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舞林의 고수, 호남춤의 명인 한진옥
[성기숙의 문화읽기]舞林의 고수, 호남춤의 명인 한진옥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3.09.13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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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동작』 40여 년 집요한 탐구 소산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한진옥(韓振玉 1910~1991)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한진옥의 존재를 처음 안 것은 1990년대 초반 무렵이다.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 재직 시절, 전국의 전통춤꾼을 현장조사하게 되면서 한진옥을 접하게 되었다. 전남 나주 출신 한국민속무용학의 거목 정병호 선생이, 한진옥을 일컫어 이매방에 버금가는 호남을 상징하는 춤꾼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신 기억이 새롭다.  

한진옥은 전남 곡성 옥과 출신으로 호남지역 고유의 전통춤을 보존 계승하는데 일평생을 바쳤다. 그는 1910년 옥과에서 3남 5녀중 셋째로 태어났다. 부친 한상학은 무악예인으로 꽤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해금을 비롯, 가야금은 물론이요 창에도 출중한 재능을 지녔다. 여러 형제들 중 한진옥 본인과 여동생 한애순이 국악 예인의 길을 걸었다. 

한애순은 오빠 한진옥을 통해 목을 틔웠다. 11세 때 오빠에게 소리 공부를 처음 시작한 한애순은 월북한 명창 박동실에게 입문하여 판소리를 사사받고 동일창극단, 화랑창극단 등에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 고음반에 판소리를 취입했을 정도로 소리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1974년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호 남도판소리 흥보가의 예능보유자 반열에 올랐다. 그만큼 소리에 탁월한 재능을 지녔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렇듯 한진옥·한애순 남매가 일찍이 국악명인으로 명성을 날린 것은 집안 내력인 것으로 보인다. 양친 모두 무악명인으로 활동한 터라 늘 춤과 장단이 함께하는 환경에서 자랐다. 사랑방에는 인근에서 활동하는 향토예인들이 자주 모여 춤과 장단 등을 연마하면서 즐겼다. 이런 풍경을 보고 자란 한진옥은 옥과보통학교 입학 시절부터 재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부친은 이런 아들의 재능을 반기기는커녕 경계와 우려의 시선으로 꿈을 차단시켰다.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당시 정서에서 광대 혹은 창우로 산다는 것은 일종의 고통이요, 멍에였기 때문이다. 사회적 천대와 멸시를 견뎌야하는 직업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의 부친은 아들의 꿈을 막아야만 했다. 부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진옥은 국악예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운명은 부친의 뜻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체념한 부친은 후일 아들의 민속예능 교육을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호남의 국악명인 한진옥의 배움의 내력은 실로 화려하고 풍성하다. 우선 당대 최고의 명창 장판개에게 입문하여 소리를 배웠다. 홍보가 중 ‘박 타는 대목’까지 익혔다. 한진옥의 스승 장판개는 소리뿐만 아니라 거문고, 피리, 대금 그리고 고법을 익혀 고수로도 활동했다. 고종으로부터 참봉(參奉)이라는 벼슬을 하사받았을 정도로 명인의 반열에 있었다.  

한편, 17세 무렵에 명무 이장선에게 입문하여 춤과 가야금 등 여러 악기를 배웠다. 이장선은 호남을 벗어나 궁중어전 출입이 잦았다. 한진옥이 이장선에게 배운 춤을 실로 다양했다. 예컨대, 승무를 비롯 바라춤, 살풀이춤, 화관무, 범패무, 검무 등을 익혔다. 

한진옥이 당대 최고의 예인들을 사사할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배경이 있었다. 그의 출생지 옥과는 작은 소도시에 불과했으나 호남의 예인들이 자주 모이는 읍향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고향 옥과에는 권번이 존재하지는 않았으나 조선말엽 국악예인들의 출입이 잦았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한진옥은 가무악 배움의 기회를 쉽게 얻을 수 있었고 전통의 안목 또한 한층  숙성돼갔다.

전통춤판에서 이띠보라는 이름은 매우 낯설다. 그러나 호남의 민속판에서는 꽤 알려진 명무로 통한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부친은 아들 한진옥에게 보다 전문적인 배움의 길을 터주기 위해 이띠보를 초빙하여 집에 머물게 했다. 순전히 한진옥을 위한 배려였다. 한진옥은 그에게 승무, 살풀이춤을 사사했다. 

한편, 한진옥은 신갑도, 이창조와 인연 맺으면서 보다 다양하고 심도있는 배움의 기회를 갖는다. 신갑도는 한마디로 검무의 명인이었다. 그는 이른바 팔도(八道)의 검무를 보유했을 정도로 칼춤의 명인으로 통했다. 한진옥은 4검무 형식으로 검무를 배웠다. 검무는 짝수 형식만 고수하되, 형편에 따라 얼마든지 무원의 숫자는 증감이 가능했다. 대무로서 짝수 형식을 일깨워 준 신갑도의 검무 법식을 고수한 한진옥의 호남검무는 4검무 형식으로 정립되어 전수된다. 신갑도의 당부를 체화하고 구현한 결과의 산물인 것이다.  

한진옥은 이창조 문하를 거치면서 보다 높은 경지의 춤의 명인으로 발돋움한다. 순천 태생의 이창조는 호남 일대를 주유하며 가무악을 가르쳤다. 한진옥이 이창조 문하에서 배운 춤은 승전무, 줄승무, 황진무 등이었다. 노승무라 불리는 이른바 줄승무는 줄타기 하면서 춤추는 독특한 형식의 춤이다.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서려있는 줄승무는 아무나 출 수 있는 춤이 아니었다. 춤의 고수가 아니면 제대로 소화할 수 없는 고난도의 춤이기 때문이다. 

노승무 관련 흥미로운 일화가 전한다. 한진옥은 열 여섯 살 때 6세 연상의 여인과 결혼했는데, 아내는 바로 월북한 명창 박동실의 친여동생 박설초였다. 박설초는 한진옥이 노승무(일명 줄승무) 추는 모습에 매료되어 혼인을 결심했다고 전한다. 예사롭지 않은 춤 실력을 지녔음을 웅변하는 사례다.

한진옥의 춤 스승 중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이는 바로 신방초이다. 신방초는 한진옥과 같은 옥과 출신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존재다. 명무이자 명창으로 널리 알려진 신방초의 기예는 친척 관계에 있는 신영수에게 전해졌고 신영수는 고창 태생의 안두은에게 물려줬다. 안두은에서 이장선을 거쳐 한진옥에게 이르게 된 것이다. 명실공히 호남춤의 정통계보라 할 수 있다.  

한진옥의 춤 스승 면면을 보면, ‘하늘이 내린 춤꾼’으로 추앙되는 이매방의 스승과 겹쳐진다는 점에서 공교롭다. 이매방과의 차이를 꼽자면 춤활동 여정이다. 이매방이 일찍이 중앙 무대로 진출하여 명무로 발돋움하면서 승무(제27호), 살풀이춤(제97호) 두 종목의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반열에 오른 반면, 한진옥은 일평생 초야에 머물며 무림(舞林)의 고수로 일관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 누구보다 화려한 배움의 내력이 있는 한진옥은 호남을 떠나본 적 없이 고향에서 지역 고유의 전통가무악 전통을 보존 계승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오늘날 한진옥의 예맥은 다소 왜소한 편이다. 호남춤의 고유성을 간직한 향토춤꾼 한진옥을 반추하며 그의 존재론적 의의를 새삼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