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비평]양영은 '소나기', 춤으로 보여준 문학 세계와 역사의 기억
[이채훈의 클래식 비평]양영은 '소나기', 춤으로 보여준 문학 세계와 역사의 기억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3.06.21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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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혜인 'Writer & Speaker', 관객과 소통 기대했으나, 발레적 표현 부족으로 아쉬움
제13회 대한민국발레축제 막바지 열기, 기대 모아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지난 18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의식 있는 젊은 안무가의 창작발레 두편을 감상했다. 소극장 공연답게 무용수들의 표정과 호흡은 물론, 손가락 움직임의 뉘앙스까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양영은 비욘드 발레’(대표 양영은)의 <소나기>는 아름다운 무대였다. 황순원의 단편 <소나기>(1953)에 어린 시절의 고무줄놀이, 그리고 아내 남덕에 대한 화가 이중섭의 사랑을 녹여서 따뜻한 문학 작품을 만들었고, 춤동작으로 생명을 불어넣었다. 상징과 은유보다 직접적, 사실적 표현으로 소설의 분위기를 잘 느끼게 해 주어서 일반 대중들이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양영은 비욘드 발레’(대표 양영은)의 <소나기>의 한 장면.©김일우. 

발레의 시작과 끝은 첼로 솔로와 함께 펼쳐지는 소년의 회상으로, 스토리가 있는 양괄식 구성이었다. ‘소나기’ 회고 장면은 고난도의 이인무에 짙은 회한을 담았다. 한국전쟁 때의 군가 <전우여 잘 자라>에 맞춰 고무줄놀이를 하는 모습은 전쟁과 가난이라는 구슬픈 추억의 자락을 잡아낸 연출이었다. 양영은은 고무줄놀이를 해 본 적이 없는 젊은 무용수들에게 연습을 굉장히 많이 시켰다고 한다. 흥겨우면서도 눈물겨운 어린 시절의 풍경을 잘 그렸다. 

무용의 혼은 역시 음악이다. ‘바로크 아다지오’로 불리는 마르첼로의 선율은 한번은 이인무, 한번은 독무로 연출했다. 음악과 하나된 춤동작은 깊은 내면의 탄식으로 공감을 일으켰고, 촉촉한 소나기 효과음은 마음을 적셔 주었다. 헨델-할보르센의 <파사칼리아>는 가장 선명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이 장면의 4인무는 무척 아름다웠고, 흰 천 위에 투사된 꽃무늬는 찬란한 효과를 낳았다. 새소리와 개울 소리 효과음은 너무 단조롭게 반복돼서 아쉬웠다. 고즈넉한 느낌을 살릴 수 있도록 좀 더 섬세하게 편집하면 좋았겠다. 전체적으로 많은 음악을 병치했는데, 음악의 강약과 완급을 잘 안배해서 관객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면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양영은 비욘드 발레’(대표 양영은)의 <소나기>의 한 장면.©김일우. 

영국 유학 시절 문학에 심취했던 양영은의 내공이 돋보인 작품이었다. 한국 문학을 발레로 표현하고 싶다는 그의 포부는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에 이어 <소나기>에서 더욱 충실한 열매를 맺었다. 한국적 소재를 무용으로 재창조하는 그의 작업이 더 아름다운 결실을 이루기 바란다. 

발레 프로젝트(대표 원혜인)의 <Writer & Speaker Ⅱ>는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예술가는 여기 있다>를 모티브로 창작한 발레다. 원혜인은 자신의 궁극적 관심사가 ‘소통’이며, 관객과의 소통에 앞서 자신과의 소통을 추구한다고 밝혔다. ‘나’의 내면을 돌아보되, 기승전결 속에 군무의 섬세함과 통일성을 살리려 했다는 것이다. 

▲양영은 비욘드 발레’(대표 양영은)의 <소나기>의 한 장면.©김일우. 

원혜인은 소품으로 해바라기를 활용하여 삶의 의미를 강조하고 빨간 벽돌을 밟고 쓰러지는 동작으로 힘겹게 삶을 헤쳐가는 인간 조건을 묘사했다. 일상의 갈등과 극복 과정을 편안하게 전달하려고 점프 수트를 의상으로 활용했다, 하체를 안정되게 움직이면서 상체를 통해 표정을 드려내는 연출이 많았고, 이러한 이미지는 특히 군무에서 돋보였다. 

하지만 작품의 전반부는 지나치게 ‘논버벌 퍼포먼스’로 흐른 게 아니냐는 비판의 소지가 있었다. 관객과 소통하기 위해 너무 직접적인 행위로 흐르면 발레의 본령을 벗어날 위험이 있다. 감정과 의식을 춤으로 풀어내는 것이 무용의 고유성을 지키는 것임을 잊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삶에 실패하고 좌절하여 몸부림치는 전반부에서 삶을 긍정하며 기뻐하는 후반부로 이어지는데, 연출/안무가는 당연히 작품 전체의 통일성과 일체감을 추구했겠지만 전체적으로 연결과 균형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인상을 남겼다.

음악/음향 효과는 락, 헤비메탈, 클래식을 다양하게 안배했고, 독일어 내레이션을 삽입하여 모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전체적으로 볼륨이 너무 크고, 베이스에서 소리가 뭉개진 것은 음원의 문제인지 현장 오디오 시스템의 문제인지 분명치 않지만 다소 거슬렸다. 베토벤 <황제>의 아름다운 2악장에서 마지막 노래로 점프한 것은 매끄럽지 않았다. 한 곡을 마무리하고 다음 곡으로 연결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안무의 영역은 넓다. 무용수의 자유재량도 크다. 따라서 <Writer & Speaker Ⅱ>는 새로운 해석과 시도를 통해 더 멋진 공연이 가능한 작품이다. 관객에게 열려 있듯 미래를 향해서도 열려 있는 작품으로서 더욱 강한 생명력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제13회 대한민국발레축제는 광주시립발레단 초청공연 <돈키호테>(6월 24일 2시/7시, 6월 25일 2시)를 남겨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