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비평]발레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 K-발레의 가능성 확대
[이채훈의 클래식비평]발레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 K-발레의 가능성 확대
  •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 승인 2023.08.23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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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이은원 완벽한 호흡, 역동적인 남성 군무 인상적
남성 중심 서사로 흘러 김아려가 주변화된 건 아쉬워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모차르트 평전> 저자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모차르트 평전> 저자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의 유언에 등장하는 ‘천국의 춤’에서 모티브를 발견한 것은 기발했다. 어머니 조마리아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던 안중근의 아내 김아려를 전면에 내세운 발상은 신선했다. 

발레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은 M발레단의 문병남 대표가 안무를, 양영은 단장이 대본과 연출을 맡았다. 먼저, 국수주의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다는 게 미덕이다. 우리 근대사의 비극에서 소재를 가져 왔지만 보편적 호소력을 갖고 있다. 클래식 발레와 모던 발레의 어법을 다채롭게 구사하여 높은 예술성을 보여주었고, 이와 함께 대중성을 획득하여 ‘한국 발레의 정체성 구축’이라는 목표에 성큼 다가섰다. 국립발레단이 아닌 개인 발레단에서 이룬 주목할 만한 성과다. 

8월 12일 오후 3시, 마포아트센터 아트홀맥 공연을 감상했다. 광복 70주년인 2015년 초연됐고, 2021년 광복절에 다시 무대에 올랐고, 2022 대한민국발레축제의 개막작으로 선보였고, 이번이 네 번째 프로덕션이다. 일회성 공연에 머물지 않고 장기 공연의 쾌거를 이루었고, 끊임없이 수정 보완한 결과 대본, 연출, 안무 등 모든 면에서 세련된 무대를 선보였다. 모든 제작진과 출연자의 뜨거운 열정과 끈기를 엿볼 수 있었다. 

미국 툴사발레단에서 활약 중인 이동훈이 안중근을, 워싱턴발레단의 이은원이 김아려를 맡아서 열정적으로 춤추었다. 국립발레단 수석 시절부터 호흡을 맞춘 두 사람은 고국의 팬 앞에서 최상의 기량을 발휘했다. 안중근이 뤼순감옥에서 김아려와의 결혼을 회상할 때, 의병 전투에서 다쳐서 사경의 꿈속을 헤맬 때 두 사람의 사랑이 아름답게 펼쳐졌다. 뤼순감옥의 마지막 순간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이인무는 압권이었다. 사랑이라는 하나의 감정 속에 고난과 희열, 슬픔과 그리움 등 다채로운 뉘앙스가 너울대고 있었다. 관객들은 두 사람의 열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M발레단 창작발레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단지동맹 (제공=마포문화재단)

일본군 장교 이시다를 맡은 윤별의 활약이 돋보였다. 우루과이 국립발레단에서 기량을 연마한 그는 격렬한 독무를 소화했을 뿐 아니라 시종일관 남성 군무를 리드하는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다. 조마리아 역의 김순정, 사쿠라 역의 진유정도 훌륭히 제몫을 다했다. 일본군과 독립군의 전투 장면에서 남성 군무는 압도적이었다. 구소련의 발레 <스파르타쿠스>에 등장하는 로마 군단과 반란군의 전투 장면 이래 이만큼 역동적인 남성 군무가 있었나 싶었다. 이토 히로부미 통감 취임 축하연에 등장한 여성 군무는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다채로운 동작과 색채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모습은 얼마나 치열하게 연습했는지 짐작케 했다. 

무대 배경에 펼쳐진 미디어아트도 완성도가 높았다. 눈 내리는 하얼빈역 장면은 섬세했고, 기차 들어오는 장면은 입체적이었다. 그 순간의 긴장도를 극대화한 훌륭한 연출이었다. 기차의 움직임을 사람 발동작과 사운드로 표현하여 다이내믹한 느낌을 살린 것도 기발했다. 조명 디자인도 치밀하고 정확했다. 핀스파트 조명으로 손과 발을 클로즈업한 대목은 인상적이었다. 배경 사운드로 대사를 들려주어 관객들이 주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안중근이 하얼빈역 총격 직후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를 외치고, 조마리아 여사가 옥중의 아들에게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는 편지 내용을 구술하는 대목은 주제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음악은 그리그, 생상스, J 슈트라우스, 무소륵스키, 차이콥스키, 림스키 코르사코프, 파가니니, 말러 등 낭만시대 거장들의 작품 위주로 선곡했고 나실인과 김은지가 작곡한 음악을 곳곳에 삽입했다. 무난한 선곡이었지만, 대규모 관현악곡 위주라서 그런지 다소 무겁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장한 곡을 조금 덜어내고 화사한 곡을 한두 곡 삽입하면 어떨까 싶었다. 음악이 완벽한 통일성을 이루었는지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존 크랑코가 창작한 발레 <오네긴>은 차이콥스키 음악만으로, 존 노이마이어 안무의 <카멜리아의 여인>은 쇼팽 피아노곡만으로 일관성을 획득했다. 여러 작곡가의 음악을 모자이크로 엮은 발레를 세계 무대에 내놓기는 좀 망설여질 듯하다. 쉽사리 대안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고민해 볼 만한 부분이다. 

▲M발레단 창작발레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 뤼순 감옥 장면을 연기하는 이은원과 이동훈 (제공=마포문화재단)
▲M발레단 창작발레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 뤼순 감옥 장면을 연기하는 이은원과 이동훈 (제공=마포문화재단)

안중근의 아내 김아려를 전면에 등장시킨 발상은 신선했지만, 드라마가 남성 중심의 서사로 흘러서 그녀의 역할이 주변화된 것은 아쉬웠다. 그녀의 삶과 실제 모습은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남편이 연해주에서 일제와 싸울 때 그녀가 세 자식을 혼자 키우며 힘든 나날을 보냈을 거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발레리나가 그녀를 ‘그 시대 기준에서 현대적 여성’, ‘강인하고 지조있는 여성’, ‘결혼 후 그리움, 걱정, 아쉬움, 원망을 품었음직한 여성’으로 해석하고 춤에 반영하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녀의 독무와 안중근과의 이인무에서 이러한 측면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킬 방법은 없을까 궁금했다. 안중근과 김아려가 서로 그리워했을 뿐 아니라 시대의 고통을 함께 짊어진 부부였다는 점을 잘 표현하면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은 8월 25일과 26일,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이번 시즌 8회 공연의 마지막 무대를 앞두고 있다. 광복 80주년을 맞는 2025년, 일본 공연을 성취시킬 수 있다면 참 멋진 일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진정한 동아시아 평화와 한일 민중의 우정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이 발레가 새롭게 자리매김 되면 얼마나 근사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