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리뷰] 권진규가 머무를 ‘영원한 집’, SeMA 상설전 《권진규의 영원한 집》
[전시 리뷰] 권진규가 머무를 ‘영원한 집’, SeMA 상설전 《권진규의 영원한 집》
  • 이지완 기자
  • 승인 2023.06.16 17: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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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 1층 전시실서 상설 전시
SeMA “2년마다 새로운 상설전 개최할 것”
권진규 아틀리에서 모티프 얻은 전시 공간

[서울문화투데이 이지완 기자] 대상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그 대상이 가진 본질과 영원성을 표현한 권진규가 머무를 ‘영원한 집’이 마련됐다. 지난해 권진규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권진규의 작품관을 대대적으로 조망하는 전시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노실의 천사》를 선보인 서울시립미술관이 지난 6월 1일부터 권진규 작가의 상설 전시를 시작했다.

▲《권진규의 영원한 집》 전시 전경 (사진=SeMA 제공)

서울시립미술관(관장 최은주)은 지난 1일부터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권진규 상설전 《권진규의 영원한 집》을 선보인다. 본 상설전은 2021년 (사)권진규기념사업회와 유족의 작품 기증(총 141점)에 따른 상설전시장 조성 약속을 이행하고, 2023년 권진규 작고 50주기를 맞아 마련된 전시다. 《권진규의 영원한 집》이라는 전시 제목에는 작품을 통해 구현하고자 한 ‘영원성’과 ‘영원히 계속되는 전시장’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여정을 마치고 안식을 찾은 권진규

작가 권진규가 머무를 수 있는 ‘영원한 집’과 같은 상설전시장은 여러 우여곡절 끝에 완성될 수 있어서, 더 의미가 깊다. 권진규의 여동생인 권경숙 여사와 조카 허경회 등 유족들은 작가 사후에 ‘권진규 미술관’ 건립을 추진해왔다. 유족은 미술관 건립을 조건으로 춘천에 있는 한 기업에게 작품을 일괄 양도했다. 하지만, 기업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치열한 소송 끝에 작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이후 2021년 7월 (사)권진규기념사업회와 유족들이 작가의 작품을 서울시에 기증하면서, 권진규 작가의 상설 전시장이 마련될 수 있었다.

권진규의 작품이 오랫동안 머물게 될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의 역사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은 대한제국(1897~1910) 시절 벨기에 영사관으로 사용된 건물(사적 제254호)로, 1905년 회현동에 준공돼 1983년 지금의 남현동으로 옮겨졌다. 권 작가의 조카 허경회씨는 회현동에 첫 보금자리를 틀었다가, 도시 재개발에 밀려 강남 외곽으로 밀려난 건물의 역사가 권진규의 삶이나 작업과도 맞닿아 있는 듯 하다고 밝혔다.

▲권진규 무사시노미술학교武_野美術_校유학시절 사진, MC2014.01Ⅰd0030009.0001
▲권진규 무사시노미술학교武_野美術_校유학시절 사진, MC2014.01Ⅰd0030009.0001 (사진=SeMA 제공)

이번 상설전을 준비한 한희진 학예연구사도 권진규의 삶과 맞닿아 있는 듯한 공간의 내력을 언급했다. 한 학예사는 “이 공간은 대한제국이 주권을 지키기 위해 중립국 정책을 추진하며 지어졌다가, 이후 다른 용도로 쓰이다가 이전 당했다”라며 “이 공간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영원성을 담은 작품을 만들고자 한 권진규와 동시대를 살아왔다는 점과, 드디어 이 곳에서 영원한 안식처를 찾았다는 점에서 서로의 관계성과 존재 의미를 공고히 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층고가 높고, 고풍스러운 디자인을 가지고 있는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과 권진규의 작품은 드디어 만나게 된 오랜 친구처럼 꼭 들어맞는다. 높은 천장이 주는 공간의 광활함은 모든 위치에서 권진규의 작품을 천천히 오래 감상할 수 있는 여백의 공간을 만들어 준다. 전시 공간은 권진규가 손수 지은 아틀리에에서 볼 수 있는 문, 창틀, 선반, 가구 등에서 영감을 받아 원목으로 만든 작품 좌대와 아카이브용 가구로 채워졌다. 이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건물과도 잘 어우러진다. 관람객들은 마치 권진규의 아틀리에에 직접 방문해 그의 작업 전반을 만나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권진규, 춤추는 뱃사람, 1965, 테라코타, 58×79×7cm
▲권진규, 춤추는 뱃사람, 1965, 테라코타, 58×79×7cm  (사진=SeMA 제공)

욕심 부리지 않은 상설 전시

서울시립미술관 2022년 기증자의 뜻을 기리고, 권진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고자 대규모 회고전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노실의 천사》를 개최했다. 전시 기간 중에는 (사)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와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공동 개최해 기존 연구의 오류를 정정하고, 새로운 연구 결과를 내기도 했다. 이어 순회전으로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영원을 빚은, 권진규》를 공동 개최했다.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의 터를 잡은 권진규 상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완성될 수 있었다.

실제 전시장에서는 2022년 《노실의 천사》 전시에서 봤었던, 드로잉 북 등 아카이브 자료와 당시 제작됐던 권진규의 여동생 권경숙 여사의 <나의 오빠, 권진규>, 조카 허명회의 <나의 외삼촌, 권진규> 영상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지난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열렸던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노실의 천사》는 권진규의 작업을 대대적으로 조망하고 아우른다는 점에서 굉장히 큰 규모와 많은 수의 전시 작품을 선보였다. 《노실의 천사》 전시는 권진규라는 작가를 제대로 마주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녔다.

이번 상설전은 신소장 작품 2점을 포함한 작품 26점과 자료 88점을 선보이고 있다. 지난해 대규모 전시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작품을 선보인다. 적은 전시 작품 수가 조금 아쉽기도 하지만, 소규모로 선별돼 전시되는 권진규의 작품들은 되레 관람객들에게 오래 감상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동등한 인체' 소주제 전시작, 남성상과 여성상 4점 ⓒ서울문화투데이

전시는 미술관 1층의 총 5개의 공간에서 열린다. 권진규가 작품을 통해 영원성을 구현하기 위해 마치 수행자처럼 작업에 임했던 도쿄 무사시노미술학교 시기(1949—1956)와 서울 아틀리에 시기(1959—1973)로 큰 줄기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를 다시 ▲새로운 조각 ▲오기노 도모 ▲동등한 인체 ▲내면 ▲영감(레퍼런스) ▲인연 ▲귀의의 7개 소주제로 전개해 권진규 작품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첫 번째 전시장은 도쿄 무사시노미술학교 시기(1949—1956)를 다루며, ▲새로운 조각 ▲오기노 도모라는 소주제로 작품을 선보인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만나는 작품은 1953년 제38회 니카전二科展에서 특대를 수상한 <기사騎士>(1953)다.

언뜻 보면 직육면체의 돌덩어리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제목처럼 말 등에 올라탄 ‘기사’의 팔과 다리, 그리고 머리가 정면에 보인다. 그 반대편에는 말 머리로 이어지는 기사의 팔과 다리가 묘사돼 있다. 앞쪽은 말머리, 뒤쪽은 기사의 등이 표현되어 있으며, 위에서 보면 말머리의 정수리에서 갈기를 거쳐 기사의 머리로 이어지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다섯 면이 모두 다르게 묘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다른 느낌을 준다. 세부 묘사를 최대한 자제한 대신 돌의 질감을 강조해 원시성이 돋보이는 것도 특징이다.

권진규가 자주 제작한 말의 조각을 전시장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구성은 권진규 작품의 전반적인 방향과 흐름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또한, <기사騎士> 전시장 가운데에 홀연히 배치돼 작품이 가지고 있는 기운을 풍부하게 뿜어낸다.

▲권진규, 도모, 1951, 테라코타에 채색, 25×17×23cm, 권경숙 기증,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사진=SeMA 제공)

같은 공간에 전시된 작품으로는 예술적 교감과 생계를 나누었던 동료이자 연인이었던 오기노 도모를 모델로 한 <도모> 두상 연작들이 있다. 테라코타 작업을 시작한 권진규의 작품들을 깊이 있게 만나볼 수 있다.

이어지는 두 번째 공간은 ▲동등한 인체라는 소주제로 권진규가 일본에서 제작한 남성상과 여성상 4점을 선보인다. 두 다리를 땅에 단단히 딛고 올곧게 서있는 나상(裸像) 조각에선 인체가 가진 힘이 드러난다. 전시된 네 개의 나상은 남녀의 신체적 차이보다 인체의 공통적인 구조와 질감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같은 시기 일본 조각가들이 여성의 신체적 특성을 강조한 관능적인 여성상을 만들었다면, 권진규는 생명력을 강조한 강건한 여성상을 만들었다. 작품을 통해 구조와 본질을 구현하고자한 권진규는 남성상과 여성상에 큰 차이를 두지 않았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하며 인체가 가진 힘과 본질성을 드러내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어지는 나머지 공간에서도 시기별 권진규의 주요 작품을 통해, 그의 작품 흐름을 보여주고 작품마다 깊이 있는 해석도 전달한다. 서울 아틀리에 시기(1959—1973)를 다루며, ▲귀의라는 소주제로 전시는 마무리 된다. 마지막 전시 공간에선 독실한 불교 집안에서 자라 불교적 세계관을 가진 권진규를 드러내고, 불교가 스며들어 있는 그의 삶과 작업을 마주하게 한다. 사찰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인 일주문一柱門을 표현한 <입산>(1964-65)이 전시된다. 사찰에 들어가기 전 세속의 번뇌를 끊고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라는 뜻이 담겨 있는 건축물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권진규의 불교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며, 간결하고 소박한 형태, 나뭇결을 최대한 살리면서 목재를 우아하게 다듬은 흔적 등 전통 목조 건축에 대한 권진규의 관심이 잘 반영돼 있다.

▲권진규, 입산, 1964-65년경, 나무, 109×93×23cm ⓒ서울문화투데이

권진규를 기억하는 영원의 공간

미술관은 권진규의 작품 세계를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다양한 전시 연계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권진규 유족이 진행하는 특별 도슨트 <나의 외삼촌, 권진규>가 매주 목요일 오후 2시에 있다. 첫째 주와 셋째 주 목요일에는 허명회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도슨트를, 둘째 주와 넷째 주 목요일에는 허경회 (사)권진규기념사업회 대표가 도슨트와 특강을 진행한다. 6월 중에는 명필름에서 제작 중인 다큐멘터리 영화 <권진규 이야기>의 감독인 민환기의 강연이 마련된다.

권진규는“진실의 힘의 함수관계는 역사가 풀이한다”라는 시구를 남겼다. 권진규의 조각은 당시 추상 조각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 ‘구상’의 형태를 띠고 있어 한국 화단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권진규는 흔히 리얼리즘 조각가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추구했던 것은 사실적인 것도, 아름다운 것도 아닌,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혼, 영원성이었다. 구상과 추상, 고대와 현대, 동양과 서양, 여성과 남성, 현세와 내세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종래에는 이를 모두 무화(無化)하는 작품이 그의 지향점이었다.

▲아틀리에서의 권진규 (사진=SeMA 제공)

최은주 서울시립미술관장은 “앞으로 권진규를 사랑하는 많은 시민, 연구자, 미술인들과 함께 만드는 새로운 이야기를 반영해 2년마다 새로운 상설전을 개최하고자 한다”라고 밝혔다.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은 권진규의 ‘영원한 집’으로 그의 작품을 후세가 다시금 풀이할 수 있는 공간이 됐다. 지금 우리 후세는 그의 아틀리에와도 같은 미술관을 자주 방문하며, 그의 세계를 만나러가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