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비평]차이콥스키 5번, 김선욱과 경기필의 찬란한 음악적 승리 
[이채훈의 클래식비평]차이콥스키 5번, 김선욱과 경기필의 찬란한 음악적 승리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3.06.27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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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거장 김선욱, “지휘자는 연주 실력만큼 지휘“ 입증
김두민의 슈만 첼로협주곡, 서정적 감성으로 청중 사로잡아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지난 24일, 찜통 더위를 뚫고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들어서니 시원했다. 조명이 어두워지니 이제 밤인가 싶었다. 김선욱 지휘 경기필하모닉의 첫 곡은 멘델스존 <한여름밤의 꿈> 서곡, 이 날씨에 잘 어울리는 선곡이었다. 꿈꾸는 듯한 목관의 화음에 이어서 환상적인 현악의 패시지가 펼쳐졌다.

김<한여름밤의 꿈>에 몰입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경기필의 잘 다듬어진 사운드와 음색, 밸런스, 다이내믹은 훌륭했다. 현악과 드럼이 대화하고, 목관과 팀파니가 앙상블을 이루는 대목도 선명하게 들려서 흡족했다. 종반으로 갈 때 포르티시모로 끝나는 듯하다가 현악 패시지로 이어지는 대목은 좀더 강한 열정(fire)과 대조가 아쉬웠다. 

이 날 레퍼토리는 낭만시대의 주옥같은 작품들로 구성했다. 두 번째 곡은 첼리스트 김두민이 협연한 슈만 첼로협주곡 A단조였다. 클라라 슈만이 “낭만성, 참신함, 유머가 있고 첼로에 걸맞는 울림과 정감이 가득한 곡“이라고 설명한 이 작품은 휴식없이 이어지는 세 악장으로 사랑과 고뇌를 노래한다. 김두민은 이 곡을 짙은 서정성으로 연주하여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오케스트라의 현악 앙상블과 첼로 솔로가 대화하는 대목들은 지극히 아름다웠고, 실내악의 느낌을 주는 완벽한 호흡이 인상적이었다. 바이올린, 비올라 파트의 피치카토가 다소 소심한 것은 아쉬웠다. 그냥 편안하게 연주하면 자연스레 ‘p’(여리게)로 들릴텐데, 소리를 작게 내려고 애쓰다 보니 객석에서 잘 들리지 않았다. 

첫 앵콜곡은 김두민과 오케스트라 첼로 주자 3명이 함께 한 슈만의 <트로이메라이>였다. 솔로이스트와 오케스트라의 벽을 허물고 첼로 사랑을 나누는 마음이 흐뭇하게 전해졌다. 두번째 앵콜곡은 바흐 무반주 첼로모음곡 3번 C장조의 ‘부레’였다. 김두민의 무대는 첼로 협주곡, 첼로 앙상블, 첼로 솔로 등 다양한 메뉴로 차린 푸짐한 잔치상이었다. 

이날 메인 연주곡은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E단조였다. 1부에서 들려준 섬세하게 잘 다듬어진 앙상블에 금관과 타악의 포효를 더하면 어떤 효과가 날지 궁금했는데, 실제 연주는 기대 이상으로 찬란했다. ”무릇 지휘자는 자신의 연주 실력만큼 지휘한다“고 하는데, 김선욱은 빼어난 피아니스트답게 오케스트라를 그랜드피아노처럼 능수능란하게 다루면서 모든 파트의 연주자를 한명한명 존중하는 세심함을 보였다. 

1악장에서 경기필의 파트 수석들은 고르게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고, 완벽하게 일치된 호흡으로 감동을 주었다. 현악이 열정적으로 노래하는 제2주제 경과구는 섬세한 감정 표현에 집중한 결과 강약 굴곡이 심해서 열광적인 느낌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 다소 아쉬운 대목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탄탄한 구조와 흐름을 잘 그려낸 연주였다. 오케스트라 음악가들의 연주 모습도 근사했다. 파트 수석들은 자기 패시지를 연주할 때 자연스레 음악적인 율동을 펼쳐보였다. 현악은 파도처럼 물결치며 아름답게 노래했고, 관악기들은 깨끗한 음색으로 때로는 화염을, 때로는 폭포수를 뿜어냈다. 

2악장의 아름다운 호른 패시지는 청중들의 마음에 달콤하게 스며들었고, ‘운명의 동기’가 변형되어 나타날 때 청중들은 숨소리를 죽일 정도로 몰입했다. 왈츠 3악장은 꿈처럼 흘러갔고 휴식 없이 4악장 승리의 행진곡이 시작됐다. 이 찬란한 피날레에서 김선욱과 경기필은 압도적인 힘과 화음으로 청중들을 열광시켰다. 종반, 모든 악기가 연주를 멈춘 뒤 승리의 코다로 나아갈 때 김선욱과 경기필은 벼락처럼 몰아쳤다. 코로나와 불경기와 답답한 세상사에 억눌렸던 청중들은 마음속 깊이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2023교향악축제에 참여한 경기필하모니가 연주를 마치고 객석에 인사하고 있다.
▲2023교향악축제에 참여한 경기필하모니가 연주를 마치고 객석에 인사하고 있다.

앵콜곡은 차이콥스키 오페라 <오네긴> 중 폴로네즈였다. 치밀하게 구성된 교향곡에 이어서 ‘멜로디의 천재’ 차이콥스키의 자유분방함을 만끽하게 한 유쾌한 선곡이었다. 이날 연주는 젊은 실력파 지휘자 김선욱과 경기필이 이루어 낸 음악의 승리로,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해외 투어와 레코딩, 그리고 리카르도 무티, 핀커스 주커만 등 세계의 거장들과 호흡을 맞추며 기량을 닦아온 경기필의 내공을 유감없이 보여준 자리였다. 훌륭한 연주를 해 낸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만족감과 성취감은 대단할 것이다. 

차이콥스키 선생께서 이 연주회 자리에 계셨으면 무척 흡족하셨을 것이다. 그는 늘 모차르트를 찬탄하며 "나는 왜 이렇게 작곡을 못할까" 탄식하셨는데, 이날 연주를 들으셨다면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며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다. “내가 이렇게 작곡을 잘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