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6.25전쟁과 한국의 춤
[성기숙의 문화읽기]6.25전쟁과 한국의 춤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3.07.04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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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매년 어김없이 찾아오는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이 터진 6월이면 늘 생각나는 무용계 인물들이 있다. 한동인, 김민자, 조동화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한국발레의 개척자 한동인의 납북 정황, 세계적 무희로 한 시대를 풍미한 신무용가 최승희의 제1호 제자 김민자의 한 맺힌 절규 그리고 전시(戰時) 체제에서 활동한 세계 유일의 무용단체 한국무용단의 리더 조동화의 목숨 건 피난기 등을 떠올린다. 이들이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아남은 것 자체가 어쩌면 한 편의 드라마라할 수 있다.    

한국발레의 개척자, 한동인의 납북 정황 

일본 유학파 출신 한동인(韓東人, 1922~ ?)은 도쿄에서 러시아 정통 황실발레를 체득하고 귀국한 후 서울발레단을 창단했다. 최초의 직업발레단으로 기록되는 서울발레단은 매년 정기공연을 통해 서양 고전발레와 창작발레 등을 무대에 올렸다. 발레라는 용어 자체가 낯설던 시절의 얘기다. 그는 한국발레의 진정한 선구자로 손색이 없다.

한동인의 존재를 처음 안 것은 1990년대 초반 무렵이다. ‘해방공간 무용의 사적 전개’를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면서 당시 무용계 원로 선생님을 찾아 뵙고 여러 말씀을 들었다. 기록에도 없는 생생한 증언을 들으며 전율했던 기억이 새롭다.   

예컨대, 조동화, 박용구, 정병호 등 평론가를 비롯 송범, 임성남, 김문숙, 조광 등 원로무용가를 만나 증언 채록을 했다. 멀리 필리핀 마닐라에 거주하던 이인범 선생과도 연결되어 여러 차례 국제전화로 귀중한 증언을 들었다. 선생은 소장하고 있던 서울발레단 공연팸플릿을 국제우편으로 보내주는 등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  

1999년 한국미래춤학회(회장 송수남 단국대 교수) 주최로 열린 학술세미나 “우리 춤의 선구자를 말한다”에서 한동인을 다뤘다. 한동인을 주제로 한 무용계 첫 논문으로 주목을 끌었다. 결정적으로는 2003년 “무용가를 생각하는 밤-한동인 편”에서 보다 심화된 논의가 있었다. 근현대 한국무용사에서 저평가된 그의 존재론적 위상이 온전히 밝혀지는 계기였다. 

한동인이 한국무용사에서 소외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가 월북무용가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무용가를 생각하는 밤-한동인 편” 발제에서 그를 월북(越北)이 아닌 납북(拉北)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전향적 시각이었다. 월북은 자발적 의지의 선택이고, 납북은 타자의 강요에 의한 북행이기에 해석상 큰 차이가 있다. 월북이냐 납북이냐는 당사자의 이데올로기를 가늠짓는 잣대가 되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알다시피, 분단 이후 반공이데올로기로 말미암아 월북예술가를 입에 올린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월북예술가’는 일종의 금기어였다. 한동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한동인에 대한 뒤늦은 관심은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객관화할 기록이 부재한 상황에서, 더욱이 월북무용가로 인식된 한동인을 집요하게 발굴하여 ‘공론의 장’에서 논의하게 된 것은 조동화 선생의 영향이 컸다. 선생은 역사 속 소외된 무용가를 발굴, 조명하여 한국무용사에 온전히 위치시켜야 한다고 늘 역설했다.     

조동화 선생이 건내 준 주소를 들고 수원에 살고있는 한동인의 가족을 찾아 나섰다. 3남 3녀의 형제자매는 모두 작고하고 맨 위 누나와 막내 여동생만이 생존해 있었다. 가족들의 증언을 통해 유년시절과 유학, 그리고 귀국 후의 활동 등 한동인의 인생 전반기에 대한 생애사를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베일이 쌓여있던 북행 당시의 정황도 차츰 윤곽이 드러났다. 그가 월북이 아닌, 납북됐음을 깨닫게 된 것은 큰 소득이었다.

6.25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 한동인은 ‘인어공주’라는 창작발레무용극을 공연중이었다.  1950년 6월 24일 첫 공연을 성황리에 마친 단원들은 이튿날 아침 일찍부터 극장에 나와 공연준비로 분주했다. 6월 25일 ‘인어공주’ 공연 둘째 날 새벽 북한 인민군의 남침이 개시됐다.  정오 무렵 인민군이 쳐들어와 서울이 장악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단체는 즉시 해산되었고, 단원들은 급히 귀가했다. 한동인 또한 서울 사직동 집으로 서둘러 돌아온다. 

한동인은 남쪽으로 피난가라는 가족들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남기로 한다. 연로한 부모님을 전쟁의 불바다에 놓아두고 혼자 살겠다고 떠날 수는 없었던 게다. 형제자매들을 한강 이남으로 피난시키고 자신은 부모님이 계시는 사직동 집에 눌러 앉았다. 금새 서울은 온통 인민군 소굴이 되었다. 피난갈 타이밍을 놓친 그는 인민군에 포위된 채 사직동 집에 딸린 연습실 벽장에 숨어 지낸다. 

그러나 그리 오래지 않아 촘촘한 감시망에 걸려들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자유청년단 소속 청년의 밀고로 부모님과 여동생이 보는 앞에서 인민군에게 끌려나갔다. 현장을 지켜본 막내 여동생이 그후 두 번 정도 보았을 뿐 그해 8월 이후 한동인은 영영 자취를 감추었다. 그후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채로 통곡의 밤을 지새우며 반세기를 지나왔다. 가족들은 생이별의 아픔을 안고 쉬쉬하며 살았다. 연좌제가 살아 숨쉬된 엄혹한 시절이었다.

1980년대 후반 월북예술가에 대한 해금 조치가 단행되었다. 오빠 한동인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한 막내 여동생이 혹시나 하고 월간 『춤』지로 조동화 선생을 찾아왔다. 조동화 선생은 그때 적어놓은 한동인 가족의 주소를 내게 건내주셨다. 주소 한 장 들고 수소문 끝에 수원에 살고 있는 한동인의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6.25전쟁의 흐름과 송범의 증언 그리고 가족들의 기억을 토대로 퍼즐을 맞춰 보면, 한동인은 납북된 것으로 보인다. 남침을 계획한 인민군은 부대 소속 공연단체를 조직한다. 1950년 6월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인민군협주단, 내무성협주단, 경비대사령부협주단 등을 거느리고 있었다. 

한편,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을 임의로 끌어 모아 급조된 단체도 있었다. 예술인들은 기동선전선동대로 편성되어 최전선에 투입된다. 많은 예술가들이 자의적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인민군 선전선동대에 참여하게 된다. 함귀봉무용연구소, 장추화무용연구소, 한동인의 서울발레단 등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스승을 추종하던 젊은 무용가들은 영문도 모른채 이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적지 않은 숫자가 전후 사정도 모른 채 북으로 끌려갔다. 한국무용사의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인민군의 狂氣, 절규하는 김민자 

1994년 3월 23일, 과천 주공아파트 자택에서 들려준 송범의 증언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다.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한동인이 납북됐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국립무용단장을 지낸 송범은 해방직후 신무용가 장추화의 문하생으로 입문하여 서울 동숭동에 위치한 스승의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익혔다. 송범의 증언은 당시 절박했던 정황을 밀도있게 전한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그의 전언에 의하면, 1950년 9월 24일 아침, 장추화는 제자 송범에게 전화하여 다급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을 남겼다. 

“송군,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오늘은 움직이지 말고 집에 있어. 우리 모두 북으로 끌려갈 것 같애. 송군은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지 말고 사회 혼란이 수습될 때까지 초연하게 지내다가 전쟁이 끝나거든 그때 가서 춤을 추게” 

이것이 송범이 스승 장추화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송범에 의하면, 당시 정황상 스승을 추종하던 신진무용가들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전쟁 중 인민군 소속의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명령에 따라 반강제적으로 끌어갔다는 것이다. 당시 약 6,70여명에 달하는 무용가들이 납북되었다고 추정한다. 

신무용가 김민자(金敏子, 1913~2012)의 증언은 6.25전쟁의 광기(狂氣)를 더 한층 실감케 한다. 경기고녀 출신 김민자는 재능이 출중하여 일찍이 최승희의 후계자로 손꼽혔다. 해방 직전 귀국하여 일본 유학 중 만난 연인 김태철과 결혼한다. 일본 동북제대 법학과 출신인 남편 김태철은 서울시 검사로 재직했다. 검사라는 지위는 최고 엘리트로 통했다. 인민군에게 잡히는 순간 즉석 총살감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종로구 원서동 99칸짜리 한옥으로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김민자는 눈 앞에서 인민군에게 끌려가는 남편을 그저 숨죽이고 지켜봐야 했다.  

그후 남편의 행방은 묘연했고, 북으로 끌려갔다는 얘기를 풍문으로 들었다. 남편이 끌려간후 김민자는 희망을 잃고 집을 떠나 스승 최승희의 가회동 옛집에서 숨어 지낸다. 그곳에서 인민군협주단 문화공작대 소속으로 남하한 최승희의 딸 안성희와 극적으로 재회한다.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의 눈물을 흘렸다. 

짐작컨대, 안성희가 당시 서울로 내려온 이유는 두 가지로 가늠된다. 우선은 인민군협주단 문화공작대 활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울에 있는 김민자를 북으로 데려오라는 임무 수행이었다. 후자 북한의 유인에 김민자는 단호했다. “네 형부는 너희 인민군이 총으로 쏴 죽였다”고 고함치며 절규했다. 그후 김민자는 국군 소속 군예대(軍藝隊)에 잠시 몸담았다. 북진(北進)이라도 하게 되면 북한 땅에서 혹시 인민군에게 끌려간 남편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희망 섞인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1953년 7월 27일 휴전과 함께 김민자의 희망과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후 김민자는 무용계를 은퇴하고 불가(佛家)에 귀의했다. 경기고녀 출신 사촌언니가 주지스님으로 있는 서울 성북구 안암동 영산법화사(靈山法華寺)에 귀의하여 은둔생활을 하다가 지난 2012년 99세를 일기로 쓸쓸히 일생을 마쳤다.

김민자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00년 겨울이었다. 『춤』지 조동화 선생이 건내준 주소를 들고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뒷산에 있는 작은 사찰 영산법화사로 향했다. 선생은 조동화라는 이름 석자를 듣자마자 나의 두 손을 꼭 잡고 감격에 겨워했다. 백발의 왜소한 모습이지만 눈빛 만큼은 초롱초롱 빛났다.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후 여러 차례 면담조사하였고, 학술세미나를 통해 선생의 업적을 되새겼다. 

김민자는 명문사학 경기고녀를 졸업한 엘리트 무용가다. 우연한 기회에 최승희 무용공연을 접하고 이에 매료되어 그의 문하생이 된다. 1933년 스승 최승희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시이 바쿠(石井漠) 문하에서 모던댄스를 익히고 엘리아나 파블로바에게 러시아 황실발레를 체득했다. 아담한 체구의 조선여인상을 한 김민자는 최승희에겐 더 없이 훌륭한 듀엣 파트너로 없어서는 안되는 특별한 존재였다. 

그의 안무작 ‘봄처녀’는 신무용사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시인 정지용은 김민자를 일컫어 ‘새매 같은 예풍(藝風)을 지닌 무용가’라 칭송했다. 한마디로 미래가 촉망되는 기대주였다. 그러나 6.25전쟁은 김민자의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렸다. 해방된 조국에서 비약을 꿈꾸던 그의 예술은 6.25로 인해 멈춰섰다. 6.25라는 전쟁의 광풍에 휩쓸려 산산이 부서진 삶과 예술이 복원되어 세상 빛을 쬘 수 있었던 것은 조동화 선생의 일깨움 덕분이라 하겠다.  

한국무용단, 세계 유일 戰時의 무용단체

조동화(趙東華, 1922~2014)는 함경도 회령 출신으로 해방이후 언론인이자 무용평론가로 활동하며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1976년 월간 『춤』을 창간하여 전문춤평론시대를 열었다. 춤의 지성화를 견인하였고 사회적 위상강화에 크게 기여했다. 스스로 이산가족이었던 선생은 매년 6.25를 맞는 감회가 남달랐다. 조동화 선생이 겪은 6.25 또한 영화의 한 장면에 버금갈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한 지 1개월만에 국토의 90%가 인민군에게 점령당한다. 국군의 사기진작과 국민 위로를 목적으로 예술가들이 대거 참여한 문화공작대(文化工作隊)가 조직된다. 문화공작대는 그해 11월 시공관에서 공연을 갖고 흩어진다. 1950년 9월 유엔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하며 파죽지세로 몰아붙였으나 그해 11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은 다시 적의 손아귀로 넘어간다. 

이른바 1.4후퇴다. 1951년 1월 사람들은 앞 다투어 피난길에 올랐고, 무용가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조동화는 20여명의 무용가를 모아 한국무용단을 결성하고 국방부 정훈국 소속으로 편입하여 남쪽으로 향한다. 힘겹게 올라탄 화물열차는 경사길을 오르지 못하고 멈춰 선다. 열차에서 내려 거친 땅을 걸어야 했다. 어두운 터널 통과 때엔 콘사이스영어사전을 불살아 어둠을 밝히며 겨우 대구에 도착한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본능적으로 발휘된 조동화의 재치있는 발상으로 대한민국의 미래 무용계를 책임질 젊은 인재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단장 조동화를 비롯 김진걸, 김문숙, 주리 등이었다.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함께 죽음의 사선을 넘어왔기에 소위 동지애가 남달랐다. 

한국무용단은 폐허가 된 피난지 대구에서 공연을 계속 이어갔다. 전시(戰時) 체제에서의 무용 공연활동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드물다. 한국무용단 출신들은 전후(戰後) 황무지가 된 무용계 재건에 앞장섰다. 살아남은 자의 당연한 책무이자 사명이라 여겼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까지 약 3년간 지속된 6.25전쟁으로 한반도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국토의 80%가 파괴됐고, 약 200만명이 사망 또는 실종됐다. 국군과 유엔군 희생자는 약 62만 명에 달한다. 이분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며칠 전 6.25전쟁 73주년 행사에서 ‘켈로부대(KLO·Korea Liais on Office) 출신 참전용사 이창건 옹(93세)이 한동훈 법무장관에게 전한 손 글씨로 쓴 쪽지가 단연 화제다. 켈로부대의  ‘버림받은’ 희생에 대한 국가의 뒤늦은 공식 인정에 감사한 마음을 담았다. “북한에 침투했다가 휴전되면서 돌아오지 못한 동지들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는 노병의 말씀은 실로 감동적이다. 참전용사의 숭고한 희생 앞에 새삼 숙연해진다. 

6.25전쟁이 남긴 상흔을 곱씹는다. 민족사적 비극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나아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한 분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납북무용가로 낙인 찍혀 동토의 땅을 떠도는 춤의 영혼들을 상기해본다. ‘강요된 침묵’을 깨고 그들의 존재를 발굴 조명하여 한국무용사에 온전히 위치시키는 일, 자유와 번영 그리고 풍요를 누리며 사는 우리 세대의 몫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