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名舞의 실종, 공허한 무대
[성기숙의 문화읽기]名舞의 실종, 공허한 무대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3.06.21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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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풍류_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완판무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국립정동극장(대표 정성숙)이 야심차게 기획한 “세실풍류_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완판무대”(2023년 6월 7일, 국립정동극장 세실)의 막이 열렸다. 제27호 승무(이매방류)의 채상묵, 제92호 태평무(강선영류)의 양성옥, 제97호 살풀이춤(김숙자류)의 양길순, 제97호 살풀이춤(이매방류)의 정명숙 등 네 분의 보유자가 무대에 섰다. 완판으로 꾸며진다는 주최측의 선전에 큰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춤 솜씨는 차치하고서 우선 온통 흰색으로 치장된 무대가 문제였다. 무대바닥, 호리존트, 등·퇴장을 위한 가림막 등 무대는 한결 같이 흰색으로 꾸며졌다. 흰색의 무대는 춤사위의 선명성을 희석시켰다. 승무의 장삼자락이 내뿜는 장쾌한 미감은 관객의 시선에 온전히 포착될 기회를 잃었다.

살풀이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살을 풀고 액운을 물리치는 살풀이수건의 뿌림사위 역시 흰색 호리존트에 묻혀 무의미하게 산화(散花) 됐다. 버선발의 발 디딤 또한 흰색의 둔탁한 질감의 무대바닥으로 인해 그 섬세함의 묘미가 저하되었다. 더불어 온통 흰색으로 치장된 무대는 조명빛에 반사되어 관객에게 시각적 피로감을 안겨줬다.

이른바 회사후소(繪事後素)의 형식은 차용했지만 정작 내면의 본질이 중요하다는 글귀에 담긴 속 깊은 뜻은 다소 방기된 듯 싶다. 『논어(論語)』 「팔일(八佾)」 편에 나오는 회사후소라는 말은,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뒤에 가능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본질이 있은 후에 꾸밈이 있다는 말과 상통한다. 겉으로 드러난 꾸며진 아름다움 보다는 내면에 깃든 정신과 본질이 더 중요하다는 것에 방점이 있다. 춤의 고유성 내지 원형은 바로 본질 즉 바탕에서 싹터 나온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무형문화재 춤의 고유성 및 원형 보존에서 회사후소는 곱씹어야 할 글귀이다. 몇 년전 태평무 예능보유자 인정 논란의 핵심은 바로 우리 춤의 고유성과 원형이 훼손된다는 우려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근대 서양춤의 이식의 산물인 신무용(新舞踊) 주자의 태평무 보유자 인정이 적절치 않다는 주장은 지금도 여전히 설득력 있다.

주지하듯, 전통춤과 신무용은 신체 호흡과 춤사위 기법, 나아가 몸짓의 형(型)과 미학적 질감이 완전히 다른 체계에 있다. 따라서 배움의 내력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태평무 보유자 양성옥은 신무용의 종가(宗家)로 인식되는 경희대를 거쳐 송범 단장시절 국립무용단에서 활동했다. 때문에 신무용 어법이 짙게 체화됐을 것이라는 짐작은 그리 어렵지 않다.

태평무 1대 보유자 강선영은 무대 위에 서 있기만 해도 예인적 풍모가 넘쳤다. 질박하면서도 텁텁한 춤사위는 호방한 멋과 함께 덩실덩실 장단을 타고 넘는 흥과 신명이 있었다. 반면 양성옥이 선보인 태평무는 예각적(銳角的)이고 인위적이다. 전통춤 호흡에 따른 곡선의 장삼 뿌림사위에서 연출되는 장엄함의 미학은 절취(切取)된 몸짓의 인위적 꾸밈으로 인해 반감되었다. 태평무의 묘미인 절도 있는 복잡 다양한 발디딤 기법도 온전히 발현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의 고유성과 춤의 원형은 과연 무엇인가 새삼 되묻게 한 무대였다.

경기도당굿을 원천으로 한 도살풀이춤은 질곡의 삶을 헤쳐온 김숙자의 예술 인생이 고스란히 스며든 유서 깊은 춤이라 할 수 있다. 생전의 김숙자는 서릿발 같은 위엄과 도도한 기운으로 시선을 압도했다. 춤의 절정인 소위 ‘목젖놀음’에서는 온몸을 휘감는 섬뜩한 전율을 안겨줬다. 한과 신명을 넘나든 초탈의 경지에서 토해내는 혼(魂)의 몸짓이었다. 비극적 애원성을 춤사위로 풀어낸 김숙자의 도살풀이춤은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독창적 미감으로 독보적 위치에 있었다. 그의 제자 양길순이 선보인 도살풀이춤은 집적된 세월만큼이나 숙성된 멋을 풍겼으나 감흥이 없는 평범한 무대에 머물렀다.

하늘의 내린 춤꾼 우봉 이매방의 공적(公的) 후계자 채상묵의 승무는 다분히 교과서적이다. 유파를 초월한 전통춤 승무의 정석이라 해도 과이 틀리지 않는다. 승무의 교본이라는 장점은 있으나 호남춤 고유의 기방적 정서가 투영된 소위 비법은 기대하기 어렵다. 다만, 그의 인품대로 군더더기 없는 깨끗한 미감의 고고한 춤사위는 격조있고 고급스럽다. 나이에 비례한 중후한 춤사위는 돋보였으나 균형감을 상실한 순간의 흔들림은 오랜 연륜으로 쌓아올린 깊은 내공을 무력화시켰다.

마지막으로 무대에 오른 정명숙은 명인다운 기질을 과시했다. 장단의 완급과 강약의 흐름에 걸맞게 맺고 풀고 어르는 춤사위가 단아하고 정갈하며 또한 기교적이다. 정중동이 교차하는 수준높은 예술성을 띠고 있지만 기방적 미감이 짙은 이매방류 살풀이춤 고유의 기법인지는 다소 모호하다. 그의 또 다른 스승 김진걸의 신무용에 이매방 춤제가 뒤섞여 정교한 세련미로 승화된 것은 아닌지 싶다.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무대에서 내뿜는 특유의 에너지는 경외롭지만, ‘신체나이’의 한계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국립정동극장 기획 “세실풍류_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완판무대”는 실망감을 안겨줬다. 명무(名舞)의 권위는 실종되었고, 무대는 더없이 공허했다. 장삼자락이 엉키고 살풀이수건이 힘없이 주저앉는가 하면 때론 장단과도 빗겨갔다. 춤꾼들의 쇠잔한 호흡과 균형감각을 잃은 듯한 몸짓은 불안감을 안겨줬다. 어떤 측면 무대 위의 춤꾼들보다 객석의 관객이 더 긴장한 무대였다.

필자의 경우, 40여년을 전통춤 현장에서 이매방·한영숙·강선영·김숙자 등 무형문화재 제1대 예능보유자의 생전 모습을 익히 봐온 터라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제1대 예능보유자들의 춤에는 이른바 혼(魂)과 정신(精神)이 깃들어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명무로서 감히 넘볼 수 없는 권위의 상징이었다.

과거는 현재의 안내자이자 미래의 나침판이다. 가까운 과거 우리 무용계는 역대급 불공정 논란 속에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여덟 명이 한꺼번에 동시 인정되는 쾌거(?)를 이뤘다. 그러나 ‘은폐된 진실’ 속에 마냥 환호할 수 없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견뎌야 했다.

국립정동극장 기획의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완판무대는 우리에게 뼈아픈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오늘·여기’, 대한민국 무용계는 고유성 및 원형 훼손으로 인한 우리 춤의 형질 변경은 물론 전통춤 현장의 생태계 파괴를 초래할 것이라는 예단이 한층 앞당겨진 현실 앞에 서 있다. 최고 권위의 보유자 춤판이지만 ‘평준하향화’된 오늘의 전통춤 전승의 실상을 웅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무대는 실로 역설적이다. 역설의 교훈을 곱씹을 때 전통춤의 올바른 보존 계승을 위한 합리적 제도 및 정책 방안이 강구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