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man Library]무대 위 세상을 통해 ‘나’를 마주하기
[Human Library]무대 위 세상을 통해 ‘나’를 마주하기
  • 독립연출가 서 린
  • 승인 2023.06.21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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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의 기원이 되는 곳이라 볼 수 있는 고대 그리스에서 열렸던 비극, 희극 경연대회는 정치적 역할도 하였지만, 대중들이 정치 체제로부터 벗어나 여가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역할도 하며 발전하였다.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양한 형태로 발전한 공연 예술은 여전히 우리 삶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활발하게 공연되고 있다. 특히, 무대 위에 그려지는 세상을 통해 관객과 대화하는 연극과 뮤지컬은 ‘우리 삶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예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매일 내게 구름과 비를 내려줘’ 

우리나라에서 네 차례 공연되었던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 의 마지막 넘버 ‘빛’의 가사이다. 겉 보기에 평범해보이는 가정인 ‘굿맨 패밀리’의 이야기인 이 작품은, 과거의 상처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엄마 ‘다이애나’와 그런 엄마로부터 소외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나탈리’,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는 아빠 ‘댄’을 통해 평범함의 의미는 무엇일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정신병을 앓고, 자살 시도를 하고, 마약을 하는 등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아주 작은 한 걸음을 나아가는 굿맨 패밀리를 통해 우리 모두의 삶이 평범하지 않으며, 평범함 그 주변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한 여정임을 알려준다. 이들은 과거의 아픔을 잊지 않는다. 그 아픔을 마주하고,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아주 작은 ‘한 줄기 빛’을 향해 진보한다. 또다시 비극적인 사건들이 휘몰아칠 수도 있는 불안정한 가족이지만, 그 빛을 발견했기에 다시 일어설 것이다.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이야기는 거창한 이야기가 아닌, 우리 삶과 가장 닮은 이들의 작은 성장이 주는 감동일 것 같다. 

‘어두운 계단을 올라가자, 멈추지 말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미국의 여성 시인 ‘실비아 플라스’의 삶을 그린 뮤지컬 <실비아, 살다>는 그녀의 죽음을 삶을 향한 몸부림으로 재해석하여 가상의 인물인 빅토리아를 등장시키고, 실비아의 삶을 죽음을 통해 살아나는 이야기로 그려냈다. 작품 내에는 실비아 플라스의 실제 작품들을 인용한 가사와 대사가 등장한다. 작품에서 인생을 아홉 번째 왕국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으로, 실비아의 자살 시도를 비상 정차로 표현하였는데, 이것은 그녀의 소설인 에서 따온 것이다. 10대, 20대에 한 번 씩 비상 정차를 시도한 실비아는 다시 여행을 시작하며 자신이 처한 비극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출하고, 맞서고자 한다. 가상의 인물인 빅토리아는 실제로 실비아 플라스의 필명이며, 극 중에서 실비아를 살리기 위해 나타난 죽음을 맞이한 실비아로 등장한다. 두 사람이 마주하며 실비아가 살게되는 과정은 아픔을 이겨내고 나아가는 방법은 스스로 그 아픔을 마주하고, 스스로에게 손을 내미는 방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실비아는 ‘어두운 계단을 올라가자, 멈추지 말고, 걷다가 보면 환한 빛이 우리를 맞이할거야’라는 그녀의 소설에서 인용한 가사가 담긴 마지막 넘버를 부르며 다시 한 번 여행을 시작한다. 그녀는 어둠 뿐인 세상에서 맞이할 환한 빛을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삶을 누구보다도 원했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나를 위해 손을 뻗는 건 또 다른 나 뿐이야’ 

이금이 작가의 청소년 소설을 뮤지컬 <유진과 유진>은 아동 성폭행이라는 같은 사건을 겪은 ‘이유진’이란 이름을 가진 두 학생이 함께 아픔을 극복하고 나아가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단순하게 아동 성범죄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거나, 어두운 분위기로 이야기를 전해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겪었을 법한 고민과 방황, 나를 이해 받는 과정을 통해 상대를 이해하게 되었던 경험들을 친숙하게 그려내기 때문에 두 유진이들에게 ‘나’를 대입해보면서 작품을 볼 수 있다. 뮤지컬에선 연극 심리 치료 기법인 ‘사이코 드라마’의 형태로 각색을 하여 성인이 된 유진이들이 과거의 기억들을 다시 연기해보며 그때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들로 그려냈다. 같은 사건을 경험한 이름이 같은 두 아이가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 손을 맞잡는 과정이 마치 자기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에서 실비아가 빅토리아와 마주하며 다시 한 번의 삶을 시작하듯 말이다. 두 유진이들이 사이코 드라마를 완성하기 위해 수많은 연습을 진행했을 것이다. 관객들이 보는 그날의 사이코 드라마가 처음으로 마지막 장면에 도착하는 순간이다. 언젠가 또 다시 과거의 트라우마가 유진이들을 아프게 할 수도 있겠지만, 두 사람은 가끔 괜찮지 않아도 또 괜찮아질거라는 것을 깨닫기에 넘어져도 일어날 것이라는 희망을 전달한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나를 돌보는 시간’인 것 같다. 우린 무대 위의 인물들이 각자에게 닥친 상황을 각자의 방식으로 이겨내고, 나아가는 모습을 보며 그 인물에 자신을 투영하고 마주한다. 삶은 아주 작은 희망과 희미한 빛을 찾아나서는 여정이다. 무대 위 세상에서 일어나는 기적과 같은 일들을 실제 우리의 삶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 21세의 공연 예술의 역할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