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비평]오케스트라가 고양되는 순간②, 김홍식과 제주교향악단, 자신과의 싸움에서 역전승
[이채훈의 클래식비평]오케스트라가 고양되는 순간②, 김홍식과 제주교향악단, 자신과의 싸움에서 역전승
  • 이채훈
  • 승인 2023.06.26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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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악축제- 6월 22일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지난 22일 예술의전당, 제주특별자치도립 제주교향악단의 연주회는 흥미로웠다. 전체적으로 산만했지만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여준 빛나는 순간으로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의 기량을 갈고닦는 것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겠지만, 교향악축제의 무대는 다른 악단과 비교되는 걸 피할 수 없으니 자칫 잔인한 무대가 될 수도 있었다. 

교향악축제 연주를 축구경기에 비유하는 것을 용서해 주시기 바란다. 제주교향악단은 서울 원정경기 초반 0:2로 리드당하기 시작했다. 

1부 첫 곡은 바그너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서곡이었다. 첫 사운드에 대한 기대는 연주 시작과 함께 무참히 깨졌다. 뭉쳐야 할 파트는 뭉치지 않았고, 나눠져야 할 파트는 나눠지지 않았다. 맺고끊는 프레이징도 명료하지 않아 음악이 시종일관 와글거렸다. 

두 번째 곡은 서울시향 바순 수석 곽정선이 활약한 로시니 파곳협주곡 B♭장조였다. 로시니가 오페라에서 은퇴한 뒤인 1845년 경 제자 나자레노 가티를 위해 쓴 곡으로 알려져 있는데, 나자레노 가티가 곡을 쓴 뒤 스승 로시니의 이름을 달았을 뿐이라는 얘기도 있다. 팀파니가 등장하는 활기발랄한 작품이라는 건 유튜브를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국내 정상급의 바순 연주자 곽정선의 훌륭한 연주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빠른 스케일을 록 음악가처럼 자유자재로 노래해야 하는 어려운 곡인데, 곽정선은 모든 대목을 매끄럽게 잘 연주했다. 오케스트라는 작은 앙상블이기 때문에 어수선한 느낌이 없어서 듣기에 나았다. 그러나 이 곡이 갖고 있는 발랄하고 재기있는 느낌은 찾기 어려웠다. 음악은 시종일관 바닥을 기어가는 듯한 답답한 느낌을 떨치지 못했다. 

바순 연주자 곽정선이 연주를 마치고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바순 연주자 곽정선이 연주를 마치고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1부를 마친 제주교향악단의 성적은 0:3, 패색이 짙었다.  

2부는 브람스의 교향곡 1번 C단조. 이 심각한 작품으로 전세를 뒤집을 수 있을 것인가. 브람스가 20년 넘도록 거인 베토벤의 발걸음을 등 뒤로 느끼며 고심해서 작곡한 이 대작을 제주교향악단은 어떻게 연주할 것인가. 1악장은 브람스 특유의 짙은 음영과 묵직한 질감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 2악장은 아름다운 솔로와 목관의 음색이 살아날 듯 말듯하며 흘러갔다. 3악장은 좀더 자유롭게 놀아도 될 것 같은데 소심하고 조심스런 느낌에 갇혀 있었다. 

크게 성공하지도, 크게 실패하지도 않은 연주라고 보면, 이때까지 스코어는 여전히 0:3이었다. 

4악장 서주, 태양처럼 찬란하게 떠오르는 호른 시그널은 승패의 갈림길이었다. 자칫 삑사리라도 난다면 회복이 어려울 것 같았지만 호른 주자는 훌륭히 제몫을 다했다. ‘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Frei aber Einsam)를 뜻하는 트럼본의 시그널에 이어 알레그로, 오케스트라는 승리의 행진으로 당당히 나아갔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한꺼번에 총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화음에는 무게가 실렸고, 금관은 죽죽 뻗어나갔다. 오케스트라는 숨돌릴 틈을 주지 않고 빠르게 질주했다. 숨죽이던 청중들은 우렁찬 마지막 음의 여운이 사라지는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를 쏟아냈다. 

후반전이 끝났을 때 점수는 4:3, 제주교향악단의 역전승이었다. 

제주교향악단 김홍식 지휘자와 단원들이 연주를 마치고 관객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제주교향악단 김홍식 지휘자와 단원들이 연주를 마치고 관객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제주교향악단은 뒤로 갈수록 실력을 발휘했다. 초반에 미흡했던 바그너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한번 더 하면 훨씬 더 잘하지 않을까 싶었다. 앵콜곡은 차이콥스키 <호두까기인형> 중 ‘꽃의 왈츠’, 목관의 관능적인 선율과 하프의 황홀한 패시지에 이어 흥겨운 왈츠는 청중들을 만족시켰다. 

앵콜곡으로 제주교향악단은 1점을 추가했고, 최종 스코어는 5:3 승리였다. 

지휘자 김홍식은 축구팀의 감독처럼 의연했다. 넉넉하고 유머러스한 제스처로 오케스트라의 마음을 다독이며 청중들의 호감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오케스트라의 집중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중심을 유지했고, 단원들을 끝까지 격려하며 마지막 순간에 분발할 수 있도록 잘 이끌어 주었다. 돌이켜보건대 브람스 교향곡 4악장에서 제몫을 훌륭히 다해 역전의 계기를 만든 호른 주자의 공이 컸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 제주교향악단의 잠재력을 보여준 모든 단원들은 서로 칭찬해 주어도 좋을 듯하다. 오케스트라가 고양되는 한 순간은 참 근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