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스케치]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백년 여행기》, “백년초 설화서 시작된 멕시코 한인 서사”
[현장스케치]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백년 여행기》, “백년초 설화서 시작된 멕시코 한인 서사”
  • 이지완 기자
  • 승인 2023.09.08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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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CA 서울관 5전시실ㆍ서울박스, 내년 2월 25일까지
신작 4점 포함, 총 5점 작품 공개
20세기 초 멕시코로 건너간 한인 디아스포라 주목

[서울문화투데이 이지완 기자] 1905년 영국 상선 일포드호를 타고 인천 제물포항을 떠나 멕시코 유카탄 주의 수도 메리다에 도착했던 백여 년 전 한인들의 이야기가 정연두 작가의 시선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전해진다. 국립현대미술관(MMCA)은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 – 백년 여행기》를 지난 6일 시작해 2024년 2월 25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개최한다.

▲<날의 벽> 앞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는 정연두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신작 4점을 포함한 총 5점의 대형 설치, 영상 작업을 선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하고 현대자동차가 후원하는 《MMCA 현대차 시리즈》는 지난 2014년부터 시작해 매년 국내 중진 작가 한 명(팀)을 지원하는 연례전이다. 매해 독자적인 작업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중진작가 한 명을 선정해 작품 활동과 전시를 지원하며, 국내·외로 적극 홍보하고 있다.

거시적 서사가 개인 서사로 발화

정연두(b.1969)는 1998년부터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기억과 재현, 현실과 이미지, 거대 서사와 개별 서사의 역설적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퍼포먼스와 연출 중심의 사진과 영상, 설치 작업으로 국내외 미술계의 조명을 받아왔다.

2014년도 이후 작가는 다큐멘터리적 서사와 그에 내재된 개인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다. 프랑스로 이주한 이민자 이야기를 다룬 <여기와 저기 사이>(2015)를 비롯해, 아시아 근대사를 중심으로 한 <고전과 신작>(2018), <높은 굽을 신은 소녀>(2018), <소음 사중주>(2019), <DMZ극장>(2021) 등에서 작가는 전쟁, 재난, 이주, 국가, 이데올로기와 같은 거시적 내러티브를 개인 서사 및 신화와 설화 등을 통해 재구성했다.

이번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백년 여행기》에서 작가가 주목한 서사는 20세기 초 멕시코로 건너간 한인 디아스포라(diaspora)다.

▲정연두, <백년 여행기>, 2023, 비디오 설치, 4채널 HD 디지털 비디오, 컬러, 사운드, 혼합매체, 48분, 가변크기. 전시 전경. 작가 소장. 사진: 소농지. (사진=MMCA 제공)

‘역사’로서의 백 년 전 이주기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백년초’라는 식물의 ‘설화’적 여행기에서 출발했다. 작가는 2022년 9개월간 제주도에서 생활하며 제주 북서쪽 월령리 일대의 백년초 자생 군락을 방문한다. 쿠로시오 난류를 타고 멕시코에서 태평양을 건너와 제주도에 뿌리를 내렸다고 알려진 백년초 이동 설화에서 작가는 한국과 멕시코를 잇는 식물 및 사람의 백년 여행기라는 소재를 떠올리게 됐다. 이때 식물의 ‘이식’은 뿌리가 뽑혀 다른 시공간으로 이동한 한인들의 ‘이주’와 접속한다.

전시는 서울관의 서울박스 및 5전시실에서 펼쳐지며, <백년 여행기>, <상상곡>, <세대 초상>, <날의 벽> 등 4점의 신작과 <백년 여행기-프롤로그>(2022) 등 총 5점이 출품된다. 전시는 시공간을 초월해 서로 무관해 보이는 존재를 연결하는 가능성의 영역으로 이주와 이국성의 주제에 다가간다.

전시 개막 전, 지난 5일 열린 언론 공개회에 참석한 정 작가는 “이주와 이민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지만,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역사의 무게를 이겨내고 전시를 감상해주길 바란다”라며 “전시를 역사의 무게감으로만 보지 않길 바란다. 나는 이 작업을 할 때 정말 재미있었다. 그 느낌을 관람객들이 같이 느껴주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작가는 20세기 초 이민자의 시간과 경험, 기억에 최대한 다가가고자 2022년부터 2년에 걸쳐 멕시코를 3회 방문해 한인 이민 2~5세 후손들을 인터뷰했다. 그리고 과거 한인들을 멕시코로 이끈 결정적 동인인 과거 유카탄의 에네켄 농장을 방문해 다양한 열대 식물들을 촬영했다. 실제 역사적 장소를 직접 방문하는 정 작가의 방식은 작업 초기부터 작가가 추구해온 실천적이고, 수행적 방식의 연구다.

정 작가가 다루고 있는 세계의 문제는 정말 거시적인 영역의 일이기에 쉽게 인지되지 않거나, 정보로만 인지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거대한 역사를 살아나간 개인의 서사가 우리 곁으로 다가왔을 때 그 인지의 경험은 달라질 수 있다.

▲정연두, <상상곡>, 2023, 사운드 설치, 초지향성 스피커, 서브 우퍼, 앰프, 오디오 인터페이스, 흡음재 조형물, 와이어, 251.4×306.2×20 cm, 300.5×227.8×20 cm, 287.5×158.6×20 cm, 250×230.3×20 cm, 250×73×73 cm, 72.2×54.2×54.2 cm (6), 가변설치. 전시 전경. 작가 소장. 사진: 소농지. (사진=MMCA 제공) 

정 작가는 “지난 8월에 메리다를 방문했을 때, 엘제물포에서 열린 한인 행사에 참여했는데 거기서 멕시코 한인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 삼창을 하는 모습을 봤다. ‘엘제물포’는 제물포를 떠나온 한인들이 항상 모여 휴식을 취하던 공간으로 스페인어가 통하지 않는 그들이 항상 말하던 ‘제물포’가 그곳의 이름이 됐다. 1905년에 118명의 한인은 대한제국의 여권을 가지고 멕시코로 이주하지만, 1910년 한일합병으로 그들은 국권을 잃는다. 그리고 1960년대까지 멕시코 한인들은 잊혀져있던 존재였다. 그들은 멕시코에 살면서 마야인과 결혼했고, 실제 현재 이민세대는 우리와 모습이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그들은 왜 계속 태극기를 들고 있을지 생각하게 됐다”라며 멕시코 한인 이주 이야기에 빠져들고, 그들과 함께한 경험을 설명했다.

작가가 멕시코 한인들을 만나고 전하고 있는 이야기는 매우 개인적이면서, 친숙한 느낌이 든다. 동시에 그 이야기 속 담겨있는 거시적 서사는 작지만 무게감 있게 관람객에게 접근한다. 작가가 방문과 인터뷰를 통해 얻은 실제 이야기들은 멕시코 이주 서사 내부를 끄집어내는 관계적 통로가 되고, 작가적 연출을 중심으로 사진과 영상, 텍스트와 사운드, 공연과 설치를 넘나드는 복합 매체 활용은 이주 역사라는 고정된 서사 아래 숨겨진 다양한 역설과 모순의 상황 및 혼종성의 맥락을 표층으로 떠오르게 하는 시각적 장치다.

▲정연두, <세대 초상>, 2023, 2채널 HD 비디오, LED 스크린, 컬러, 22분, 500 x 350 cm (2). 전시 전경. 작가 소장. 사진: 소농지. ⓒ서울문화투데이 

이민 2세와 이민 5세 사이에 서보기

이번 전시에서 선보여지는 신작들은 관람객들을 이주의 경험 안으로 이끌고 들어간다. 서울박스에 설치된 사운드 설치 신작 <상상곡>(2023)은 초지향성 스피커가 내재된 천정의 열대 식물 오브제작품이다. 관람객은 빨간 열대 식물 오브제 아래에 서면 2023년 현재 한국에 와서 살고 있는 여러 국적 외국인들의 다종 다성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스피커를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백년 전 멕시코로 이주했던 한인들과 비슷한 나이대 인물들이 한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 오늘 가장 그리운 사람, 희망과 꿈 등에 대한 작가 질문에 자국어로 대답한 내용들이다. 일본어, 스페인어, 아랍어, 헝가리어, 텔루구어, 인도네시아어 등의 대답이 들린다.

이들의 대답들은 서정적이고, 현실의 소리라기보다는 마치 머릿속을 맴도는 상상의 노래처럼 들려온다. 작품은 120여 년 전 멕시코로 떠난 한인들의 나이와 유사한 생의 단계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젊은 재한외국인들의 목소리로 20세기 초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들이 이질적인 시공간과 조우하며 겪었을 낯섦의 감각을 역으로 유추하게 한다.

5전시실에 설치된 <세대 초상>(2023)은 5m 높이의 두 대의 LED 대형 패널 작업이다. 화면에서는 매우 느린 영상 화면으로 사진과 영상의 중간적 상태로 멕시코 한국 이민 후손 총 6가구 12명의 초상을 보여준다. 소리 없이 인물들의 제스처와 표정들만이 아주 느린 속도로 보이고, 관람객은 세밀하게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스크린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식이기에 관람객들은 실제 물리적으로 그 두 세대 사이로 들어가 볼 수 있다. 영상 속 주인공들은 한인 후손의 성격도 띠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 겪고 있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속 인물들이다. 거대한 역사를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우리 개인이 공감할 수 있는 관계의 장도 떠올려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자, 전시 주요 작품인 <백년 여행기>(2023)는 4채널 대형 영상 설치작품으로 멕시코 이민과 관련한 텍스트를 기반으로 작가가 연출한 한국의 판소리, 일본 전통음악 기다유(분라쿠), 그리고 멕시코의 마리아치의 공연을 3채널 영상으로 보여준다. 텍스트 서사를 공연·소리·영상·이미지·운율·리듬·빛으로 전환한 작가 특유의 비선형적인 작업방식을 느껴볼 수 있다.

<백년 여행기>는 공연 영상의 음악적 운율에 맞춰 농부, 노동, 군중, 식물 영상 이미지들을 편집한 안무적 특성의 대형 LED 영상과 그 영상 빛이 선인장 오브제를 비추며 공간에 층을 부여한 설치 작업을 포함한다. 총 48분의 영상이지만, 현대의 노동이 안무적으로 표현되는 영상과 그 위에 입혀지는 과거 멕시코 이주의 서사는 굉장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이 과정 속에서 관람객들은 멕시코 이민 서사를 여전히 살아있는 문화적인 생성지대로서 재방문하게 된다.

▲<날의 벽>을 감상하는 취재진들 ⓒ서울문화투데이

전시의 마지막 작품인 <날의 벽>(2023)은 12미터 높이의 벽면 설치 작품으로 어린 시절 즐겨했던 놀이인 설탕 뽑기의 형태로 전 세계 다양한 농기구(마체테) 모양의 오브제를 만들고, 이를 디아스포라의 어원적 원류인 이스라엘 ‘통곡의 벽’에서 착안해 거대한 벽의 형태로 쌓아 올렸다. 이 방은 방음제로 공간을 만들어, 옆 전시 공간 작품인 <백년 여행기>의 음악이 전혀 들리지 않으며 전혀 다른 시간대와 새로운 공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전한다. 이 전시 공간에선 설탕이 주는 달콤함의 감각과 뽑기라는 유희적인 놀이는 그리고 제국주의와 디아스포라를 촉발한 설탕의 정치학과 상충하며 낯선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거시적 역사를 느껴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개인의 이야기에 녹아든 역사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삶과도 닮아있어, 좀 더 가깝게 느껴진다. 과거의 국가 경계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경계와 많이 다르다. 우리는 점점 더 다종ㆍ다성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상상곡>으로 시작해, <백년여행기>에 머무르고, <날의 벽>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이번 전시는 우리가 맞이할 세계에 대한 과거와 지금을 모두 돌아보게 한다. 더불어 정연두라는 작가의 확장된 세계를 만나볼 수 있는 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