이다. 영화를 시작하는 과정에서 내가 무엇을 믿기 시작하고, 의지를 가지고 도전하면 주변에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고 반응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 같은 흐름에 내가 올라타지 못했다면, 내가 영화를 시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도 마치 파도를 타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영화를 찍기 위해서는 제작자도 필요하고 편집, 음향, 조명 담당도 필요하고 이것을 맡아줄 사람들도 찾아야 한다. 이 과정들이 파도를 타고 안무를 짜는 느낌과 같다.

내게 영화는 어떤 정신적인 경험과도 같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실현해내고, 큰 그림을 그려서 모든 것의 조화를 찾아가는 과정은 정말 마법 같은 일이고, 내게 큰 기쁨을 준다. 나는 이 영화 속의 마법이 어느 지점에선 현실 세상 속으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아주 큰 믿음이 필요한 행위다. 난 스스로에게 매일 묻고 있다. ‘나는 이걸 하고 싶은데, 너는 어떤 생각이니’라고 말이다. 그 시간이 날 영화로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