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한국춤 동작의 이론적 체계화
[성기숙의 문화읽기]한국춤 동작의 이론적 체계화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3.08.23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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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 선구자 박금슬의 업적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세대론적 관점에서 볼 때 무용가 박금슬(朴琴瑟, 1925~1983)은 특별한 존재라 할 수 있다. 일찍이 일본유학을 통한 선진교육의 수혜는 이론과 실기를 병행케 한 결정적 자양분이 되었다. 그는 다작(多作)의 무용가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 춤의 선구자로 손색이 없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유는 간명하다. 바로 한국춤 동작의 개념화와 용어정립을 통한 이론적 체계화를 모색했기 때문이다.  

제도권 무용계의 관점에서 박금슬은 다소 낯선 인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는 한 번도 공적(公的)인 지위를 가져본 적이 없다. 1962년 국립무용단 창단 이래 신무용 제2세대 무용가 대부분은 비정규정직이나마 무용단 소속이었다. 일본 유학파 박금슬이 소위 ‘무직(無職)’이었음은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한다. 

이름부터가 이색적이다. 박금슬의 본명은 박길남(朴吉男)이다. 소설가 오상순이 ‘금슬(琴瑟)’이라는 예명을 지어줬다. 이후 ‘길남’이라는 이름 대신 ‘금슬’을 공식 이름으로 사용했다. 현재 남아있는 그의 자료 대부분이 박금슬로 표기되어 있음은 바로 이런 연유에 귀착된다. 

거문고 금(琴), 비파 슬(瑟)의 ‘琴瑟’은 거문고와 비파를 뜻한다. 또 금슬지락(琴瑟之樂)이라는 사자성어에서 보듯 거문고와 비파의 아름다운 화음을 떠올리게 한다. 보통 다정하고 화평한 부부를 일러 ‘금슬이 좋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사전적 의미에서 보듯 ‘금슬’은 분명 좋은 이름임에 틀림없다. 

박금슬은 1925년 경기도 여주의 유복한 집안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손이 귀한 집안의 외동딸로 태어난 그는 부족함이 없는 풍요로운 환경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릴 적 집안은 강원도 인제 백담사 인근에 별장을 소유했을 정도로 살림이 넉넉했다. 우연한 기회에 백담사 스님 곽서순을 알게 된 부친은 그의 남다른 학식과 인품에 매료되어 일찍이 사위감으로 낙점한다. 1940년대 초반 부부의 연을 맺은 두 사람은 부친의 지원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박금슬은 일본 청수고등학교를 거쳐 일본여자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했다. 한편,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石井漠) 문하에서 신흥무용을 사사받았다. 당시 무용계에선 보기 드문 재원으로 손꼽혔다. 1944년 귀국 후 백담사 오세암의 천월(千月) 스님 문하에서 범패(梵唄)와 작법(作法)을 배웠다. 자신 스스로 불교에 심취한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학승(學僧)이었던 남편의 영향이 컸다. 남편 곽서순은 일본에서 귀국한 후 동국대 교수를 지냈으나 6.25 전쟁 때 납북된 것으로 알려진다.

전쟁은 끝났지만 남과 북이 분단 체제로 돌입하면서 남편과는 생이별하는 처지에 놓여지게 되었다. 남편과의 이별은 불행을 예고했으나 무용가로서의 삶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대구 피난 시절 장악원 여령 출신 정소산(鄭小山)에게 체득한 궁중정재와 교방춤은 그의 예술세계를 한층 풍요롭게 살찌웠다. 피난지 부산에서 문교부와 해병대 정훈감실 후원으로 개최된 고전무용발표회는 내용과 형식 면에서 큰 울림을 안겨줬다. 

1960년대 이후 민속예능의 현장에 산재해 있는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우리 춤의 발굴과 전승 그리고 무대화 작업에 몰두한다. 밀양지역에 잔존하는 민속예능의 원형 발굴과 복원작업에 참여했다. 작업의 결실인 ‘밀양아리랑’이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수상의 영예를 거머쥐는 성취도 맛봤다. 그 무렵 만난 제자 김은희는 밀양을 대표하는 전통무용가로 일가를 이뤘다. 

한편, 불교무용에 대한 그의 관심은 집요하고 끈질겼다. 1960년대 범패와 작법의 명인 권수근(權守根) 문하에서 불교의례를 비롯 나비춤, 법고춤, 바라춤 등 불교의식무용 일체를 체득했다. 당시 권수근 스님은 범패와 작법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그 위상이 높았다.  

박금슬의 무용활동은 불교의례 속 작법의 원형 보존과 불교를 원천으로 한 창작 작업 등 두 갈래로 전개되었다. 후자의 업적은 불교를 주제로 한 여러 작품들이 웅변한다. 최초의 작품은 1967년 안무한 ‘번뇌’이다. 1982년 문일지 단장 시절 서울시립무용단 주최로 열린 명무전(名舞展)에 출연한 박금슬은 직접 ‘번뇌’를 선보였다. 안타깝게도 이날의 공연은 그의 생전에 치러진 마지막 무대로 기록된다.  

작품 ‘번뇌’는 불교 소재의 작품이지만 삶의 희노애락을 묘사한 수작으로 손꼽힌다. 미(美) 보다는 추(醜)에 가까운 공연미학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예술지상주의 내지 유미주의적 관념의 신무용 지향성과 달리 삶의 현실을 보다 즉자적으로 표현한 움직임 기법이 특별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대표작 ‘번뇌’ 이외 불교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 상당수에 이른다. ‘중생’을 비롯 ‘탑돌이’, ‘태조’, ‘천수바라’, ‘범고춤’, ‘승무와 바라’ 등 40여종에 달한다. 인생 말년에는 자신이 직접 무대에 서기 보다는 제자들을 위한 안무작업과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그 스스로 궁핍한 형편임에도 제자들을 무용연구소에 머물게 하고 무료로 춤을 가르치는 등 한마디로 헌신적인 스승이었다. 무념무상(無念無想),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를 실천하며 초월적 인생관으로 살다가 1983년 삶을 마감했다. 

2003년 필자 주도로 개최된 “무용가를 생각하는 밤_박금슬 편”을 통해 그의 삶과 예술세계 및 무용사적 업적이 조명된 바 있다. 회고하건대, 박금슬의 최고 업적은 한국춤 동작의 이론적 체계화로 집약된다. 1982년 출간된 박금슬 저 『춤동작』은 40여년에 걸친 집요한 탐구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한국춤 기본 동작을 원리에 따라 개념화하고 각 동작에 용어를 부여하여 상세하게 풀이해 놓았다. 한국춤 동작 원리에 대한 이론적 이해와 실기 습득에 길잡이 역할로 매우 긴요하다. 

특히, 춤동작의 용어 정립은 보다 실제적이다. 예컨대 각 동작의 크기와 강도 및 소요되는 시간에 따라 이른바 장전(長轉)·중전(中轉)·세전(細轉) 등으로 개념화한 것은 한국민속무용학의 권위자 정병호의 이른바 ‘맺고 풀고 어르는’ 우리 춤의 삼단계 동작 원리의 발견과 견줄만한 탁견이 아닐 수 없다. 

저서 『춤동작』 서문에서 박금슬은 “나의 예술, 나의 작품만이 아닌, 우리의 예술, 우리의 작품을 위한 하나의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고 출간의 변을 남겼다. 그의 제자 허순선을 비롯 서희주, 김은희 등이 스승의 한국춤 동작체계를 보다 과학화하고 그 가치 확산을 위해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퍽 다행스런 일이다. 한국춤의 본질과 동작원리에 대한 이론적 체계화 모색 및 그 탐구정신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