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국악원 민속악단 기획공연 ‘경셩유행가’와 ‘서도민요’의 매력
[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국악원 민속악단 기획공연 ‘경셩유행가’와 ‘서도민요’의 매력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23.09.13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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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셩유행가’ 계기로 일제강점기 경성도창과 신민요 등이 앞으로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의 레퍼토리로 정착하길 희망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2023년 5월,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의 예술감독으로 유지숙명창이 임명되었다. 서도소리 명창이 민속악단 예술감독이 된 건 처음이다. 한반도 북쪽,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의 노래인 ‘서도소리’는 여러 면에서 소외되어왔다. 한 예로 KBS국악대상의 민요부문상을 들 수 있다. 경기민요와 서도민요를 대상으로 하는데, 지금까지 경기민요가 독점하다시피 했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경서도창(京西道唱)이라고 해서, 두 지역의 소리를 넘나들면서 부르는 게 아주 자연스러웠다. 무형문화재 제도 속에서 ‘경기민요’와 ‘서도소리’가 엄격히 분리되면서 영역이 좁아진 느낌이다. ‘수심가’로 대표되는 서도소리는 오래도록 슬픈 소리로만 알려졌다. 국악인조차 수심가와 난봉가가 서도소리의 전부인양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선하면서도 강한 에너지’를 품은 유지숙의 서도소리 

유지숙명창은 서도소리가 얼마만큼 다양하다는 걸 알리는데 30여 년을 받쳤다. 특히 서도소리 중 ‘기원과 덕담’의 소리를 알리는 역할을 해냈다. 유지숙명창도 젊은 시절 여러 어려움이 많았을까? 유지숙 명창의 서도소리는 소외된 사람을 달래주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개인의 아픔을 위무(慰撫)하고 세상의 안녕을 염원(念願)하는 ‘선하면서도 강한 에너지’가 특징이다. 

유지숙명창은 서도지방의 토속민요가 소박하면서 얼마나 재미있는가를 알려주었고, ‘평안도 향두계놀이’를 통해서 관서(關西) 지방 특유의 생활상을 노래와 놀이를 통해서 알렸다. 아울러 서도소리와 연관된 유성기음반, 곧 일제강점기에 불린 서도소리에 대해서 늘 관심을 가져왔다.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기획공연 ‘경셩유행가’(9.6 ~7.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은 매우 획기적인 공연이었다. ‘판을 나온 소리’라는 부제가 붙었고, 일제강점기 유성기 음반에 담긴 소리를 복원한 공연이다.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단원들이 저마다 서도민요 경기민요 가야금병창 판소리를 복원해서 부르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풍류사랑방이 무대가 일제강점기 다방이나 카페로 변신을 했다. 

국악 레퍼토리로 손색없는 선우일선의 신민요 

오프닝은 ‘능수버들’ 유지숙 예술감독이 객석을 통해 등장했다. 흡사 모던걸로 보였지만, 여느 모던걸과는 달랐다. 경서도창을 배운 바 있고, ‘신민요를 통해서 동시대와 소통할 줄 아는 모던 걸’ 유지숙이었다. 능수버들은 흔히 노래의 첫 가사인 ‘천안도 삼거리’로 알려졌다. 왕평이 작사하고, 김교성이 작곡한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신민요로, 선우일선이 유성기 음반에 취입(1938년)해서 알려졌다. 

음반사의 문예부장에다가 영화배우의 이력을 지닌 왕평은 무대에서 공연하다 뇌일혈로 사망하면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1908.3.15.~1940.7. 31) 김교성은 신민요풍의 가요를 히트시킨 작곡가다. (1904.8.5.~1961.2.2.) 이 노래를 원래 부른 선우일선(1919~1990)은 평양 기성권번(箕城券番)을 비롯하여 출신으로, 해방 후 평양음악무용대학의 교수를 지낸 바 있다. 

선우일선이 처음 취입한 ‘조선팔경가’(1936년)은 현재 남과 북에 비록 가사는 다르나 불린다. 우리는 ‘대한팔경’이라는 제목으로 부른다. 선우일선의 노래를 언젠가 경서도창 전공자들이 ‘이 땅의 전통음악의 어법을 더욱 살려서’ 노래로 불리길 바라는 나로선, 유지숙명창의 노래가 가슴 뭉클했다. 

앞으로 선우일선의 히트곡 꽃을 잡고(1934년) 태평연(1935년) 피리소리(1936년) 주릿대치마(1939) 압록강뱃노래(1940년) 바람이 났네 (1940년) 등은 앞으로 경서도명창이 부름으로 해서 ‘전통민요’의 레퍼토리로 계속 이어져야 할 노래들이다. 앞으로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이 이렇듯 일제강점기의 ‘신민요’와 ‘신민요풍’의 노래를 잘 수용해주길 기대해본다. 

최순경을 재현한 김민경과 장효선 

‘경셩유행가’의 서도민요에선 최순경의 ‘서도 성주푸리’ ‘화투풀이’ ‘반월가’가 복원되었다. 최순경하면 배뱅이굿으로 알려진 명창이다. 1933년 9월 8일, 서도지방에서 활동하던 취순경이 경성에 와서 방송(JODK)을 통해 배뱅이굿이 부르는 게 큰 화제가 되었다. 같은 해에는 오케레코드 소속으로 성악가, 만담가, 가수와 함께 큰 활동을 했고, 서도소리 최고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1934년 9월, 시에론 레코드를 통해서 배뱅이굿(3매 1조)를 녹음해서 배뱅이굿을 삼천리 방방곡곡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최순경의 노래를 해학적으로 잘 풀어낸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의 김민경과 장효선은 서도소리의 커다란 희망이다. 실력과 끼를 겸비한 두 사람이 앞으로 일제강점기의 유성기음반속의 경서도창과 연관된 곡과 신민요를 무대에서 즐겁게 재현하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지금의 서도소리 전공자들은 거의 김정연, 오복녀, 이은관의 제자이자, 제자의 제자들이다. 앞의 세 분의 역할을 간과하는 건 아니나, 일제강점기 서도소리의 스타는 또 다른 많은 분이 있다. 특히 1930년대 서도소리의 최고스타는 장학선(1906 ~ 1970. 9. 5)이다. 서도소리로 최초의 인간문화재가 지정(1969년)이 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이듬해 유명을 달리했다. 

근대, 전통과 현대를 잇는 ‘노래의 보고(寶庫)’  

서도소리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다양한 음악적인 스펙트럼이 있는데, 이번 ‘경셩유행가’를 계기로 일제강점기의 경서도창과 신민요 등이 앞으로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의 레퍼토리로 정착하길 희망한다. 우리는 국악을 구분할 때, ‘전통’과 ‘현대’로 이분을 하지만, 그 사이에 ‘근대’가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근대의 유성기음반 속 노래 중에는, 지금의 우리들과 즐겁게 소통할 노래들이 너무도 많이 숨겨져 있다. 근대의 유성기음반은 우리 노래의 보물창고와 같다. 1920년부터 해방 이전까지의 국악은 그대로 대중음악이었다. 유성기 음반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런 레퍼토리를 잘 수용한다면, 국악이 앞으로 더욱 친근한 모습으로 국민의 가슴 속에 파고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