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 황란 작가 “‘인간의 본질’ 탐구, 내 작품은 종교의 일환”
[Special Interview] 황란 작가 “‘인간의 본질’ 탐구, 내 작품은 종교의 일환”
  • 이은영 발행인ㆍ이지완 기자/김재성 사진기자
  • 승인 2023.06.21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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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와 실, 핀으로 완성한 동ㆍ서양 감각 아우르는 ‘독창성’ 높은 평가
9.11테러ㆍ팬데믹, 삶과 죽음 고민케 해
페이스북 본사 로비 「Another Freedom」…동서양 정신과 정서 담은 독수리와 봉황 합친 하이브리드 생명체
오는 9월 《2023 청주공예비엔날레》 본 전시 참여
2024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 초대작가로 초청받아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ㆍ이지완 기자/김재성 사진기자] 황란 작가는 한국보다도 해외에서 더 유명한 작가다. 미국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해 뉴욕 퀸즈 미술관, 브루클린 미술관에서도 작품을 선보였다. 미국, 유럽, 아랍에미리트를 오가며 전시를 선보였고, 그의 작품은 뉴욕 휴스턴미술관, 브루클린미술관에 영구 소장돼 있기도 하다. 개인 소장가로는 밥 허스트 휘트니미술관 이사, 테니스 선수 로저 페더러 등이 있다.

▲황란, Another Freedom_FB, Threads, Chain, Pins on wall, H380cm x W1080cm x D5cm, 2021, 페이스북 뉴욕 본사 설치작 (사진=황란 제공)

황 작가와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접한 키워드는 2001년 뉴욕에서 벌어진 9.11테러였다. 황 작가는 9.11테러 경험이 자신의 작품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황 작가는 단추와 실, 핀으로 독창적인 설치미술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는 단추와 실, 핀으로 매화, 기와, 부처, 독수리, 봉황 등을 표현한다. 그의 작품에선 쉽게 동양과 서양의 정서를 나눌 수 없다. 작품 소재는 굉장히 한국적이지만, 작품이 드러내는 빛이나 색감은 동양의 것이라기에는 좀 더 화려하고 선명한 기운을 가지고 있다. 그 묘한 두 감각의 합일은 익숙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인이 알고 있는 감각, 끌리는 감각을 담고 있었다.

인터뷰에서 황 작가는 9.11테러 이전, 성장과정에서 보고 배운 불교적 세계관이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가장 동양적인 기반으로 서양의 깊은 상처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 시선은, 국가 경계를 넘어 인류 전체를 아우르고 있었다. 그 시선의 출발점이 딱 무엇이라고 가름할 수 없는 그의 작품의 이유이지 않을까 싶었다.

인터뷰는 지난 8일, 파주에 있는 황 작가의 작업실 ‘RH 황란 스튜디오’에서 진행됐다. 황 작가는 인터뷰 내내 한국에 있는 D사에서 나온 믹스커피를 따뜻하게 타서 마시며 말을 이어갔다. 최근 바쁜 일정으로 입천장이 다 헐어, 달달한 커피가 입에 맞는다고 했다. 미국 뉴욕에서 26년 넘게 살아가고, 활동하고 있는 작가와 한국 믹스커피의 조합은 또 새로운 느낌이었다. 황 작가와 함께한 두 시간 여의 인터뷰는 모두 이런 느낌이었다. 익숙하면서 낯설고, 진지하면서도 친숙하고 재밌는 대화였다. 작품은 작가를 닮는다. 그의 작품이 가진 진중하면서도, 화려하고 맑은 빛들이 담긴 인터뷰였다.

▲독수리와 봉황이 합쳐진 하이브리드 생명체를 소재로 한 작품 앞의 황란 작가 ⓒ김재성 사진기자

뉴욕을 기반으로 전 세계에서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한국에서는 어떻게 파주에 작업실을 두게 됐는가.

확 트여 있는 공간을 좋아하는데 이 지역이 높은 건물이 없고, 조용한 지역이어서 관심이 있었다. 날씨가 좋을 때엔 여기서 한강도 보인다. 이 땅과는 인연이 깊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에 이 건물이 들어서기 전부터 이 곳을 보고, 기회가 되면 꼭 내가 들어오고자 했다. 그런데 계속 작업을 하면서 자금적인 여유가 없다보니, 꿈을 이루지 못했고, 이 건물을 짓고자 했던 분에게 땅이 가게 됐다.

그 시기에 나는 계속해서 작품을 하고, 전시를 준비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큰 자금을 모을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가 2020년 코로나가 터졌는데, 갑자기 전 세계의 자금이 동결돼버린 것이다. 당시 내 작품이 아랍에미리트 왕궁 컬렉션으로 들어가게 됐는데, 코로나로 인해 작품 값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 1년은 그냥 무작정 버티면서 지냈던 것 같다. 그리고 ‘위드 코로나’가 시작됐고, 갑자기 묶여있던 큰 작품값들이 들어왔다. 목돈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때 나와 이 땅을 자주 봤던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알고보니 이 건물 사장님도 코로나 시기에 어려워서 건물을 내놓은 상황이었다. 그때 부동산 사장님이 내게 연락을 한 것이다. 적은 돈이라도 괜찮으니, 계약금만 걸어두면 잔금은 1년 후에 넣어도 된다고 했다. 그래서 계약을 진행하고, 한 달 후에 내 작품 값으로 잔금을 준비했다. 물론 대출을 너무 많이 받아서 이 건물은 은행 것이긴 하다. (웃음)

부동산 사장님도 내게 마음의 빚이 있었던 것 같다. 7~8년 전부터 항상 땅을 눈여겨보던 사람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보냈으니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계약을 하면서 부동산에서 했던 말이 “역시 땅은 임자가 따로 있나 봅니다”였다. 정말 땅이나 건물이 나와 인연이 닿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젊었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항상 나는 어떤 ‘때’를 기다리고 움직였던 것 같다. 미술을 공부하고자 한 때, 작품을 하고자 하는 때 같은 것이다. 항상 작업실과 거주공간이 함께 있는 안정적인 공간에 대한 바람이 있었다. 이 작업실을 마련하게 되면서 작업의 안정감도 얻고 있다.

▲기와와 매화를 소재로 한 작품 앞의 황란 작가 ⓒ김재성 사진기자

30대 후반의 나이에 뉴욕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IMF 외환위기까지 닥쳐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는데, 어떤 시간을 보냈는가.

한국에서 열심히 학비를 벌어서, 미국에 갔는데 IMF가 터지는 바람에 모아온 학비가 반 토막이 났다. 그 시기 대부분 한국유학생들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추세였다. 하지만 나는 돌아갈 수 없었다. 어떻게든 버텨보자는 마음으로 뉴욕에 남았고, 학비를 계속 벌면서 학교를 다녔다.

31살의 나이에 한국에서 스스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상처와 고통을 겪은 일이 있었다. 그때 지인이 ‘단양 구인사’에 가보라고 했다. 그곳에 가면 한 달은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구인사에 가서 한 달을 버티고 많은 고뇌를 했다. 절에서 내려오면서, 그 후로 굉장히 치열하게 작업했다.

90년대 초 한국에서는 회화 작업을 했다. 사실적인 작품을 많이 만들었는데, 작업을 이어갈수록 ‘나다운 것’을 표현하는 데에서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캔버스에 마포같은 천을 붙이거나, 염색, 직조 등을 하며 실험을 했다. 그런 작업 중에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실험을 더욱 이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프랑스 유학도 고민했는데, 좀 더 실험적이고 자유로운 시선을 원해서 미국을 택하게 됐다.

유학 자금으로 위기를 겪긴 했지만, 어떻게든 미국에서 버텼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경험이 참 많았다. 한국의 IMF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에선 9.11테러가 있었다. 아직도 그날의 경험은 선명하다. 당시 나는 브루클린 브릿지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하얀 재가 1년 동안 남아 있을 정도였다. 한국에서도 많은 걱정을 했고, 내 지인들 중에서도 세상을 떠난 이들이 있었다. 그 참상 한복판을 온전히 겪었고, 그것은 내게 작가로서 아주 큰 경험이었다.

▲황란, Secret Beauty, Crystals, Beads, Pins on Plexiglass, H200cm x W190cm, 2022
▲황란, Secret Beauty, Crystals, Beads, Pins on Plexiglass, H200cm x W190cm, 2022 (사진=황란 제공)

‘9.11 테러’가 작가에게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꼽았다. 최근의 ‘팬데믹’ 또한 중요한 사건으로 꼽았는데, 두 사건은 작가에게 어떤 의미인가.

인간의 실존, 본질에 대한 고민을 불러일으켰다. 9.11 테러를 맞닥뜨리고, 그 사건을 다시금 떠올려볼수록 내게 선명해지는 화두는 ‘과연 종교란 무엇일까’라는 것이었다. 9.11 테러는 오랜 종교 갈등, 석유를 둘러싼 갈등, 국가 간의 갈등까지 얽혀있는 문제였지만, 뉴욕 한복판에 서 있는 내게 9.11테러는 서방 종교와 이슬람교의 오랜 전쟁으로 촉발된 사건으로 다가왔다.

내 아버지는 절에서 신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래서 어렸을 적부터 불교를 접하고 자랐고, 불교적 사상이 내게 자리 잡게 됐다. 그런데 현재 나는 종교가 없다. 내 딸은 아주 독실한 기독교인데, 나는 1년에 한 번씩 송구영신 예배 때만큼은 딸과 항상 같이 교회에 가고 있다. 사실 부처님의 말씀도 옳고, 예수님의 말씀도 옳다. 모든 성인들의 말은 옳은 길을 향하고 있다. 그런데 왜 종교전쟁이 일어나는 것인지 고민했다. 그런 화두를 계속 파고 들어가다 보니, 내 기반이기도 한 불교에 조금 더 닿게 됐던 것 같다.

불교는 종교 전쟁을 일으킨 적이 별로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불교를 깊이 있게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불교가 지향하고 있는 것은 근원적으로 인간 본연,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봤다. 나는 내 작품이 종교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작업을 하는 방법도 끊임없이 벽을 바라보고 망치질을 하는데, 이는 불교의 면벽 수행과 비슷하다고 느낀다.

9.11테러나 팬데믹은 인간에게 아주 큰 사건들이었다. 그것들을 가까이 겪으면서 종교에서 시작해, 인간의 존엄, 본질까지 나아가 생각할 수 있었다. 내가 뉴욕에서 생활한 지 2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의 굴곡을 짚어가며 돌아보면 내 화두는 언제나 인간의 본질로 향해있었던 것 같다.

‘단추’와 ‘못(핀)’이 작품의 핵심적인 재료다. 한국에선 회화 작가로 활동했는데, 어떻게 ‘단추’라는 재료를 택해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됐는가.

어렸을 적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싶다. 나는 어렸을 적 굉장히 내성적이고 말이 없는 아이였다. 누가 시비를 걸면, 대거리도 해보지 않고 그냥 우는 아이였다. 그러다가 내가 자신감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다. 초등학생 때 종이인형 놀이가 굉장히 유행했다. 종이인형에다가 예쁜 종이옷을 입히는 놀이인데, 그때부터 옷 그림을 예쁘게 그려서 친구들한테도 나눠주면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 생각하고 보면 그게 ‘패션’의 시작이었다. 한국에서부터 나는 옷과 옷 입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결정적인 계기로 뉴욕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색채에 대한 자유로움을 갖게 됐다. 그때부터 ‘빨강’을 내 상징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학비를 벌기 위해서 내가 택한 일이 의류 회사에서 자수 도안을 그리는 일이었다. 일상적으로 항상 ‘옷’ 옆에서 머물렀던 것 같다. 당시 뉴욕에는 프리마켓이 참 많았다. 사람들이 좌판을 펼쳐놓고 실 뭉치 하나에 1달러, 가지각색의 단추들을 한 무더기 쌓아두고 5달러를 불렀다. 내게는 그것들이 모두 작품의 재료로 보였다. 저렴하게 재료들을 구입해 콜라주 작업을 시도하곤 했다. 그러다가 회사에서 단추 재고를 발견하게 됐다. 퇴근길에 보니, 사무실 한 구석에 단추가 엄청 많이 쌓여있었다. 그래서 대표에게 가서, 저 단추를 안 쓰면 나한테 싸게 팔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대표가 ‘그냥 가져가’라고 했다. 그때가 시작이었다. 회사에서 단추를 얻어 와서, 작업실에서 계속 연구했고 그렇게 내 작업이 탄생할 수 있었다.

▲황란, The Red Wind, Buttons, Beads, Pins on Wooden panel, H140cm x W110cm, 2022 (사진=황란 제공)

작품 활동 초기에는 벽면에 바로 작품을 설치했다. 전시가 끝나고 나면 작품이 아예 사라지는데, 그 과정을 ‘생의 마감’, ‘새로운 순환주기의 시작’이라고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작품을 해체하는 데에 아쉬움은 없었나.

앞서 9.11테러가 내게 큰 경험이라고 말했다. 9.11테러가 있던 날 아침, TV를 켜보니 CNN에서 빌딩하나가 무너져 내리는 것이 생중계 되고 있었다. 뒤이어 옆에 서있던 쌍둥이 빌딩으로 새까맣고 작은 것이 돌진했다. 그리고 나머지 빌딩도 무너져 내리는 데, 그 때 높은 건물 안에 있던 사람이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클로즈업돼서 나왔다. 너무나 충격적이었고, 무서웠다. 그 높은 건물에서 사람들이 떨어지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 이후 내 작품은 왜곡되고 변형된 형태를 띠게 됐다. 부처(Buddha)를 표현한 작품에서 한쪽 무릎을 뭉그러뜨리는 식으로 작품을 완성했다. 단추가 떨어지고 사라지는 형식이다.

벽 설치 작업 해체는 인간이 재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우리는 누구나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죽음을 향해가고 있다. 사라지는 것은 허무하지 않다. 원래 내 벽설치 작업은 사라지는 것이 테마이기도 했다. 처음에 내게 ‘죽음’은 굉장히 충격적이었는데, 그걸 이제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작품이 사라지는 것은 삶이 사라지는 것과 같고, 사라지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느낀다. 한 세대가 사라져야, 또 다음 세대가 등장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항상 벽 설치 작품을 해체하다보니, 작업 초기에 작품은 소장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대형 작품 설치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재료비가 필요하다. 그 이유로 소장이 가능한 프레임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크기가 작은 작업을 하고 판매를 해서, 대형 설치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판매를 하고 뮤지엄 전시를 하는 식의 현실적인 순환도 만들어나가고 있는 중이다.

뉴욕 맨해튼 페이스북 본사에 황란 작가 작품이 설치됐다. <Another Freedom>은 어떤 작품인가.

페이스북은 세계 곳곳에 사무실을 만들면서, 사옥에 그 지역 작가의 작품을 넣는다. 뉴욕 맨해튼 페이스북 본사에 작품을 넣을 수 있는 작가로 선정됐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에 선정됐고, 2020년 3월 쯤 설치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가 시작된 것이다. 페이스북에서는 “코로나가 터졌으니까 조금 연기를 하겠다”라고 연락이 왔다. 그땐 상황이 이렇게 심각해질 줄 아무도 몰랐다. 일찍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작품을 설치할 수 있을 때까지는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10m의 거대한 벽 설치 작업이었다. 처음에는 서양을 상징하는 독수리 작업을 선보이려했다. 서양 국가에서 독수리는 국기에도 자주 등장하는 좀 특별한 존재다. 동양에는 봉황이 그러한 존재라고 느꼈다. 상상의 동물로 영원의 삶을 꿈꾸게 하는 상징물이라고 생각했다. 독수리와 봉황은 내가 자주 사용하는 소재고, 각각 개별적으로 작품 안에 표현했었다.

그런데 1년이 넘는 시간동안, 집에 머물고 코로나를 겪으면서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됐다. 어마어마한 재앙을 겪고 있는 인류를 위해, 작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그 결과 독수리와 봉황을 합친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Another Freedom>은 독수리의 머리를 하고 봉황의 꼬리를 가지고 있는 하이브리드 생명체가 다양한 색깔이 엉켜있는 실 뭉치를 발로 꽉 쥐고 날고 있는 작품이다. 독수리와 봉황이 합쳐지면 전 세계가 아우러질 수 잇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팬데믹으로 인해 전 세계가 고통 받고 있는 때에 모두를 위한 공통의 힐링과 응원을 담고 싶었다.

그리고 작품에서 또 하나 주목할 곳은 새가 쥐고 있는 다양한 색깔의 실 뭉치다. 페이스북 본사 작업을 준비하면서, 핀과 핀 사이를 실로 연결하고 그를 통해 우리 인간의 네트워크 등을 담고 싶었다. 작업을 하면서 다양한 색실을 사용하고 그 실들을 연결해서 작품을 하다 보니, 어느새 작품 앞바닥에는 온갖 색들이 다 섞여있는 실뭉치들이 생겨났다. 작업을 하다가 잘려나간 실들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그 실뭉치를 보는데,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코로나가 퍼지면서, 한국은 대처를 잘 했지만 미국은 그렇지 못했다. 뉴욕에선 엄청난 사망자가 나왔고, 그 시체들을 수습하지 못해서 병원 밖에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경우도 있었다. 뉴스에서 봤던 그 장면이 작품에서 잘려나가 바닥으로 떨어진 색실들 위로 입혀졌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허무함, 죽음의 의미도 알 수 없이 그렇게 사라져버리는 인간의 생애 같은 것들이 내게로 휘몰아쳤다. 그래서 그 잘려나간 실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한 올 한 올 모두 모아서 새의 발톱에 쥐어줬다.

새는 하늘을 날아다닌다. 그 새가 우리 인간을 어디 양지바른 곳으로 데려가주길 바랐다. 뉴욕은 다양성의 도시다. 정말 많은 인종 함께 살고 있다. 그 다양한 색을 가진 실 뭉치가 뉴욕의 인간과도 같았다. 그렇게 내 나름의 경의를 표하는 작품을 완성했다. 팬데믹 시기에 작가로서 할 수 있는 행위였다.

▲인터뷰 중 작품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가는 황란 작가 ⓒ김재성 사진기자 (사진=황란 제공)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다면.

우리 삶의 짧은 찰나의 순간, 그 순간의 시간성을 얘기하고 있다. 이는 우리 인간의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본다.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권력 투쟁에 대한 이야기도 작품 안에 담기도 한다. 그런 것은 대게 기와나 궁궐로 표현한다. 권력을 지니고 있을 때는 영원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결국 권력 또한 오래된 건물처럼 무너질 뿐이다.

한국에선 대부분 ‘황란’하면 ‘매화’라고 바로 떠올리곤 하는데, 나는 ‘매화’뿐 만 아니라 샹들리에, 기와, 봉황, 독수리, 거미 등 다양한 소재의 작품 시리즈를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봉황과 독수리를 주제로 한 하이브리드 생명체에 집중하고 있다. 나는 작품 안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삶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고, 내 나름의 성찰을 담아내고 있다.

미국에서 26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활동했고, 미국과 해외를 주요 무대로 삼아왔다. 동시 작품 속 소재는 항상 한국적인 것을 택해왔다. 이유가 있을까.

내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늦은 나이에 뉴욕에 가서, 내 자신을 돌아보면서 한국에 더 매달렸던 것 같다. 앞서 말했듯이 내 작품 안에는 본질에 관한 화두가 있다. 본질적으로 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내 작품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해왔던 내 본질에 대한 이야기다. 이미지는 바뀌더라도 겪어왔던 것, 앞으로 겪을 것을 작품을 통해 만들어 나갈 것 같다.

왜 해외에서 황란 작가를 주목하는 것일까.

독창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핀에다가 저렇게 단추를 걸어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작가는 없다. 동양적 소재를 서구적으로 표현하는 작가도 드물다. 예술가는 창조성이 없으면 인정받을 수 없다.

뉴욕 휘트니 미술관의 이사인 밥 허스트가 내 작품을 구매했다고 한다. 뉴욕 첼시 갤러리에서 전시를 했을 때다. 뉴욕 휘트니 미술관의 이사라면, 가장 미국적인 작품을 보고, 전시를 준비를 했을 텐데 그 사람이 내 작품을 샀다는 건 아무래도 ‘독창성’에 이끌렸기 때문이지 않을까? 동양의 여성이 자신들의 언어와 감각으로 이런 물성 있는 작업을 하는 것이 재밌었던 것 같다. 작품이 좋든 나쁘든, 일단 그들은 내 작품 같은 것을 처음 봤고 끌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황란, Contemplation time, Paper Buttons, Beads, Pins on, Plexiglas(Wooden frame), H237cm X W115cm, 2014
▲황란, Contemplation time, Paper Buttons, Beads, Pins on, Plexiglas(Wooden frame), H237cm X W115cm, 2014

한국에서는 전시가 많지 않았다. 이유가 있는가.

2010년 학고재에서 개인전을 열고, 거의 13년 만에 한국에서 전시를 열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전속갤러리가 해외에 있다 보니 한국에 들어올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한국 전시, 해외 전시 그렇게 가름을 하진 않았던 것 같다. 작가는 국가나 지역이 관계없다고 생각한다. 인연에 따라서, 흐름이 된다면 열심히 임하고자 한다. 한국 전시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열심히 할 생각이다.

현재 계획된 전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지금 당장 눈앞에 청주공예비엔날레 전시가 기다리고 있다. 9월에 개막한다. 지금은 그것 이외에는 안 보이는 것 같다. 한국을 빛내는 전시라고 생각한다. 더욱 열심히 해보고 싶다.

2024년 베니스비엔날레 미술전의 특별전도 준비하고 있다. 베니스비엔날레 기간에는 국가관 이외에도 베니스 도시 전역에서 비엔날레재단 측의 승인을 받아 진행하는 병행 전시를 개최할 수 있다. 현재 그 특별전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 커미셔너 한 분, 외국 커미셔너 한 분이 참여해서 작가 30명 정도가 함께 한다. 한국 커미셔너는 김찬동 평론가가 맡아줬다. 본 전시만큼 큰 전시는 아니지만, 나름 중요한 전시여서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Secret Beauty> 앞에서 황란 작가 ⓒ김재성 사진기자 

어떤 예술가가 되고 싶은가.

이곳 작업실을 구하면서 결심한 것이 있었다. 내가 한 10년 열심히 작업하면, 이 작업실 대출금을 다 갚을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그런데 그 기한을 20년을 잡았다. 왜 10년을 더 늘렸느냐하면, 내가 얻은 것을 사회에 베풀면서 살아가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지난달에 영등포 문래동에 있는 아트필드갤러리에서 전시를 했다. 옛날 철공소들이 자리하고 있던 곳이었다. 그 공간에서 전시가 내게 참 좋은 경험이었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이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망치로 하나하나 핀을 박아서 작품을 완성했던 그 처음을 떠올렸다.

현재도 세이프더칠드런에 작품 수익금에 일부분으로 기부활동을 하고 있고, 뉴욕에 있는 AHL 코리안아메리칸 재단에도 기부를 하고 있다. 올해 뉴욕에 있는 한글 학교에서 경매를 연다고 하는데, 그때 내 작품도 출품해서 기부를 계획하고 있다. 내가 지금 이 자리로 오게 된 것은, 사회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최대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싶다. 내게도 재밌고 즐거운 일로 채워 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