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의 미술현장 크리틱] 유현미의 예술사진: 회화-사진, 사진-회화 에디션 없는 사진
[이은주의 미술현장 크리틱] 유현미의 예술사진: 회화-사진, 사진-회화 에디션 없는 사진
  • 이은주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 승인 2023.07.26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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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초기 사진의 등장은 회화술의 그림자로 작동했다. 유현미의 사진은 회화가 먼저다. 사진을 기술 매체로 인식했던 ‘회화에서 사진으로’라는 역사의 궤도를 전복시킨다. 최종 결과물이 사진이다. 사진에서 회화를 인식하게끔 한다.

유현미는 사진과 회화의 경계에서 미묘한 줄타기를 해왔다. 이번에 새롭게 제작한 작품 역시 회화와 사진의 경계 탐구를 증폭시킨다. 이전까지는 회화에서 사진으로 이행하는 방향성을 가졌다면 이번 신작은 사진-회화, 회화-사진이다. 사진 결과물 위에 회화의 붓 터치로 작업을 완성하니 에디션은 없다. 관객은 곧바로 혼돈한다. 이게 사진인가? 회화인가? 유현미의 작업은 이렇게 얄궂다. 사진인가 보니 회화인 것 같고, 회화로 규정하자니 화면 속 대상은 온통 설치 작업이다. 단일체계로 해석 불가능한 이런 모호함은 ‘예술사진’의 바람직한 요소로 작동될 수 있다.

이 작업을 정확히 해석하려면 작업을 완성하기 위한 노동의 과정을 중층적으로 탐험해야 한다. 회화, 사진, 설치, 퍼포먼스 등의 매체를 자유자재로 혼용시켜 사용하는 까닭이다. 회화론, 사진론 등 하나의 정립된 전통적 장르 이론으론 완전한 해석이 불가능하다. 사진 매체만의 특성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없다.

이런 이유로 유현미의 사진은 사진이론으로 규정될 수 없는 사건들을 꺼내든다. 다층적 작업 앞에 이미 축적한 지식은 오갈 때 없이 초라하다. 사진 한 장에 매체적(회화·사진·설치·퍼포먼스등)혼합성과 시공간의 재편문제까지 압축시켰다. 이러한 혼재성은 해석하는 사람에게 항상 긴장감을 유발시킨다. 코로나 19로 세상과의 소통이 단절되니 유현미는 그림보다 소설을 먼저 썼다. 사진작가가 소설을 썼다는 것. 그 소설을 통해 유현미는 세상과 더 강력한 소통의 의지를 피력한다. 소설 발표 이후 전시를 연 것도 그 까닭이다.

작년에 발표한 소설 『적(敵)』은 그림과 소설로 단절된 세계를 강력히 붙든다. 이미지는 소설의 본질을 극도로 상상케 한다. 소설과 그림 사이 그 간극은 분명하다. 이미지가 글의 보조는 아니라는 뜻이다. 각각의 장르(소설과 그림)에서 각기 다른 사고를 이끈다. 독립적으로 읽고 봐도 손색이 없다. 한 작가를 하나의 이미지로 기억하고(강박시키고) 그곳에 박제시키는 평론문화에 경종을 울린다.

▲유현미, 연극이 끝나고 난 뒤 No.2, 162x112cm,  Oil and inkjet print on canvas, 2023, 작가제공 

2000년대 중·후반부터 유현미는 다큐멘터리의 암묵적 규칙을 깨고 현대사진의 지평을 확장 시킨 작가로 평가받아왔다. 사진 매체에 동시대성을 적극적으로 부여한 셈이다. 소설도 이 시기쯤부터 쓰기 시작했다. 현대적 의미의 ‘행위’는 설치, 회화, 퍼포먼스 등의 장르 경계를 뛰어넘는다. 디지털 매체 시대 이후 ‘미술가가 만드는 사진’이 많아지면서 사진과 다른 장르와의 교섭과 충돌로 예술사진 논의가 증폭되었다. 유현미의 사진은 그 중심에 서 있다. 이러한 논쟁도 20년이 지났다. 이제 또 다른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소설 『적(敵)』을 출간은 그간의 작업 과정과는 또 다른 울림이 있다.

내러티브가 가득한 사진.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하는 공간, 물감으로 칠해진 사물. 갤러리 나우에서 개최된 《유현미 개인전:적(敵), 2023.4.5.~4.27.》은 그간의 매체 실험이 더욱 극대화했다. 이번 작품은 설치, 회화, 사진이라는 과정 위에 다시 회화의 붓 칠로 완성했다. 사진과 회화를 둘러싼 작가의 오랜 사유의 궤적을 층층이 구축시켰다. 이 작업은 회화일 수도 있고, 에디션 없는 사진일 수도 있다. 『적(敵)』은 끊임없이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그 끝이 어디인지 결론지을 수 없는 세상을 보여준다. 한 개인이 끝도 없이 고군분투하는 여정을 보여준다. 소설은 실제 미술계에 몸 담고 있는 사람들의 오랜 관습적 태도를 돌아보게 한다. 새로운 작업을 감상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존에 습득한 지식과 정보를 모두 백지로 돌려보내야 한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다. 과연 예술가만 이 의식을 짊어져야만 할까? 의식의 흐름을 감각하고 그것을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 평론가의 역할이라면, 작가가 고민해 온 그 사유의 흔적을 다시 짚어야 한다. 작업을 향한 새로운 해석을 이끌기 위해 작가는 언제나 조용히 투쟁한다.

사진은 회화가 모방해온 세계를 추적했다. 유현미는 사진개념이 추적해 온 역사적 관점을 해체 시킨다. 유현미는 사진은 회화니, 사진이니 하는 논쟁에서 벗어나 소설 속 이야기로 대치시켰다. 유현미는 소설을 쓴다. 그림을 그린다. 공간을 찍는다. 그리고 다시 또 그림을 그린다. 사진 결과물을 위해 여러 층위의 행위가 압축되어있다. 그 행위의 과정을 통한 결과는 계속 변한다. 그리고 관객은 끊임없이 질문한다.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