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김빛나의 이태백류 아쟁산조
[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김빛나의 이태백류 아쟁산조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23.08.23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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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서울대치곤, 산조 잘하네.” 서울대 국악과 출신의 산조를 듣고, 민속악 명인의 한 마디다. 지난 20세기 민속악 연주가들은 대학 출신의 산조를 인정할 수 없었다. ‘대학산조’라고 하며, 한 수 아래로 봤다. 나는 이를 ‘악보산조’라 부른다. 대학에서 국악 교육이 시작한 후, 오선보를 매개로 산조 교육이 이뤄졌다. 악보의 장점은 많다지만, 구전심수(口傳心授)의 장점 또한 무수하다. 산조는 궁극적으로 선율과 장단을 넘어서 ‘성음의 경지’에 도달해야 하는데, 악보로 배운 연주자는 성음을 잘 못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 악보에 적혀있는 음(音)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그렇다. 

음학(音學) 아닌 음악(音樂)

서울대 출신의 어떤 연주자가 정말 ‘암기과목 시험 보듯’ 산조를 타는 걸 들으면서 혀를 내두른 적이 있다. 가락과 장단이 전혀 안 틀렸기에, 본인의 만족도는 매우 높아 보였다. 하지만 산조 특유의 맛멋흥을 느끼기 어려웠다. 어떤 연주자는 마치 자신은 산조의 조성(調性)을 모두 다 구별을 잘한다는 듯, 뽐내며 연주한다. 우조 계면조 경드름 등 조성마다 변화하는 표현력은 존재하지만, 그게 감동으로 연결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감상의 단계’라고도 할 수 없는 산조도 들은 적이 있다. 이건 마치 산조의 악곡(조성) 분석(논문)을 무대에서 재현하고 있는 것같았다. 무대를 향해 외치고 싶었다. “산조는 음학(音學)이 아니라, 음악(音樂)이다!”

이태백류 아쟁산조를 연주한 김빛나는 전형적인 ‘국 –서 출신’이다. 국립국악중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학사 및 석사를 거쳐서,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빛나의 연주는 꽤 빛났다. ‘서울대치곤’이라는 말을 적용하면 큰 실례이고, 민속악인도 귀 담아 들으며 인정할 산조였다. 

이태백류 아쟁산조는 21세기에 만들어진 산조다. 지난 20세기에 만들어진 산조와는 분명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를 잘 알고 있었으면, 이태백류 아쟁산조에 대한 ‘리스펙’이 전해졌다.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진지했지만, 음학의 딱딱함은 아니었다. 저음역, 중음역, 고음역을 오가며서, 매우 정성스러운 소리를 만들어갔다. 그러나 분명 한계는 보였다. ‘악보의 충실’이 ‘농현(弄絃)의 충실’로 이어지니, 장단감이 흐트러지기도 했다. 단지 노련한 이태백으로 인해, 그걸 관객이 별반 눈치 채지 못했을 뿐이다. 

대학출신 연주가들의 가장 큰 아쉬움은 산조를 통해서 자신의 열정과 의지를 보여주려 한다는 점이다. 마치 전투에 임하듯 산조를 타는 연주자는 ‘힘을 못 뺀다’. 가락에 잔뜩 힘이 들어가니, 관객들은 편하고 즐길 수가 없게도 된다. 김빛나의 한계는 분명했으나, 둘러서 생각해보니 이태백류 아쟁산조를 이 정도로 탈 연주가도 흔치 않다는 생각에 이른다. 

악기를 넘어, 아쟁을 넘어, 유파를 넘어 

이태백류 아쟁산조를 잘 타는 비결은 무엇일까? 이태백의 아쟁산조는 왜 훌륭할까? 다음 셋으로 집약된다. 첫째, 그는 악기를 악기로만 대하지 않는다. 소리하듯 아쟁을 탄다. 그래서 유연하고, 그래서 잘 흘러간다. 둘째, 그는 아쟁을 아쟁으로 대하지 않는다. 다른 악기를 타듯이 아쟁을 탄다. 그의 아쟁 속에서는 가야금의 가락과 특성이 아쟁화되어서 살아있다. 이태백의 아쟁의 매력 중의 하나는 경조(京調. 경드름)이다. ‘남도음악의 맥’을 이어가는 명인이 어떻게 이렇게 경기음악의 특성도 잘 짚어갈까 싶기도 하다. 이럴 때 이태백의 아쟁은 참 ‘힘을 뺀 편안함’이 있다. 김빛나가 가장 배워야 할 부분이 여기란 생각이 든다. 셋째, 그는 유파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 옛날 송만갑이 그랬고, 김세종이 그랬던 것처럼, 정응민이 그랬던 것처럼, ‘가락을 잘 짜는 것’에 최종적 목표를 둔 음악의 현명함이 느껴진다. 

이태백의 문하에서 악기를 배우는 이들은 늘 이태백이라는 존재를 ‘넘사벽’으로 생각한다. 자신은 언제 그의 버금가게 연주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그런 이들에게 나는 역설적인 조언을 하고 싶다. 이태백의 아쟁산조는 ‘아쟁을 벗어났을 때’ 오히려 더 잘 탈 수 있다고. 

지난 20세기는 분명 ‘가거대피해’였다면, 21세기는 ‘가거대피해아’의 시대다. 이태백의 아쟁산조는 20세기의 산조와 21세기의 산조의 분기점으로 그 매력이 확실하다. 이태백류 아쟁산조는 이제 다른 악기의 산조와 당당하게 마주하면서, 아쟁 특유의 성음을 널리 알리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서울대치곤 vs. 서울대라서

이젠 서울대학교에서도 아쟁의 전임교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현재 서울대 국악과의 실기교수 진용은 최강이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거대피해’를 대표하는 이지영, 허윤정, 김정승, 김경아, 노은아가 청출어람(靑出於藍)을 길러내고 있다. 이젠 ‘서울대치곤’은 20세기 옛말이고, ‘서울대라서’라는 21세기의 새로운 표현이 대두될지도 모르겠다. 서울대출신의 연주가 중에서 산조를 잘 타는 연주가들이 지금은 꽤 있다. 

앞의 다섯 악기가 그렇듯이, 이제 아쟁도 그래지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서울대에서도 아쟁 전임교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대한민국의 대학들이 아쟁에 더 열려있길 바란다. 지난날 그랬듯이, 서울대학교가 그 선도적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대한민국의 국악이 아쟁에 더 열려있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21세기의 국악은 더 성장할 수 있다. 그래야 김빛나와 같은 인재가 더 많이 배출될 수 있다. 그게 국악기의 균형적인 발전을 꽤하는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