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석의 컬렉션 비하인드] 잘못 팔았다고 말할까 봐 도망치듯 나온 기억, 김의광
[윤태석의 컬렉션 비하인드] 잘못 팔았다고 말할까 봐 도망치듯 나온 기억, 김의광
  • 윤태석 남평문화주조장 대표(예술감독)
  • 승인 2023.06.21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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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석 남평문화주조장 대표(예술감독)

목인(木人)과 석인(石人)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컬렉터가 있다. 「목인박물관 목석원」의 김의광(金義光, 1949∼) 관장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만 살았으니 말 그대로 서울 토박이다. 일가친척까지 모두 서울 사람이니 어려서 김의광은 서울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수집병(病)은 일찍 발병했다. 그의 기억에 의하면 초등학교 4학년 때 마스코트(護身)라는 말에 꽂혀 어머니를 졸라 삼촌과 함께 조선호텔 앞 골동품 가게에서 은제 장신구의 한 부분인 4cm 정도 크기의 찌그러진 호리병을 가지게 된 것이 초기 증세였다.

그리고 중학교 때부터 그 증세는 깊어져만 갔다. 당시 단골 메뉴였던 우표 수집을 시작했고, 외국 우표를 모으기 위해 펜팔도 하게 됐다. 1975년경 어느 날인가 한 외국인 친구 집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몇 개국의 전통 민속품이 전갈하게 진열된 것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한국인인 자신도 처음 보는 우리 옛 민속품의 아름다움에 빠져있던 한 이방인의 안목은 그 자체가 굉장한 문화충격이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등잔과 떡살 등 옛 민속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등잔을 써본 적이 없었던 터라 전등을 끄고 호롱에 불을 붙여 한동안 놔둬본 적도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인사동이나 황학동을 돌아다녔고 출장 때는 지역의 벼룩시장에 들러 민속품을 조금씩 수집하기도 했다.

당시는 직장인이어서 주로 서민이 사용했던 값싸고 투박한 민속품에 눈이 갔고, 자주 대하다 보니 담박하고 소박한 조형미가 그 어떤 현대미술품보다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되었다. 한번은 괴목 이 층 농을 집에 들여놓고, 얼마나 행복했던지 갓 백일 된 아들 녀석을 안고 아들 한번 농 한번, 싱글벙글 번갈아 가며 쳐다 본적도 있었다. 어느 핸가는 오래된 3개짜리 칠보 은도끼 노리개 장신구에 장식 일부가 깨졌다고 아내가 칠을 깨끗이 벗겨버려 망연자실했던 적도 있다.

▲(좌측부터) 찌그러진 호리병(은제 장신구), 괴목 이층 농, 학 조각상 (사진=윤태석 제공)
▲(좌측부터) 찌그러진 호리병(은제 장신구), 괴목 이층 농, 학 조각상 (사진=윤태석 제공)

1980년대에 들어서 상여 관련 민속품들이 시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핵가족화와 서구식 장례문화 정착 등으로 상여 문화가 점점 사라지자 상여 장식용 인형들이 골동품 거리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무렵 봉황 조각 한 쌍을 농악에 쓰는 장식품이라는 말을 듣고 샀는데 알아보니 상여 장식용 소품이었다. 이렇듯 당시는 상여에 큰 관심이 없던 때였다. 한번은 어떤 가게에 들렀는데 학 조각상이 눈에 들어왔다. 과장과 절제, 비례와 단순미가 우리 민화를 보는 듯 아름다웠기에 수집욕이 발동했다. 주인에게 가격을 물었더니, 생각보다 싸서 주인이 잘못 팔았다고 할까 봐 도망치듯 들고나온 기억도 있다. 이렇게 하나둘씩 상여 장식 인형을 수집하면서 목인도 모으기 시작했다.

이후 잘 아는 골동품가게에서 가지고 있던 전부를 사라고 권했지만, 금전적인 문제도 있고 해서 직접 구매하지 못하고 지인들에게 소개했다. 각물유주(各物有主)라고 했던가 그러나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아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 후 아내와 의논해 그동안 수집한 것들로 박물관을 한번 차려볼 요량으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그때부터는 더욱 적극적으로 목인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목인박물관 대표 유물 이미지
▲목인박물관 대표 유물 이미지 (사진=윤태석 제공)

목인과 더불어 수집한 것이 석인이다. 석인(石人)이란 사람의 형상을 한 석상(石像)으로 문·무인석과 동자석 등이 있으며 주로 무덤과 동리를 지키고 사회적 지위나 신분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다. 태평양화학 입사 후, 반달표 스타킹으로 유명한 유영산업 인수팀에서 일할 때, 공장(도봉구 방학동) 주변에 방치된, 하반신이 깨진 문관석을 가져다 두었던 것이 석물 수집의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부터 고속도로와 댐이 건설되고 새마을운동과 산업·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분묘를 이장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땐 옛 풍습에 따라 원터의 석물을 파손해 버려지거나 묻어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때부터 석물이 골동품 시장에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보통의 수집가들이 그렇듯 김의광 역시 수집하면서 배우고 터득한 수집품의 매력을 여러 사람과 폭넓게 공유하기를 희망한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응회암 석상들의 아름다움과 이들의 고향을 연구하여 알리고 싶은 것도 그 일환이다. 그래서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의 왕래도 빈번한 인사동에 박물관을 열면 이를 충족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1950년대에 건축한 양옥과 일본식 주택 한 채씩을 마련했다. 이를 증·개축해 2006년 3월에 문을 열었던 것이 「목인박물관」이었다. 이후 아내와 함께 2015년 5월에 재단법인 목인 문화재단을 설립하고 많은 소장품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전시·개방하기 위해 풍광이 좋은 부암동 인왕산 자락 한양도성 옆으로 이전(2018년)하여 2019년 9월 「목인박물관 목석원」으로 확장·개관했다. 지금까지 많은 관람객이 박물관을 찾아 선인들의 삶과 지혜가 교합된 목인과 석인을 알아가고 있음은 김의광의 큰 보람이다. 지금도 김의광의 수집병은 호전의 기미 없이 몽유병 환자처럼 국내외를 떠돌고 있다.

▲김의광 관장과 그가 수집한 첫번째 문인석
▲김의광 관장과 그가 수집한 첫번째 문인석 (사진=윤태석 제공)

▷ 이번 호부터 윤태석 박사(남평문화주조장 대표)가 박물관ㆍ미술관장들을 비롯한 다양한 컬렉터들의 유물 수집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연재합니다. 윤태석 박사는 오랫동안 뮤지엄 일선에서 일하면서 축적해온 생생한 사연들을 글로 전달하여, 독자들에게 컬렉터의 애환과 집착, 고뇌와 갈등을 통해 우리사회에서 그들의 의미를 환기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