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비평]서울오페라앙상블 '돈 조반니', 현대적 해석과 연출 성공
[이채훈의 클래식 비평]서울오페라앙상블 '돈 조반니', 현대적 해석과 연출 성공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3.06.04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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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를리나 임수연과 레포렐로 양석진, 이종은 노래와 연기 돋보여
스피디한 진행 위해 일부 음악 삭제, 원작 훼손 우려 남겨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독일작가 E.T.A. 호프만이 ‘오페라 중의 오페라’로 예찬한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가 예술의전당에서 다시 빛났다. 6월 3일, 서울오페라앙상블(예술감독 장수동)의 <돈조반니>는 음악과 연출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2년 전 구로아트밸리 공연과 크게 다르지 않은 프로덕션이었지만 오케스트라를 확대하고 새 주인공을 캐스팅하고 더 큰 무대에 걸맞게 디자인과 안무를 확대하여 청중들을 만족시켰다.

중세 세비야가 아니라 K라는 21세기 항구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연출하여 생동감을 높였다. 세계적 오페라 연출가 피터 셀라스는 “현대적 연출은 요즘 청중들에게 음악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점에서 장수동 감독의 연출은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내면서 모차르트의 음악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목적을 훌륭히 달성했다.

돈 조반니는 가상화폐와 마약밀매로 떼돈을 번 신흥 권력자로, 기사장은 부두의 치안을 책임지는 경비대장으로 설정했다. 원작의 커피와 초콜렛 대신 대마초와 하얀 가루, 금화 대신 비트코인으로 했다. 레치타티보 세코를 우리말로 처리하고 현대 한국의 정서에 맞게 자막을 공들여 제작한 것도 효과적이었다. “도움 필요하면 카톡해”, “라면 먹으며 넷플릭스 보자”, “서울이면 미투감이야” 등 요즘 세태에 맞게 새로 쓴 자막이 재미있었다. 자칫 소극처럼 가볍게 흐를 위험이 있었지만, 음악이 훌륭했기 때문에 관객들은 이 모든 연출을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1막 첫 장면에서 레포렐로가 객석에서 등장하고, 경비대장을 죽인 돈 조반니가 레포렐로의 오토바이를 탄 채 퇴장하고, 피날레 직전 가면 쓴 세 사람이 객석 앞에서 노래한 것은 재미있는 설정이었다. 2막 돈나 안나와 돈 오타비오가 공동묘지에 나타난 것은 의외였는데, 두 사람이 경비대장에게 꽃을 바치자 설득력 있는 연출임이 드러났다. 2막 돈나 엘비라가 돈 조반니에 대한 연민을 토로하는 숭고한 아리아를 부른 뒤 돈나 안나와 체를리나가 그녀를 부축해서 퇴장하도록 한 장면은 감동이었다. 상처 입은 고결한 영혼에 대한 오마주는 관객들에게 깊은 공감을 일으켰다.  

▲제14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출품작인 서울오페라앙상블의 '돈 조반니'의 한 장면.(사진=서울오페라앙상블)
▲제14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출품작인 서울오페라앙상블의 '돈 조반니'의 한 장면.(사진=서울오페라앙상블)

돈 조반니의 우경식, 레포렐로의 양석진(이상 바리톤), 돈나 안나의 손주연, 돈나 엘비라의 이종은, 체를리나의 임수연(이상 소프라노), 돈 오타비오의 조철희(테너), 경비대장의 심기복(베이스) 등 모든 출연자들은 훌륭히 제 몫을 해냈다. 주인공 돈 조반니는 화려한 아리아가 없는 대신 상황마다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며 앙상블을 주도해 나간다. 우경식은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에너지로 이러한 돈 조반니의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 냈다. 조철희는 돈 오타비오의 두 아리아(Dalla sua pace, Il mio tesoro in tanto)로 돈나 안나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잘 표현했다. 좀 더 파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관객들은 그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돈나 엘비라의 2막 아리아 ‘은혜를 모르는 그 사람은 나를 속였지만’(Mi tradi quel’alma ingrata), 돈나 안나의 2막 아리아 ‘잔인하다고 말하지 마세요’(Crudele, non mi dir)는 매우 어려운 곡인데, 두 소프라노는 설득력 있는 노래로 큰 갈채를 받았다. 모차르트가 표현하고자 한 숭고함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청중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제14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출품작인 서울오페라앙상블의 '돈 조반니'의 한 장면.(사진=서울오페라앙상블)
▲제14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출품작인 서울오페라앙상블의 '돈 조반니'의 한 장면.(사진=서울오페라앙상블)

이날 출연자 가운데 레포렐로의 양석진(바리톤)과 체를리나의 임수연(소프라노)의 활약이 가장 돋보였다. “로마에 640명, 베를린에 231명, 파리에 100명, 이스탄불에 91명, 그리고 세비야에 무려 1,003명…” 양석진은 돈 조반니가 유혹한 여성들을 열거하는 1막 아리아를 완벽하게 불러서 공연 성공의 신호탄을 쏘았다. 임수연은 질투하는 마제토의 마음을 살살 녹여주는 1막 아리아 ‘저를 때려 주세요’(Batto batti o bel Masetto)와 부상당한 마제토를 위로해 주는 2막 아리아 ‘그대는 알게 되실 거에요’(Vedrai carino)를 달콤하게 불러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체를리나의 아리아 두 곡은 첼로 솔로와 어우러지는 대목이 특히 아름다웠다. 2막 피날레, 경비대장(원작은 기사장)의 심판 장면은 서로 다른 음색의 바리톤 두 명과 베이스 한 명이 오케스트라의 포효와 섞이면서 청중들을 압도했다. 

▲제14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출품작인 서울오페라앙상블의 '돈 조반니'의 한 장면.(사진=서울오페라앙상블)
▲제14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출품작인 서울오페라앙상블의 '돈 조반니'의 한 장면.(사진=서울오페라앙상블)

우나이 우레초가 이끄는 프라임 필하모닉은 섬세한 템포와 다이내믹으로 무대 위의 성악가들과 안정된 조화를 이루었다. 목관 앙상블은 아리아 독창과 시종일관 아름답게 어우러졌고 – 특히 2막 돈나 엘비라 아리아 - 경비대장이 등장할 때 트럼본이 가세한 대목은 초자연적인 사운드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관악 파트에 비해 바이올린 파트의 음량이 조금 부족한 느낌이었지만 전체적으로 훌륭한 호흡을 들려주었다.  

▲제14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출품작인 서울오페라앙상블의 '돈 조반니'의 한 장면.(사진=서울오페라앙상블)
▲제14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출품작인 서울오페라앙상블의 '돈 조반니'의 한 장면.(사진=서울오페라앙상블)

오페라를 요즘 관객 취향에 맞도록 간결하게 만들기 위해 레치타티보 세코를 일부 삭제한 것은 좋았다. 그러나 일부 음악을 삭제한 것은 좀 더 세밀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2막 피날레의 두 대목 – 경비대장이 문을 두드리자 돈 조반니가 직접 문을 열어주는 장면, 돈 조반니가 불구덩이에 떨어지고 다른 출연자들이 등장하는 장면 – 을 삭제한 것은 사우나라는 장소와 상황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돈 조반니의 1막 아리아 ‘포도주는 넘쳐흐르고’(Fin ch’han dal vino)를 생략한 것은 오페라 매니아들에겐 다소 아쉬울 수 있었다. 주인공 돈 조반니는 짧은 아리아 두 곡밖에 없는데, 그 중 하나를 통째로 삭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음악과 드라마의 흐름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니 이 또한 큰 문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제14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출품작인 서울오페라앙상블의 '돈 조반니'의 커튼콜 장면.(사진=서울오페라앙상블)
▲제14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출품작인 서울오페라앙상블의 '돈 조반니'의 커튼콜 장면.(사진=서울오페라앙상블)

돈나 안나의 1막 아리아 ‘제 명예를 더럽힌 자에게 복수를’(Or sai chi l'onore) 직전의 레치타티보 아콤파냐토를 대폭 삭제한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돈나 안나가 돈 오타비오에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대목인데, 이걸 생략하니 조바꿈이 어색해졌다. 원작의 레치타티보는 G단조, C단조, D단조의 조바꿈을 거쳐 D장조의 아리아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그런데 D단조 부분을 생략하니 조성이 C단조에서 D장조로 덜컥 바뀌어서 음악의 흐름이 부자연스러워졌다. 심각한 문제를 너무 가볍게 결정한 게 아닌가 싶다. 모차르트를 깨워서 “조금만 줄여달라”고 얘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