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메세나) 수상자] 서상종 그랜드일번지 대표 “예술가들 위해 작게라도 꾸준히 지원, 큰 의미이고 가치”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메세나) 수상자] 서상종 그랜드일번지 대표 “예술가들 위해 작게라도 꾸준히 지원, 큰 의미이고 가치”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3.08.23 13: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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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담은 고악기로 연주되는 클래식 고음악, 더욱 활성화 돼야”
수상 계기로 고음악 전용홀 마련해야겠다는 새로운 목표도 생겨
풍류 피아니스트 임동창 위해 만든 ‘피앗고’, 피아노 제작법 변형으로 탄생
수집한 피아노를 한 곳에…신안 ‘피아노의 섬’에 ‘피아노 박물관’ 조성 예정
조율사 육성 테크니컬 아카데미 운영 계획…“음대 학과ㆍ조율 전문학교 절실”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ㆍ진보연 기자/김바울 사진기자]2010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상영작이었던 <피아노매니아(Piano mania)>는 피아노 메이커인 스타인웨이 & 선즈(Steinway & Sons)의 수석 테크니션인 슈테판 크누퍼의 작업현장을 중심으로 완벽한 음향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리얼하게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주인공 슈테판 크뉘퍼는 알프레드 브렌델, 랑랑, 루돌프 부흐빈더, 피에르 로랑 에마르 같은 정상급 피아니스트들과 작업한다. 연주자 곁에는 늘 피아노 조율사들이 있다. 사람들은 조율사가 단지 피아노 음정만 맞추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들은 음의 잔향까지 고려해 줄을 조이고 풀며 피아노를 최적의 상태로 유지한다. 

수억 원을 호가하는 명품 피아노라고 해도 관리가 소홀하거나 조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청중을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소리를 기대하기 어렵다. 관객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 무대 밖 조율사의 역량은 피아노로 연주되는 음악의 품질에 큰 영향을 미친다.

▲서상종 그랜드일번지 대표가 피아노 조율 시범을 보이고 있다.

그랜드일번지 서상종 대표는 1974년 고등학교 졸업 직후, 지금까지 50여 년의 세월동안 ‘피아노’라는 악기에 매진한 인생을 살아왔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에서 피아노제작 기술을 연수하고, 삼익악기에서 피아노를 제작하던 국내 최초 개발자 김영수 선생의 문하생으로 제작에 입문했다. 이후 서 대표는 국내 그랜드피아노 전문 기술자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전속조율사로 활동하게 된다. 2004년에는 (사)한국피아노조율사협회 11대 회장에 취임했다. 서 대표는 회장 취임 이전부터 협회의 기술담당 부회장을 맡아, 국내 조율사들의 기술 수준을 국제적으로 상향평준화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서 대표의 전문기술자로서의 역량은 풍류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임동창 선생과의 만남 속에서 또 한 번의 변화를 맞이한다. 서 대표는 임동창 선생과 40여년 동안 친구로 지내며 음악가로서 요구하는 피아노의 소리를 만들기 위해 2012년 ‘피앗고’를 개발한다. ‘피앗고’(Piatgo, 피아노와 가얏고의 합성어)는 서양에서 피아노가 유입된 지 100년 넘은 후 드디어 국악기로 재탄생된 새로운 피아노이다. 기존 피아노 제작에 특별히 고안된 액션을 장착해 가얏고처럼 원시적인 현의 소리를 낼 수 있다. 이는 원초적이고 입체적인 우리 음악을 표현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던 서양식 피아노에서 한 발 나아가는 시도였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피아노와 함께 살아온 서 대표는 자신의 입지를 제대로 다지기 시작한 이후부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음악을 놓지 않는 예술인들과 함께 걸어가는 데에도 힘을 쏟았다. 서 대표는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최고경영자 문화 예술과정을 수료하며 국내 음악인과 음악단체의 연주 활동에 열악한 여건들을 알게 됐고, 이후 음악인들과 적극적인 교류를 통해 국내 수많은 음악인 단체에 연주용 피아노의 제공, 기술 제공, 장학금 전달ㆍ후원 활동을 펼쳐 왔다.

예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후원은 ‘고악기 수집’으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 중이다. ‘고악기 수집’은 상당한 투자가 필요하지만, 고악기 수입과 콘서트 개최는 어느 한쪽에 과다하게 쏠린 피아노 음악에 균형을 잡아 주는 역할이라며 서 대표가 사명과 같이 행하고 있다. 

서상종 대표는 “‘고악기 수집’은 피아노 콩쿠르 최다 우승 국가인 한국의 자존심을 지켜 주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고 말한다. 신념을 따르는 그의 다양한 활동을 인정받아 지난 1월에는 제14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메세나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바 있다. 피아노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장인만이 가지고 있는 철학으로 삶을 채우며 예술로써 선한 영향력을 펼치고 있는 서상종 대표를 만나 그가 꿈꾸는 소리로 채워지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지 들어봤다.

제14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메세나 분야 수상을 축하한다. 시상식 당시 전하지 못한 수상소감과 수상 이후 근황이 궁금하다. 

지난 3월에는 독일에 다녀왔다. 바세나흐(Wassenach)라는 지역에 음악학자 Dr. Rudolf Ewerhart가 운영하던 음악 박물관에서 경매가 있어서 참여했는데, 거기서 귀한 악기들을 많이 만났다. 1845년 독일 베를린의 J. C. Schleip가 제작한 Lyre피아노, 1825~30년 Vienna Verloren 지역의 피아노제작자가 제작한 5개페달이 달린 비엔나 포르테피아노, 1760년 남부독일지역에서 제작된 스퀘어피아노, 1840년 독일남부 SCHWEIZ에서 제작된 초기 Vertical piano 등 역사적 가치가 큰 고악기들을 다양하게 들여오게 됐다. 

Ewerhart 박사가 2년 전 세상을 떠난 후 아들들이 박물관을 물려받았는데, 도저히 운영을 못 하겠다고 해서 열린 경매였다. 전 세계의 귀한 악기들이 많았던 박물관이라 경매에 참여하려는 사람들도 정말 많았다. 제작자, 연주자 등 200명이 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보통 경매가 4시간 정도 진행되는데 그날은 10시간을 넘겼을 정도다. 그곳에서 박사의 아들을 만났는데 그분의 자녀들이 경희대 교환 학생으로 왔었다고 하더라. 나도 너무 반가웠고 그쪽에서도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환대를 해줘 즐거운 추억이 됐다. 

코로나라는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전 세계 피아노 산업이 아직까지 융성하지 못하고 침체되어 있다. 하지만 언제 다시 살아날지 모르기 때문에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좋은 피아노를 찾기 위해 항상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다. 올 3월에는 독일에서 피아노 고악기 경매가 있었다. 7대 정도 구입했고, 지금 한국으로 오고 있다. 악기가 도착하면 복원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이번엔 네덜란드의 빌데롬이라는 기술자를 초청해, 분당에 있는 공방에서 작업할 예정이다. 

수상할 자격이 안 되는데 받았다고 생각해 책임감이 더 생겼다. 어떻게 하면 음악과 문화예술인들의 교류를 더욱 활발히 할 수 있을지, 피아노 제작자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피아노가 필요한 곳에 어떻게 공급해야 할지 등 그동안에도 해왔던 고민과 머릿속을 채우던 문제들이 새삼 무겁게 다가옴을 느꼈다. 

게다가 수상 부문이 ‘메세나’이다 보니 이에 대한 부분도 대충 넘어갈 수 없게 됐다. 우리나라에는 뛰어난 음악인들이 많지만, 여건이 좋지 않아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이들이 연주할 수 있는 무대를 갖기 힘들다. 특히 고음악은 상황이 더욱 안 좋다. 피아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전용 홀도 없다. 그래서 이번 수상으로 하여금, 고음악 전용 홀을 마련해보겠다는 새로운 목표도 생겼다. 

고음악은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파 등 옛음악을 그 시대의 악기와 연주법으로 연주하는 것을 뜻한다. 베토벤, 쇼팽, 모차르트가 작곡할 당시의 악기, 곡해석방법, 악기 편성 등을 그대로 재현해 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직 여건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 그동안은 아무도 인식하지 못했지만, 이제 고음악의 시대가 도래했다. 2018년부터 쇼팽 콩쿨은 고음악으로만 연주되는 International Chopin Competition on Period Instruments이 신설되어 운영하고 있다. 클래식 강국인 우리나라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해당 대회 참가자는 한 명도 없었다. 반면, 첫 대회 당시 일본에서는 7명이 참가했다. 일본의 고음악 여건은 우리나라와 굉장한 차이를 보인다. 여건이 마련되어야 인재들이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은 열악하지만 꾸준한 관심과 지원으로 우리나라 고음악 시장에 활기가 불어 넣어지길 바란다. 

▲서상종 그랜드일번지 대표(가운데)의 제14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메세나 부문 수상 당시 모습

1974년 고등학교 졸업 직후, 지금까지 50여 년의 세월 동안 ‘피아노’라는 악기에 매진해왔는데 어떻게 피아노와 함께하게 됐으며, 연주가 아닌 제작과 조율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전라북도 고창의 한 시골 마을 출신이다. 문화생활이라곤 장터가 열리면 아버지가 보여주시던 창극이 전부였다. 그 당시 시골 학교엔 피아노 대신 풍금이 있었던 때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 음악을 잘하시는 선생님이 부임해 오셨다. 음악은 잘 몰랐지만, 선생님의 애제자가 되고 싶어 열심히 하게 됐고 자연스레 음악이 좋아졌다. 

나에게 피아노의 길을 제대로 열어준 건, 지금은 돌아가신 큰 매형이었다. 한 번은 매형을 따라 피아노를 구경하러 가게 됐는데, 그 기계의 움직임이 너무 신기했다. 그렇게 막연하게 피아노를 동경하게 됐다. 이후 가정 형편이 좋지 못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대신 피아노 제작기술을 배우게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 1974년 삼익피아노에 입사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그랜드피아노를 만드셨던 김영수 선생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됐다. 

피아노를 해외 수입에 의존하다가 국산 브랜드 피아노가 생산되니, 우리나라 음악인들이 그랜드피아노를 하나씩 다 살 정도로 열풍이 불었다. 당시엔 업라이트 피아노를 다룰 수 있는 기술자가 몇 없었기 때문에 회장님 특명으로 생산책임자에서 서비스책임자로 조율 일을 하게 됐다. 그러면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전속 조율사가 됐고, 거기서 정진우 교수님을 만났다. 그게 1979년의 일이다. 정진우 교수님 댁에 피아노가 많았는데, 회사에서 나에게 그 피아노 조율을 맡겼다.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가서 피아노를 점검했는데, 어느 날 선생님께서 ‘젊은 친구가 좋은 기술을 배웠다. 우리나라 음악을 위해서는 이런 기술이 꼭 필요하니 독일에 가서 더 많은 것을 공부하고 오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셨다. 그렇게 회사와 얘기가 되어,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1982년부터 1984년까지 공부를 하고 올 수 있었다. 2년 8개월이란 기간 동안 제작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던 1984년, 독일 출신 피아노 설계의 세계적 권위자인 크라우스 펜너(KLAUS FENNER)의 설계와 기술지도로 독일형 삼익피아노가 본격적으로 생산되면서 삼익브랜드는 세계 피아노 수출 1위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나에게 아주 중요한 모멘텀이 된 시기는 2000년이다. 독일에서 1984년 귀국하고 계속 회사 소속으로 일하다가 1992년 독립을 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는 뮤직메세(Musikmesse)라는 악기박람회가 매년 열리는데, 세계 악기가 전부 모인다. 독립을 하고 악기 제작 공부를 위해 메세를 찾았는데, 그곳에서 명품 피아노를 다시 만드는 ‘리빌트’ 산업을 알게 됐다. 거기서 큰 영감을 얻고 그랜드피아노만을 리빌트하는 산업을 우리나라에 도입하게 됐다. 그게 지금의 ‘그랜드일번지’이다. 몇억 원을 호가하는 해외 브랜드 그랜드피아노를 리빌트해서 많은 피아니스트에게 보급하고, 낡아서 제 기능을 못 하던 그랜드피아노가 내 손을 거쳐 새것처럼 다시 태어났다는 자부심으로 더 열심히 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전문기술자로서 활동을 이어가던 중, 임동창 선생을 만나며 작업 세계를 또 한 번 확장하게 된다. 임동창 선생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꽤 오랜 인연이다. 1980년에 처음 만났다. 당시 나는 그랜드피아노 담당 기술자였다. 임동창 선생이 삼익 그랜드피아노를 하나 사서 수업을 하고 있었는데, 피아노 소리가 안 좋다고 난리가 난 것이다.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웃음) 피아노 못 쓰겠다고 가져가라고 하고, 다른 기술자들이 갔는데도 해결이 안 돼서 내가 가게 됐다. 피아노를 한 3시간 봤더니 문제가 해결됐는지 소리가 다시 좋아졌다. 명함을 달라고 했는데 회사로 연락하라고 명함을 안 주고 왔다. 워낙 까다로워서.(웃음) 근데 회사로 또 피아노를 봐달라고 연락이 왔다. 그 일을 계기로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친구가 됐다. 둘이서 피아노 있는 바를 찾아다니며 연주해주고 술 마시며 그렇게 청춘을 보냈다. 

▲1845년 독일 베를린의 J. C. Schleip가 제작한 Lyre피아노
▲서상종 대표가 지난 3월 Dr. Rudolf Ewerhart 음악 박물관 경매를 통해 구입한 고악기.
1845년 독일 베를린의 J. C. Schleip가 제작한 Lyre 피아노이다.

그간에 작업했던 그랜드피아노 및 고악기 작업과 임동창 선생과의 피앗고 작업은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피앗고라는 이름은 서양악기를 대표하는 피아노와 우리나라 전통악기인 가야금(옛 가얏고)의 합성어이다. 이 악기는 이름처럼 독특한 소리를 지녔다. 피아노의 원리와 구조를 그대로 가져가면서 음색에 변화를 주기 위해 해머에 아크릴을 녹여 도핑해 쨍한 소리를 만들었다. 그게 최초의 피앗고다. 발명은 아니고 기능 개선, 리노베이션이었다. 피앗고2는 기존의 해머를 아예 없애고 하드 메이플로 된 아주 단단한 해머를 만들었다. 

조율과 더불어 고악기 수집에도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단순 수집을 넘어 사명감을 갖고 있다는 고악기 수집이 가지는 가치와 의미는 무엇인가?

과거 강원대학교에서 약 14년 동안 피아노 발달사와 피아노 조율에 대한 강의를 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책임감과 사명감도 커졌다. 더불어 문헌 자료로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걸 느꼈다. 학생들과 함께 피아노를 보고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백 번 책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더 다양한 악기들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세계 곳곳의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소장가치가 높은 진귀한 피아노 구입에 나서게 됐고, 악기박물관 건립이라는 꿈도 자연스럽게 키워 나가게 됐다.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악기로는 베토벤이 귀가 들리지 않고 암울한 시기에 영국의 제작자 존 브로드우드로부터 1817년 헌정 받았던 피아노와 동일 모델(1819년제작)을 2018년 경매를 통해 가져온 영국의 COLT CLAVIER COLLECTION에서 사용하던 피아노다. 이 외에도 2018년도에 경매에 나온 100여 점의 피아노 중 욕심났던 플레옐 스퀘어피아노와 베토벤도 중기에 사용하고 쇼팽이 즐겨 연주했던 에라르 등 14점과 피아노 역사 관련 서적 모두를 구입하여 소장 중이며 모차르트가 연주 여행 중에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 편지로 소개하며 극찬하던 비엔나 피아노로 불리는 STEIN 등 많은 포르테피아노를 보유하고 있다. 몇 해 전 파주에 박물관 설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현실적인 여건에 부딪혀 결국 무산된 바 있다. 이후 여러 지역에서 러브콜을 받았으나, 단순한 피아노 전시가 아니라 그들의 역사를 함께 전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함께할 곳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신안군의 피아노섬 제안을 받게 됐고 장고 끝에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게 됐다. 

신안 자은도가 ‘피아노의 섬’으로 지정되고, 이곳에 피아노 박물관도 설립할 것이라고 들었다. 

신안 섬 한 하나에 미술관, 박물관을 지어 예술을 스미게 하겠다는 1도 1뮤지엄 프로젝트다. 그중 자은도라는 섬이 있는데, (신안의 섬 가운데) 면적이 가장 넓고 주민 인구도 가장 많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어느 날, 박우량 신안군수가 찾아와 피아노 섬과 박물관에 대한 계획을 전하며 아주 적극적으로 노크를 했다. 점 찍어둔 폐교가 있는데 아주 저렴한 가격에 공간을 내어줄 테니 그곳에서 피아노 박물관을 함께하자고. 무엇보다 나를 설득시킨 것은,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것보다 주민들이 예술로써 행복하길 바란다는 군수의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프랑스 북부의 작은 도시 ‘르 투케 파리 플라주’의 피아노 페스티벌을 벤치마킹해서 피아노의 섬을 설립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나는 단지 이름만 ‘피아노의 섬’이 아니라 음악이 왜 중요한지 주민 모두가 이해하고, 전 세계 사람들이 이곳을 찾을 수 있는 예술섬으로 만들고 싶다. 피아노의 섬에 오면 언제든 음악과 피아노를 만날 수 있는 인프라로 채워지길 원한다. 페스티벌 한 번으로는 절대 완성될 수 없다.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 그리고 마을 전체의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서상종 그랜드일번지 대표가 인터뷰 중 질문에 답하며 웃고 있다
▲서상종 그랜드일번지 대표가 인터뷰 중 질문에 답하며 웃고 있다

2005년 한예종 최고경영자 문화예술 과정 수료 후, 국내 음악인 및 음악 단체를 위해 악기ㆍ기술 제공, 장학금 전달 등 다양한 후원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음악인들이 자비로 연주회를 여는 게 힘들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이후 그랜드 피아노 전문점을 시작하면서 더 많은 연주자들과 만나게 됐고, 사정을 잘 알다 보니 연주회를 조금씩 도와주기 시작했던 것이 지금까지 왔다. 금액을 많이 보태지 못하더라도, 내가 도울 수 있다면 작게라도 주저하지 않고 참여하는 것이 더 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함께 참여하며 조그만 동기부여라도 되는 것, 특강에 참여해 내가 가진 지식을 나누는 것, 장학금을 전달하는 것 등 얼마가 됐든 꾸준히 계속한다는 것이 나에겐 더 큰 의미이고 가치이다. 

연주자에게 조율사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오랫동안 갈고 닦은 기술이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인력을 양성하는 일도 매우 중요한데, 이 부분은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11대 회장을 맡기도 했던 한국피아노조율사협회가 굉장히 열심히 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조율은 세계적 수준이다. 음악 수준이 높아진 만큼 조율사들도 연주자들과 한 몸이 되어 좋은 연주를 위해 공부하며 기술 수준을 높이고 있다. 협회에서는 선배 조율사들에게 가능한 기술을 후배들을 위해 다 내놓고, 해외의 유명 기술자들을 초청해 교육도 실시하고 있다. 더불어, 삼성문화재단에서 많은 후원과 해외 파견 지원을 통해 젊은 유망주 양성을 돕고 있다.

이러한 협회의 적극적인 노력이 있지만, 대학에 조율학과가 없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현재로선 조율 기술을 배우려면 학원에 가거나, 스승으로부터 도제식 수업을 받거나, 협회에서 진행하는 특강을 듣는 방법밖에 없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신안 ‘피아노의 섬’에 테크니컬 아카데미를 만들고 싶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전문 기술을 가진 조율사를 보존 및 양성하기 위해서는 음악대학 조율학과나 조율 전문학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삶에 지침이 되는 철학이나, 좌우명이 있다면.

어려움이 닥치거나 어떤 위기의 상황 혹은 갈등이 있을 때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을 마음에 새겼다. 이 말이 나의 중심을 잡아줬다. 항상 열심히 하는 모습을 제자들에게도 보여주려 한다. 당장 빛이 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가치를 다 알아주는 거니까. 대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자. 좋아하는 일을 해야 열심히 할 수 있는 열정도 생기고 지치지 않는다. 즐길 수 있는 꾸준한 노력만이 성과로 이어지는 법이니까. 

앞으로 꼭 이루고 싶은 꿈?

앞서 언급했듯 피아노와 피아노가 담고 있는 역사를 담고 있는 공간, 피아노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기술자로서, 피아노 제작자로서의 꿈이다. 내가 수많은 피아노를 만나러 전 세계를 누비듯, 피아노를 사랑하는 세계인들이 언젠가 만들어질 이 공간에 찾아와 우리나라 예술을 직접 보고, 느끼고, 사랑하게 될 날을 꿈꿔본다. 아직은 내 머릿속에만 있는 공간이지만, 나는 언제나 꿈꾸는 삶을 동경한다. 꿈꾸는 나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