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산청 기산국악당에서 떠올린 기억의 파편
[성기숙의 문화읽기]산청 기산국악당에서 떠올린 기억의 파편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3.06.09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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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기산국악당은 국악계의 선각자 기산 박헌봉(朴憲鳳, 1906~1977) 선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다목적 공간이다. 2013년 기산의 고향 경남 산청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개관 당시 국악계가 깜짝 놀랐다. 인구 4만의 영남 내륙 지리산 자락에 소재한 군(郡) 단위의 작은 도시에 전문국악당이 터 잡고 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다.

며칠 전 산청에 갔다가 우연히 기산국악당에 들렀다.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상돌길 69번지. 기산국악당은 지리산 천왕봉을 주산으로 동쪽 웅석봉에서 다시 남으로 향한 능선의 끝 니구산(尼丘山) 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다. 니구산은 유가의 성현 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동성 곡부에 위치한 산이다. 기산국악당이 터 잡은 산이 공자의 탄생과 연관있는 중국의 니구산과 같은 명칭이라는 점이 공교롭다.

국악당 인근 니구산 허리를 감싸고 피어오른 뭉게구름이 눈부시다. 산자락에 피어난 하얀 뭉게구름이 마치 목화송이 같다는 착각에 휩싸인다. 순간 이곳 산청이 고려 말 원나라에서 붓뚜껑에 목화씨를 가져온 문익점의 고장임을 깨닫는다.

기산국악당이 소재한 남사예담촌 초입부터 전통마을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부슬비 내리는 정경은 시골마을 특유의 여유와 평온함으로 운치를 더한다. 남사예담촌은 전형적인 한옥마을로 정평이 나 있다. 수려한 자연경관을 배경삼아 돌담으로 꾸며진 옛 담장은 숨막히게 정겹고 아름답다. 

기산국악당 순례

남사예담촌 돌담을 지나 작은 내천을 건너자 니구산 아래 펼쳐져 있는 전통한옥이 시선을 압도한다. 기산관, 교육관, 기념관 등 세 채의 한옥건축물이 웅장한 자태를 뽐낸다. 중정의 마당은 일체의 군더더기 없이 마냥 드넓기만 하다. 야외공연장으로 쓰인다니 제격이다.

우선 기념관에 발길이 닿는다. 어딜 가든 박물관부터 찾는 오랜 습관이 작동된 것일 게다. 진열장엔 기산의 유품과 제자들이 기증한 국악자료들이 단정하게 전시되어 있다. 평생의 역작 『창악대강(唱樂大綱)』을 비롯 친필 원고와 국악예술학교 관련 문서 등이 즐비하다. 기산이 직접 사용하던 북도 눈에 들어온다. 각종 자료와 유물 하나하나에 기산의 체취가 묻어난다.

▲산청 기산국악당 전경.(사진=기산국악당 홈피 갈무리)
▲산청 기산국악당 전경.(사진=기산국악당 홈피 갈무리)

기념관을 나와 발길을 옮길 터에 사랑채 안쪽에서 분주하게 오가는 최종실 선생이 포착되었다. 사물놀이 창시자이자 소고춤의 명인 최종실은 현재 기산국악당 운영을 책임지는 주인장으로 있다. 서울과 안성 그리고 산청을 오가며 바쁜 일상을 보낸다. 니구산 자락 기산국악당에서 최종실 선생을 만난 것은 예기치 않은 행운이었다.

사랑채의 온돌방에 앉아 차담을 나누고 주인장의 안내로 기산국악당 탐방을 시작했다. 기산관으로 가는 길목에 기산 선생 추모비에 발길이 멈는다. 기산 박헌봉 선생이 작사하고 전통 음률에 밝은 향사 박귀희 선생이 작곡한 ‘국악의 노래’가 추모비에 새겨져 있다. 추모비 건립모금에 참여한 120여명의 이름이 추모비 측면에 또렷히 각인돼 있음도 인상적이다.

기산관 우측 10여평의 공간은 기산 선생의 서재로 꾸며져 있다. 고서와 각종 자료, 국악기와 문방사우 등이 정갈한 모습이다. 손때 묻은 좌식 책상과 의자, 문갑, 액자 등 고전적 향훈이 가득하다. 어디선가 기산 선생이 불쑥 나타나 옛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기산국악당은 쓰임새가 다양하고 활용도 또한 높은 편이다. 기산관 대청마루와 넓은 계단은 행사가 있은 날엔 공연장으로 사용된다. 기산국악제전 등 큰 행사도 거뜬히 치룰 만큼 앞마당이 드넓다. 기념관과 마주하는 위치에 세워진 교육관의 쓰임새는 더욱 다양하다.

교육관은 국악교육이 실시되는 공간으로 국악이론과 각종 실기 강좌가 열린다. 소규모 공연이 가능할 정도로 넉넉한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교육관과 연결된 또 하나의 공간이 있으니 바로 별채이다. 별채는 교육생이나 방문자의 식당 또는 세미나, 회의 등 토론의 장으로 사용된다. 휴식공간으로도 손색이 없다.

기산관 뒤쪽 산자락에 펼쳐진 대나무숲에 지어진 소위 대밭극장은 기산국악당의 또 다른 자랑이다. 대밭극장 터에서 발견된 나무로 표지목을 세우고 25평 규모의 극장을 만들었다. 더없이 훌륭한 자연극장이 탄생한 셈이다. 대나무숲에 조성된 이른바 대밭극장은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공간으로 이채롭다. 자연을 배경으로 국악의 선율이 울려 퍼지고 인위성을 배제한 순수 ‘날 것’의 우리 몸짓이 선보일 것을 상상하니 마냥 즐겁다.

대밭극장 위쪽으로 잘 생긴 소나무 몇 그루가 서 있다. 이름하여 기념송이다. 기산 박헌봉을 비롯 민속악무 발전에 헌신한 국악명인들의 호를 소나무에 네이밍했다. 기산송(岐山松), 향사송(香史松), 벽사송(辟史松), 만정송(晩汀松) 등 네 그루의 소나무가 탐방객을 맞는다.

순간 ‘송죽같은 절개’라는 말이 연상된다. 알다시피, 대나무와 소나무는 지조와 절개를 상징한다. 기념송에는 기산의 국악정신을 지조와 절개로 지켜가자는 염원이 깃들어 있다. 그랬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기산과 그의 제자들은 특유의 굳셈과 강건한 기상으로 민족 고유의 전통가무악을 보존하고 계승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기산 박헌봉을 정점으로 그 제자인 여류명창 향사 박귀희와 만정 김소희 그리고 춤꾼인 벽사 한영숙 등이 사재를 털어 국악예술학교 설립에 힘을 보탰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충청도 내포 출신 근대 전통가무악의 거장 한성준(韓成俊, 1874~1941)의 손녀딸 명무 한영숙의 호를 따 벽사송이라 이름 붙여 그 정신을 잇고 있다니 새삼 감동에 젖는다. 

기산 박헌봉의 업적

기산 박헌봉은 1906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서 밀양박씨 규정공파 23세손으로 출생했다. 유가의 가풍을 중시한 엄격한 분위기에서 자랐다. 유년시절 서당에서 전통방식으로 사서삼경 등 한학을 익혔다. 심신에 체화된 유가의 법도와 한학은 훗날 국악이론가로 발돋움하는데 귀한 자양분이 되었다.

16세 때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했다. 이후 한성강습소를 거쳐 중동중학교와 휘문보고에서 신학문을 접했다. 1930년대 초반 진주음률연구회를 조직하여 민속풍류를 연구하다가 다시 상경한다. 이후 정악전습소, 이왕직아악부를 거치면서 정악과 아악을 심층 탐구한다. 또 조선성악연구회, 조선가무연구회 등에 참여하면서 배움의 깊이를 더하고 활동의 지평을 넓힌다.

▲기산  박헌봉 선생.(사진=기산국악당 홈피 갈무리)
▲기산 박헌봉 선생.(사진=기산국악당 홈피 갈무리)

해방직후 국악건설본부를 창설하여 국악의 부흥과 계몽운동에 앞장선다. 기산의 국악부흥운동은 1960년 민속악 중심의 교육기관인 국악예술학교 설립으로 결실을 맺는다. 이후 국립극장 운영위원, 문화재위원,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일평생 국악이론가 및 국악교육자로서 우리나라 국악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정리하자면, 박헌봉의 업적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첫째, 국악교육자로서의 업적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국악교육의 필요성을 깨달은 기산은 1950년대 후반 국악예술학교 설립 계획을 세운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의 지원은 미온적일 수밖에 없었다. 국악예술학교 설립 당시 삼성그룹 창립자 이병철 회장이 2억원이 넘은 거액을 후원했음은 지금도 훈훈한 미담으로 전해진다.

1960년 3월 5일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국악교육기관 국악예술학교가 설립되었다. 기산이 초대 교장을 맡았고, 민속악을 정식 교과과정으로 편성했다. 민속악 중심의 국악예술학교의 설립은 정악 중심의 국악사양성소(현 국립국악고등학교)와 대립구도를 예고한다.

국악예술학교는 관훈동에 둥지를 튼 이후 남산, 운니동, 석관동을 거쳐 1992년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 안착했다. 학교명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를 거쳐 2008년 교육부 정식 인가를 받아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른다. 국악교육에 헌신한 기산의 업적은 이후 학교가 배출한 민속악 분야의 기라성 같은 국악명인들이 웅변한다.

둘째, 국악이론가로서의 업적이다. 기산은 국악교육에 필요한 교재를 비롯 국악이론서를 꾸준히 편찬했다. 교재로는 『거문고교본』, 『가야금교본』, 『정가교본』, 『민요교본』 등이 있다. 『국악대관』, 『국악사』는 말년에 혼신을 다한 저서이지만 원고가 유실되어 아쉽게도 실제 출간되지는 못했다.

기산의 국악이론 업적은 그가 저술한 『창악대강(唱樂大綱)』에 집약되어 있다. 『창악대강』은 창악이론과 판소리, 단가, 창극을 다룬 문헌으로 기산국악학의 이론적 토대를 튼실하게 살찌웠다. 창악(唱樂)을 겨레의 민속음악으로 정의한 기산은 판소리를 비롯 무속과 잡희를 민족음악의 뿌리로 인식하여 보다 다층적 관점에서 전통시대 국악의 실체를 논증의 대상으로 삼았다. 『창악대강』이 국악학 연구를 예비하는 학자들에게 필독서로 추천되는 이유다.

셋째, 문화재위원으로서의 업적 또한 빼놓을 수 없다. 1964년 문화재위원으로 위촉된 기산은 민속예능 발굴 및 조사연구를 통해 무형문화재 지정에 기여했다. 기산이 참여한 민속예능조사는 판소리 춘향가·심청가를 비롯, 농악12차(진주농악), 꼭두각시놀음, 고성고광대, 진주검무, 호남농악, 가야금산조, 거문고산조, 경기민요 등 실로 다양하다. 이들 종목은 대부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국가의 보호아래 안정적 전승기반을 갖게 되었다.

민속음악학의 권위자 이보형은 국악발전에 기여한 기산의 업적 중 민속예능을 발굴하여 무형문화재로 지정한 것을 으뜸으로 꼽았다. 특히 기산이 발굴 조사한 진주농악, 진주검무, 고성오광대 등 영남지역의 민속예능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오늘로 전승되고 있음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한편, 기산은 진주개천예술제 창설에도 산파역할을 했다. 1949년 정부수립 1주년을 기해 창설된 개천예술제는 우리나라 문화예술축제의 효시로 간주된다. 초창기에는 대통령이 직접 행사에 참석할 정도로 비중이 높은 예술제였다.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이 주어진 것도 개천예술제가 최초로 기록된다.

여기서 보듯, 기산은 고향인 산청, 진주 등 영남지역 민속예능의 발굴 지정 및 전통문화의 보존 계승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 기산의 고향인 산청에서 기산국악당을 건립하여 융숭깊게 기리는 것은 그의 업적에 대한 당연한 보상 혹은 예우가 아닐까?

옛 기억의 파편

2008년 이명박 정부시절 문체부 주최로 국악발전을 위한 정책세미나가 열렸다. 세미나가 열린 양재동 서울교육문화회관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만큼 주목도가 높았다. 사립으로 운영되던 서울국악고의 국립화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뜨거운 열기 속에 개최된 세미나는 다분히 논쟁적이었다. 정악 중심의 국립국악고와 민속악 중심의 서울국악고의 대리전 양상을 띠었다. 민속악이 강세였던 서울국악고의 국립화를 반대하는 국립국악고측의 반대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당시 발제자로 참여했던 기억이 새롭다. 민속악 중심의 사립으로 운영되는 서울국악고의 국립화를 옹호하는 논조의 발제였다.

당시로서는 ‘뜨거운 감자’인 이 주제를 맡아줄 국악계 학자를 찾기가 쉽지 않자 내게 의뢰했음을 뒤늦게 알았다. 정악과 민속악이라는, 이분법으로 구조화된 국악계의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 무지함이 겁 없는 용기를 잉태했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국립국악고 출신이 압도적 비율을 차지하는 직장에서 녹록지 않은 세월을 견뎌야 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여기서 비롯된 것이 아닐지도.

해방이후 민속악의 학교교육은 두 번의 변곡점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우선은 1960년 민속악 중심의 사립으로 운영된 국악예술학교, 즉 서울국악고의 설립이다. 두 번째 변곡점은 2008년 사립 서울국악고의 국립화라할 수 있다. 민속악 중심의 사립 서울국악고가 국립화하여 공적인 제도교육 체제로 편입되면서 한국의 국악교육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놓여지게 되었다. 이로써 기산의 꿈은 비로소 성취된 것이 아닐까?

기산이 품었던 꿈의 기원 혹은 그 배경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알다시피, 기산은 태생적으로 한학자 집안의 후손으로 영남 유림의 정서 속에서 자랐다. 그는 중국의 고대 음악문헌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나오는 ‘예악불가사수거신(禮樂不可斯須去身)’이라는 문구를 접하고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예와 악은 잠시도 몸에서 떠나서는 안된다’는 의미를 되새김하면서 이른바 흥어시(興於詩) 입어예(立於禮) 성어악(成於樂)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위 구절은 『논어(論語)』 「태백(泰伯)」편에 나오는 글귀로서 ‘시(詩)에서 일어나고 예(禮)로서 중심에 서며, 마지막 악(樂)으로서 완성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기산은 이러한 경로를 통해 인격적 완성에 이른다. 이러한 배경에서 보면, 기산은 정악 우위의 가치관을 소유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기산의 삶의 여정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유가적 세계관을 지닌 기산이 정악이 아닌, 민속악 발전의 초석을 다지는데 일평생 헌신했음은 실로 아이로니컬하다. 이유가 뭘까?

일찍이 기산은 정악과 민속악의 공존과 상생의 가치를 깨달았다. 유교의 가풍 속에 전통 방식으로 한학을 익히고, 근대교육인 신학문을 체득한 기산은 진취적이며 열린 사고의 소유자였다. 국악학자로는 보기 드물게 개방적이고 융합적인 사유체계를 지닌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민속악 중심의 국악예술학교 설립은 기산의 남다른 문제의식에서 탄생한 결과의 산물로 이해된다.

기산은 일제강점을 겪으면서 민족 고유의 민속악무가 멸실되거나 왜곡 변질되는 상황을 목도했다. 자연히 민족의 혼과 얼이 함축된 민속악무의 보존 계승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1960년대 초 국악예술학교 설립 및 무형문화재 제도 초창기 우리나라는 조국근대화를 기치로 민족의 주체의식을 표방하던 시기였다. 기산은 민속예술이야말로 민족주체의식이 발현된 것이라 믿었고, 나아가 조국근대화의 바탕이 되는 것이라 여겼다. 정악의 우월성을 넘어 기층의 삶과 애환이 녹아있는 민속악을 민족예술의 정수라 인식했다.

그렇다고 기산이 정악의 가치를 낮게 보거나 폄훼한 것은 아니었다. 청록파 시인 박목월이 지적하듯이, 그는 누구의 것이랄 것도 없는 겨레의 가락을 보듬어 한평생을 산 분이었다. 그렇다. 기산은 정악과 민속악을 우열의 개념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겨레의 음악으로 이해한 것이다. 일찍이 융합과 통섭의 관점을 견지했음이 실로 놀랍다.  
 
오래된 미래, 미래의 유산
 
기산의 고향 산청군은 선생을 기리고 선양하는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2005년 기산 선생의 생가 복원을 시작으로 2007년 박헌봉 탄생 100주년을 맞아 기산국악제전을 창설했다. 2011년에 기산국악당을 건립하였고, 그해 민족음악의 보존 전승과 발전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인물을 선정 시상하는 기산박헌봉국악상을 제정했다.

필자와 기산국악당 최종실 기산국악제전위원장이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필자와 기산국악당 최종실 기산국악제전위원장이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여기서 보듯, 산청군의 기산 박헌봉 선양사업은 다양하고 활발한 편이다. 기산국악제전 외에도 전국의 국악인들이 참여하는 토요상설공연은 고품격 프로그램으로 주민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고 있다. 한편, 기산 관련 새로운 자료 발굴 및 조사연구와 기록 출판을 통한 정신문화적 가치 창출 작업도 눈여겨보게 된다.

기산국악당이 오늘날 국악의 성지로 발돋움한 것은 기적에 가깝다. 산청군의 전폭적인 관심과 지원이 있어 가능했다. 행정가의 뚝심과 현장예술가의 열정이 절묘하게 조합된 결과라 하겠다. 특히, 최종실의 역할이 컸다. 경남 삼천포 출신인 최종실은 어린 시절 부친에게 진주삼천포농악 12차의 가락과 춤사위를 익혔다. 초등학교 졸업 후 기산에게 발탁되어 국악예술학교로 진학했다.

재능이 특출났던 최종실은 국악예술학교에서 당대 최고의 전통예인을 사사하고 사물놀이의 창시자, 고소춤의 명인으로 일가를 이뤘다. 리틀엔젤스예술단, 서울시립무용단을 거쳐 서울예술단 예술감독, 중앙대학교 타악연희과 교수 등을 지냈다. 귀향하여 산청에 정착한 이후 기산국악제전위원회 이사장으로 기산국악당 운영을 책임지고 있다.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운영으로 산청을 넘어 대한민국, 나아가 세계 속의 기산국악당으로 우뚝 서는 것, 그리고 이른바 기산국악학을 발흥시켜 정립하고 그 정신을 잇는 것을 사명으로 여겨야 한다. 기산국악당을 지키고 가꾸어가는 최종실의 삶의 여정에서 기산의 궤적이 그려진다. ‘오래된 미래’를 씨앗 삼아 ‘미래의 유산’을 꿈꾸는 기산국악당의 앞날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