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서울시국악관현악단 ‘전통과 실험 – 풍물’ ①
[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서울시국악관현악단 ‘전통과 실험 – 풍물’ ①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23.06.2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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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2023년 6월 13일,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전통과 실험 –풍물’은 훌륭했다. 21세기 국악관현악연주사의 한 페이지에 진지하게 기록할 만한 연주회였다. ‘전통과 실험’은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은 작년부터 시작한 브랜드 이름이다. 

2022년 6월 7일, 국가무형문화재 ‘동해안별신굿’을 주제로 한 창작곡이 선을 보였다. 이지영(가야금), 허익수(거문고), 류근화(대금), 남성훈(아쟁) 등 협연자의 기량이 출중했다. 대한민국 국악 연주가의 세계적인 연주 수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들은 작곡가의 의도를 충분히 살려냈고, 국악관현악과 협연하는 솔리스트의 조화가 아름다웠다. 이런 중심에 두말할 필요도 없이 김성국 지휘자가 있었다. 

과거의 명성에 비해서 ‘현재의 역량’에 대해서 늘 호응을 얻지 못했던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은, 작년의 ‘전통과 실험 – 동해안별신굿’을 계기로 확실하게 부정적 의견은 잠재우게 했다. 올해 ‘전통과 실험 – 풍물’을 지켜보면서, 평론가 등 국악계의 오피니언 리더는 이 악단에 대해서 더욱 기대하는 발언을 지속했다. 

단원의 연주력 x 기획의 확고함 

불과 1년 사이, 서울시국악관현악단에 대한 평판은 천양지차(天壤之差)가 되어 버렸다. ‘국악관현악 분야에서 앞으로 가장 기대해 볼 단체는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를 들겠다. 첫째, ‘단원의 연주력’이다. 믿지 못할 정도로, 한두 해 사이에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연주역량이 장족에 발전했다. 어쩌면 국악관현악단원의 개인적 기량은 어느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이들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작품과 지휘자를 못 만났다는 것이 더 맞는 얘길까? 

둘째, ‘기획의 확고함’이다. ‘전통과 실험’으로 대표되는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기획은 언제나 ‘국악관현악’을 중심에 둔다. 이게 너무도 당연하나, 그렇지 못한 연주회가 허다하다. 특히 국악계에서 ‘국립’이란 타이틀을 걸고 있는 기관이나 단체가 때론 주객전도(主客顚倒)된 공연을 기획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움을 넘어서서 화가 난다. 이런 연주회는 당시에는 매스컴의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한가? ‘한 번의 이벤트’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악관현악의 위상을 높이고 음악적인 외연을 확장시키는데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이런 기획자를 ‘이목(耳目)형 기획자’라고 매우 낮게 평한다. 속히 이런 기획자가 줄어들고, ‘안목(眼目)형 기획자’가 많아지길 바란다.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전통과 실험’, 올해의 주제는 풍물(농악)이었다. 세 명의 작곡가가 신작으로 참여했다. 임준희(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작품은 듣기에 좋았다. 임준희 작곡 ‘혼불8-맥(脈)’은 농악에서 주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태평소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작품에 ‘실험’이란 단어를 적용할 수 있는 건, 태평소란 악기를 보다 다양하게 사용하자 하는 모색에서 찾을 수 있겠다. 이 작품에 관해서 노유경 박사는 ‘태평소와 함께 가는 생명의 소리가 공동체적인 맥의 흐름과 순환을 노래’하는 작품으로 극찬했다. 

임준희 작품에서 느껴지는 정(情)의 스토리텔링 

내가 임준희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얼까? 그건 정(情)이라는 단어로 집약된다. 이 말이 누구에겐 매우 추상적으로 받아들여질지 모르겠다. 국악관현악이 보다 많은 ‘지적(知的) 감상자’의 공감을 얻기 위해선, 기법 이상으로 중요한 적이 ‘정서적 구체성’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임준희는 국악관현악의 수용층을 확산할 수 있는 큰 장점을 지닌 작곡가이다. 

임준희의 여러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이야기성’이다. 곧 ‘스토리텔링’이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매개하는 중요한 정서를 나는 정(情) 또는 정감(情感)으로 본다. 임준희 작품에선 ‘혼불’ 시리즈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모두 정감이 느껴진다. 임준희 작품을 듣고라면, 거기서 이야기가 전달되고, 그 안에서 어떤 인물의 모습마저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장태평 작품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 

장태평(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부지휘자)의 ‘춤추는 바람꽃’은 매우 섬세한 작품이었다. 풍물이나 농악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면, 흔히 리듬 또는 다이내믹의 변화가 겉으로 확실하게 드러나면서 매우 역동적인 작품을 지향할 것이란 선입견이 있다. 장태평의 곡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춤추는 바람꽃’은 구례농악의 명인 유순자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언이다. 여성농악의 시대가 있었다. 유순자는 호남여성농악단의 상쇠로 이름을 날렸는데, 특히 그의 부포춤은 유명했다. ‘춤추는 바람꽃’은 유순자의 부포춤을 상징하는 말이다. 작곡가는 어린 시절 유순자 명인 문하에서 농악을 배우고 익혔다고 들었다. 

이 작품의 매력은 ‘객관적 거리감’이다. ‘춤추는 바람꽃’이란 제목을 가져와서, 농악 또는 농악의 명인을 ‘객관적 거리감’을 두고 그려냈다. 근경(近景)이 아니라 원경(遠景)이다. 농악의 현장에서 매우 분주하게 활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저 멀리 들녘에서 들려오는 농악의 풍경이라고나 할까? 결과적으로, 풍물이나 농악을 소재로 한 작품도 ‘낮은 목소리’를 접근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타악을 기반한 작품에서도 깊게 사유(思惟)할 수 있는 여지(餘地)가 존재했다. 

동 세대의 작곡가와 지휘자 중에서 장태평은 일찍이 돋보였다. 많은 사람이 장태평을 인정했다. 대한민국 유수악단의 부지휘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국악작품을 한국사의 시대적인 맥락에서 파악하고 있는 그를 여러 사람이 기대하고 있다. 나는 솔직히 그를 향한 걱정스러운 우려(憂慮)가 있었다. 나는 지금도 장태평이 ‘제 2의 원일’ ‘제 2의 김대성’이란 범주 안에서 파악하고 있다. 이를 떠나서도, 내 눈에 비친 장태평 또는 그의 작품은 다소 ‘자신과 자만 사이’에 존재했다.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김상욱 (서울돈화문국악당 ‘실내악 ’ 음악감독)은 장태평의 작품 중의 중요한 정서로서 ‘우울감’을 얘기한다. ‘작품 저변에 깔린 우울감’은 때로는 ‘시대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우울감’과 연관된다고 보고 있다. 

내가 이번에 들은 장태평의 ‘춤추는 바람꽃’은 달리 들린다. 시대적 우울감은 ‘개인적 우울감’으로 느껴지고, 자신(自信)을 한 발자국 나가면서 드러내기보다는, 자신(自身)을 한 발자국 물러나는 되돌아보는 여유가 느껴졌다. 장태평에 대한 과거의 나의 견해에 대한 의구심이 들면서, 장태평이란 작곡가를 또 다른 측면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마음이 처음으로 샘솟았다. 

무릇 작가(作家)라면, 일상의 삶에서도 가상의 작품 속에서도 솔직한 자기성찰이 가장 중요하다. 작곡가 장태평이 심경의 변화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듯한 작품을 보면서, 이것이 ‘사유와 터득의 시발점’이 아닌가 기대하게 된다. 

이제는 익숙해진 도날드 워맥의 작곡 기법 

도날드 워맥(Donald Reid Womack)의 은 뛰어난 작곡가이다. 현재 국악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곡가임이기도 하다. 한국의 전통음악을 소재로 해서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한국인 또는 한국작곡가가 간과했던 걸을 끄집어 와서, 매우 ‘상품적 가치’가 높은 결과를 만들어낸다. 이런 도날드 워맥이 참 고맙기 그지없다. 그런데 내가 평론가로서 인정(認定)하고 인지(認知)하는 도날드 워맥은 딱 여기까지다. 

한 측면의 단순비교이긴 하나, 임준희와 도날드 워맥은 매우 분명하게 다르다. 임준희의 작품에서 전해지는 정(情)의 정서가, 도날드 워맥에게선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임준희 ‘정’에 대치될 만한 정서적 키워드가 도날드 워맥의 작품에선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작품적 형식감이 돋보인다. 흔히 작곡계에서 말하는 말을 빌린다면, 도날드 워맥은 ‘해체와 결합’에 매우 능숙한 장인이다. 모든 작품에 공히 발휘된다. 그러나 그 방식이 작품마다 크게 다르진 않다. 

도날드 워맥의 작품을 연주가들은 선호한다. 작품을 분석하면서 연주하는 재미가 분명하다. 그런데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과연 이 작품을 감상자들이 얼마만큼 좋아할 수 있는가를. 

도날드 워맥의 작품이 좀 더 ‘보편적 한국인’과 ‘지적(知的) 한국인’들에게 보다 더 설득력을 가질 수 있기 위해선, 작곡가 스스로는 어떤 걸 채워야 할까? 작곡가의 매우 세련된 영업비밀(?)이 이제 어느 정도 알려진 상태에서, 도날드 워맥의 작품은 이제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