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상처입은 용’ 윤이상 Ⅱ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상처입은 용’ 윤이상 Ⅱ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3.07.26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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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지난호에 이어>

중앙정보부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자살을 기도한 윤이상.

인류의 지성과 문화를 부정하는 박정희 정권의 폭거에 세계의 음악가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윤이상을 석방하라는 호소문에는 스트라빈스키, 슈톡하우젠, 리게티, 클렘페러, 카라얀 등 181명의 세계적 음악가들이 서명했다. 칠레의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항의 표시로 서울 연주회를 취소했다. 서독 정부도 발벗고 나섰다. 한국 정부가 야만적 행동을 멈추지 않으면 문화 교류는 물론, 예정돼 있던 차관을 지급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박정희는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납치 사실을 절대 발설하지 말 것, 재판의 세부사항을 언급하지 말 것, 한국에 대해 부정적인 언사를 하지 말 것”을 요구했고, 이를 무시할 경우 “적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협박한 뒤 윤이상을 독일로 추방했다. 맨발로 지옥의 가시밭길을 지나 정신과 육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윤이상은, 1969년 3월 30일 밤 10시경 베를린의 집으로 돌아왔다. 

윤이상은 훗날 이렇게 회상한다. “그때까지 나의 예술적 태도는 비정치적이었다. 그러나 1967년의 그 사건 이후 박정희와 김형욱은 잠자는 내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격으로 나를 정치적으로 각성하게 하였다. 나는 그때 민족의 운명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악한(惡漢)들이 누구인가를 여실히 목격하였다.” (이수자 <내 남편 윤이상> 하, p.14~p.15)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은 1967년 가을부터 1968년 2월까지 5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작곡했다. 감옥의 늦가을과 겨울은 추웠다. 그는 언 손을 입김으로 녹여가며 음표를 써내려갔다. 차가운 형무소에 앉아 있는 게 현실이 아니라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간첩, 국가전복, 이런 어마어마한 정치적 조작에 대해서는 “허튼 소리 말라! 모두 한 마리 나비의 꿈과 같이 허망한 것이다!” 외치고 싶었다. 이 기막힌 현실을 스스로 한 마리 나비가 된 것처럼 은유로 표현한 것이다. 막이 오르면 나비의 군무가 펼쳐지고 합창이 울려 퍼진다. “백년광음은 한 마리 나비의 꿈과 같고, 오늘 봄이면 내일 꽃이 시든다.” 장자는 수레에 앉아 책을 읽으며 방랑길을 떠나고 아내는 살림도구를 수레에 얹은 채 울고불고 푸념하면서 따라간다. 오페라는 삶과 죽음을 너머 너와 내가 합일하는 무위(無爲)의 경지를 노래한다.   

윤이상은 이 오페라의 악보를 중앙정보부가 압수해서 찢어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악보는 당국의 검열 끝에 살아남았고, 부인 이수자 여사가 독일로 가져갔다. 1969년 2월 뉘른베르크 오페라 극장에서 열린 초연은 엄청난 성공이었다. 청중들의 갈채 때문에 31차례나 막이 다시 올라갔고, 뉘른베르크는 축제의 밤이 됐다. 윤이상은 아직 서대문형무소에 있었기 때문에 <나비의 미망인>, 그 역사적인 초연을 볼 수 없었다. 

작곡가 윤이상은 원숙기에 접어들고 있었고, 독일 사람들은 그의 예술을 존경했다. 1972년, 뮌헨 올림픽 개막 축전에서 새 오페라 <심청전>이 공연됐다. 동양적인 효(孝)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낳는 기적, 그리고 세상의 눈먼 자들이 모두 눈을 뜨는 해방의 세계…. 이 오페라는 유럽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감격하고 자랑스러워할 만한 쾌거였다. 그러나 조국은 옹졸했다. 뮌헨 올림픽이 열린 1972년 가을, 박정희는 10월 유신이란 쿠데타를 단행하여 영구집권을 선언했다. 이듬해, 박정희의 중앙정보부는 일본에서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납치, 살해하려 했다. 윤이상은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그는 해외 민주 단체의 일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한국의 정치현실에 대해 거침없이 발언했다.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윤이상의 태도는 점점 적극적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윤이상의 본령은 여전히 음악이었다. 그는 분단의 벽에 부딪치며 몸부림치는 고통스런 마음을 첼로 협주곡에 담았고, 평화와 인권을 위한 음악회를 잇따라 열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남과 북으로 갈라진 조국은 상처 입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18일, 베를린의 집에서 TV와 라디오를 켜 놓고 있던 그는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학생들이 무참히 곤봉에 맞아 피흘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군인들이 노인, 부녀자 가릴 것 없이 살상하며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는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을 작품으로 쏟아내야 했다. 마침 서독 방송사인 WDR에서 관현악곡을 써달라고 위촉했다. 윤이상은 광주 학살을 전세계에 알리고 역사에 남김으로써 모든 독재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 예술성을 유지하면서도 음악만 들으면 누구나 광주의 비극을 이해할 수 있도록, 비교적 쉽게 작곡했다. 이렇게 태어난 <광주여 영원히!>는 1981년 5월, 쾰른의 WDR 오케스트라가 세계 초연했다. 

1부는 궐기와 학살이다. 시작하는 C음은 용감한 젊은이들의 궐기를 의미한다. 조류처럼 파도쳐 오르내리는 현악기군은 궐기한 민중을 의미한다. 이들은 서로 엉키어서 곡을 절정으로 이끌어간다. 2부는 기나긴 진혼으로, 묘지의 정적과 슬픔의 조사(弔詞)다. 3부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정의를 향한 행진이다. 가슴 속에 고동치는 새로운 투쟁의 시작이다.   

▲4.19 때 피에 묻혀 뒹구는 청년학생들을 생각하며 라디오 앞에서 펑펑 울었던 윤이상. 20년 뒤 일어난 광주 학살을 보며 그는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그의 온몸을 파고들었다.
▲4.19 때 피에 묻혀 뒹구는 청년학생들을 생각하며 라디오 앞에서 펑펑 울었던 윤이상. 20년 뒤 일어난 광주 학살을 보며 그는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그의 온몸을 파고들었다.

 
조국의 남쪽은 그를 학대하고 추방했다. 1982년, 제7회 대한민국 음악제가 윤이상 음악의 밤을 마련했다. 그의 음악이 남쪽에서 15년만에 부활하게 됐지만, 정작 작곡자는 입국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남에서 배척한 윤이상을 북쪽이 불러서 융숭히 대접했다. 평양의 국립교향악단이 혼신의 열정을 다해 그의 작품을 연주하고 녹음했다. 1984년에는 평양에 윤이상 음악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그는 순박한 심성의 음악가였다. 자기 음악의 가치를 인정하며 아낌없이 후원해 주는 사람에게 고마움과 친근함을 느끼는 건 인지상정이었다. 그의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7)는 우리 민족에게 바치는 윤이상의 절절한 호소와 충정이었다. 이 작품은 통일 조국에서 연주하는 게 이상적이었지만, 부득이 평양에서 초연됐다. 

1994년, 남쪽의 몇몇 뜻있는 분들이 윤이상 음악제를 추진했다. 77살 노인 윤이상은 조건이 허락되면 한국을 방문하고 싶었다. 고향 땅을 밟는다는 것은 조상에 대한 자식의 도리고, 예술가로서 짓밟힌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기도 했다. 한국은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인식 수준은 여전히 저열했다. 윤이상은 방한을 허락해 달라는 청원서를 대통령 앞으로 보내야 했고, 총리는 “지난 날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서 미안하며, 앞으로 예술에만 전념하겠다고 밝힐 것”을 요구했다. 국가 폭력의 희생자 윤이상에게 국가가 사과하고 용서를 빌기는커녕, 오히려 반성문을 요구하는 꼴이었다. 

이리하여 윤이상이 고향땅을 밟을 마지막 기회는 사라졌다. 그는 이듬해, 1995년 11월 3일, 머나먼 이국 땅 베를린에서 78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9살까지 조국에서 살았고, 그 후 39년 동안 유럽에서 활동한 윤이상, 그의 영혼은 지금도 한반도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더 많은 평화, 더 많은 아름다움, 더 많은 순수와 온정을 이 세상에 지어 나르는데 온 생애를 바쳤다. ‘상처입은 용’ 윤이상, 그는 분단과 독재의 상처에 몸부림친 자신의 음악을 이렇게 설명했다. 

“음악은 특권자들을 위한 성찬식탁 위의 금잔에 담긴 향내 나는 미주(美酒)의 역할만을 할 수가 없다. 음악은 때로는 깨어진 뚝배기 속에 선혈(鮮血)을 담아 폭군의 코앞에다 쳐들고 그 선혈을 화염으로 연소시키는 강한 정열을 뿜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