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비평]유니버설 발레단 '백조의 호수', 관객 매혹시켜 
[이채훈의 클래식비평]유니버설 발레단 '백조의 호수', 관객 매혹시켜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3.06.12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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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훈숙 등 선배의 노력과 후배들의 열정이 빚어낸 성공  
대한민국발레축제, 우리 발레의 높은 수준 확인시켜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제13회 대한민국발레축제, ‘발레의 대명사’로 사랑받는 <백조의 호수>를 놓칠 수 없었다.

<백조의 호수>는 유니버설 발레단에게 각별한 레퍼토리다. 1992년 마린스키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무대와 안무를 전수받아 한국에서 초연한 뒤 북미, 일본, 남아공 순회공연을 통해 세계 수준의 발레단으로 발돋움했기 때문이다.

6월 10일 낮 공연을 찾았다. 이 공연은 개인적으로도 감회가 없지 않았다. 1985년, MBC 새내기 PD 시절, 갓 창단한 유니버설 발레단의 <코펠리아>를 취재할 때 생전 처음 발레를 접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프리마 발레리나 문훈숙이 스와닐다를 맡아서 매혹적인 춤을 펼친 게 눈에 선하다. 당시 앳되다 싶을 정도로 젊었던 문훈숙 단장은 세월이 흘러 한국 발레계의 어른이 됐다. 이날 공연한 <백조의 호수>는 그가 오랜 세월 발레에 헌신하며 후배들을 키워내서 맺은 아름다운 열매라고 할 수 있다. 

막이 오르기 전 문훈숙 단장의 간략한 해설이 있었다. “<백조의 호수>는 1877년 모스크바 볼쇼이 초연 때 실패했는데, 음악이 너무 두드러져서 당시 청중이나 평론가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차이콥스키 사후인 1894년 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에서 다시 공연했을 때 비로소 위대한 발레로 인정받게 됐다, 마리우스 프티파가 궁전의 연회 장면을 레프 이바노프가 백조의 호수 장면을 안무하여 대조적인 무대를 보여준다, 프리마 발레리나가 비련의 여주인공 오데트와 악마의 딸 오딜르를 둘 다 연기하는 게 특징이자 도전이다,” 등 감상 포인트를 매우 쉽고 간결하게 설명했고, “사랑한다”, “결혼하자” 등 발레에 등장하는 마임 동작을 직접 연기하여 관객들을 기쁘게 해 주었다. 발레의 대중화를 위해 애써 온 문훈숙의 내공이 돋보이는 시간이었다. 

이어진 공연은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프리마 발레리나 박상원은 청순하고 가련한 오데트와 카리스마 넘치는 오딜르의 상반된 성격을 멋지게 연기했다. 박상원은 2막 1장 32차례 회전하는 고난도의 푸에테(Fouetté)를 거침없이 소화하여 커다란 갈채를 받았고, 지크프리트 역의 이현준과 호흡을 맞춘 1막 2장의 파드되(오데트), 2막 1장의 파드되(오딜르)로 관객들을 매혹시켰다. 지크프리트 역의 발레리노 이현준은 근사한 용모와 드라마틱한 표현력으로 관객들을 만족시켰다. 이번 축제의 네 차례 공연은 매회 다른 주인공이 출연하는데, 가장 젊은 박상원과 이현준이 이 정도 수준이라면 다른 공연도 성공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유니버설 발레단 창단 무렵 프리마 역을 소화할 수 있는 발레리나가 많지 않았고, 특히 남성 무용수가 없어서 연극인을 무대에 세울 정도였음을 생각하면 우리 발레 수준이 눈부시게 발전했음을 실감케 한 무대였다. 

솔리스트와 드미 솔리스트들의 기량도 훌륭했다. 악마 로트바르트를 맡은 이승민의 카리스마 넘치는 춤에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광대 역의 리앙 시후아이는 코믹한 연기로 부지런히 무대를 누벼서 관객들의 호감을 샀다. <백조의 호수>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는 1막 2장 네 마리 작은 백조의 춤, 2막 1장 스페인 춤은 완벽의 경지에 가까웠다. <백조의 호수> 군무(Corps de ballet)는 전체 동선부터 손동작 하나까지 다듬어야 하기 때문에 매우 어렵다고 한다. 1막 2장 백조의 군무, 2막 2장 백조와 흑조의 군무는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다. 

브로셔를 보니 리허설 때 5명의 발레 지도위원이 일했는데, 이 중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솔리스트로 활약한 유지연의 이름이 있어서 반가웠다. 2004년, 마린스키 발레의 <백조의 호수>를 페페테르부르크 현지 취재한 적이 있는데, 유지연이 등장하는 스페인 춤과 백조 군무에 매료된 게 기억난다. 손가락 동작의 뉘앙스까지 신경 쓰며 땀 흘리던 그녀의 내공이 후배 무용수들에게 전달됐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무용수들의 기량이 전반적으로 향상된 배경에는 유능한 선배 무용수들의 헌신이 있었음을 기억하는 게 좋겠다.

김광현 지휘 코리아쿱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훌륭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먼저, 김광현이 선택한 템포에 100% 공감했음을 밝히고 싶다. 오케스트라는 무대 위의 출연자들을 싣고 편안하게 운행하는 큰 배 같았다. 거침없이 뻗어나가는 금관, 생동하며 연결되는 목관, 그리고 ‘정경’ 대목의 열정적인 바이올린은 청중들의 가슴에 메아리쳤다. 페테르부르크 현지 취재 때 마린스키 오케스트라를 이끈 게르기에프와 아그레스트 등 지휘자들은 한결같이 “차이콥스키 음악을 교향악처럼 울리게 만드는 게 <백조의 호수> 지휘의 목표”라고 말한 바 있다. 김광현 지휘의 코리아쿱 오케스트라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차이콥스키의 아름다운 음악에 싱싱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데 성공했다. 차이콥스키가 이날 공연의 현장에 있었다면 크게 만족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마린스키 버전을 충실히 따른 무대 디자인은 흡족한 수준이었다. 1막 2장, 지크프리트가 백조를 처음 목격하는 대목, 1막 2장 오데트가 다시 백조로 변하는 장면은 눈물을 자아냈다. 2막 1장, 지크프리트가 로트바르트/오딜르 부녀의 음모에 속아서 결혼을 다짐할 때 안타까워하는 오데트의 모습을 스크린으로 보여준 것도 가슴 시리게 다가왔다. 

<백조의 호수> 대단원의 연출은 언제나 관심거리다. 연출자에 따라 수많은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19세기에는 오데트와 지크프리트가 죽는 비극적인 결말이었지만 소련 공산당 시절에는 오데트와 지크프리트가 살아서 결합하는 해피엔딩으로 굳어졌다. 지크프리트가 먼저 죽고 오데트가 그를 깨우려고 안타깝게 날개짓하는 연출도 있고, 로트바르트와 싸우던 지크프리트가 실수로 오데트를 때려서 죽게 만드는 연출도 있다. 심지어, 오데트와 지크프리트가 다 죽고 악마 로트바르트 혼자 의기양양해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오데트가 백조로 변하고 지크프리트가 그녀를 따라 물에 뛰어드는 연출이 가장 울림이 컸다.

이번 공연은 지크프리트가 악마 로트바르트와 대결하여 결국 이기지만, 오데트가 불타는 성 안에서 이미 죽었음을 깨달은 지크프리트가 따라 죽는 것으로 했다. 무난한 연출이었고, 더 많은 상상의 여지를 남겼다. <백조의 호수>는 이러한 상상의 여백을 제공하기 때문에 진정한 고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