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월대 조사 과정서, 조선 전기 유구 발견
광화문 월대 조사 과정서, 조선 전기 유구 발견
  • 이지완 기자
  • 승인 2023.06.02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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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년간 이전 조선 문화층 확인
조선왕조실록 기록의 물적 증거 찾아

[서울문화투데이 이지완 기자] 광화문 월대의 복원·정비를 위해 실시한 추가 발굴조사 과정에서 고종년간보다 앞선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유구의 흔적을 일부 확인했다.

▲광화문 월대 유구현황 (사진=문화재청 제공)
▲광화문 월대 유구현황 (사진=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소장 김지연)는 지난달 언론공개회 이후 추가 실시된 발굴 조사에서 고종년간에 축조된 광화문 월대 하부에서 그 이전의 유구 흔적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지난 4월 광화문 월대의 규모와 기초시설, 전체 모습 등 그간 조사가 완료된 성과를 한 차례 공개한 바 있다.

추가로 발굴한 월대 하부층에 대한 조사 성과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조선시대 전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광화문 앞 공간의 퇴적양상과 활용양상을 확인했다는 점이며 두 번째는, 고종년간에 월대가 축조되기 이전에도 광화문 앞 공간이 활용됐다는 사실을 물적 증거로도 확인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는 “광화문 밖 장전(帳殿)에 납시어 친히 무과 시험을 보였다(세종실록 97권, 1442년)”, “광화문(光化門) 밖에 채붕(綵棚)을 맺고 잡희(雜戲)를 베풀게 하였다(세종실록 127권, 1450년)” 등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조사를 통해 광화문 밖 공간의 퇴적양상은 자연층에서 ▲조선전기 문화층(14~16세기)과 조선중·후기 문화층(17세기 이후) ▲월대 조성층(19세기) ▲근현대도로층(20세기)의 순으로 형성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종년간 월대 어도지와 조선 전기 유구
▲고종년간 월대 어도지와 조선 전기 유구 (사진=문화재청 제공)

‘조선전기 문화층’은 앞선 2007년 광화문 발굴조사에서도 확인된 층으로, 이번에 발굴한 유구는 고종년간 월대의 어도지 서쪽 기초시설 하부 약 120㎝ 지점에 위치한 조선전기 문화층의 최상단에서 확인됐다. 방형(사각형) 석재 1매(76×56×25cm)를 중심으로 양쪽에 남북방향의 석렬이 각각 한 줄씩 배열된 양상이며, 방형 석재의 중앙에는 직경 6cm의 철제 고정쇠가 박혀 있었다. 이러한 형태는 궁중 행사에서 햇빛을 가리기 위해 사용되는 차일을 고정하기 위한 장치와 유사하며, 경복궁 근정전이나 종묘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양쪽 석렬(돌로 열을 지어 만든 시설)의 잔존너비는 약 85cm로, 길이 20~30cm의 크고 작은 석재가 일정한 너비를 이루며 남북방향으로 길게 이어지는 형태다. 이러한 석렬유구가 동쪽 어도지 하층 탐색구덩이 조사에서도 일부 확인되는 점으로 보아, 고종년간 월대의 어도지 하층에 전체적으로 유사한 양상의 조선 전기 유구가 분포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 중기~후기 유구’는 조선전기 문화층을 일부 파괴하고 조성된 층에서 확인됐다. 교란과 파괴가 심하며, 민가의 흔적 등도 확인돼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방치됐던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이후 고종대에 이 층을 정리하고 다시 흙을 쌓아서 월대를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고종년간 월대 서편어도지 하층 조선 중기~후기층 유구
▲고종년간 월대 서편어도지 하층 조선 중기~후기층 유구 (사진=문화재청 제공)

이러한 결과로 볼 때 광화문 앞 공간에서는 고종년 간 월대와 같은 형식의 건축물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조선 전기부터 바닥에 돌을 깔아 축조하는 방식의 시설들을 갖추고 다양하게 활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의 기능이 상실되며 방치된 채 관리되지 못하다가 고종년간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월대가 설치됐음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은 “향후 발굴조사 자료를 정밀하게 분석해 경복궁 광화문과 월대 공간과의 연관성, 활용성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진행하고, 이를 통해 국민들이 우리의 역사문화 공간을 바로 알고, 충분히 향유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