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 김구림 작가 “나는 작가로 태어난 사람, 시대가 나를 이끌어”
[Special Interview] 김구림 작가 “나는 작가로 태어난 사람, 시대가 나를 이끌어”
  • 이은영 발행인ㆍ이지완 기자/김바울 사진기자
  • 승인 2023.09.13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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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하는 것 하고 싶지 않다, 내가 하고픈 것 하다 죽을 것”
미술, 연극, 무용, 문학, 음악, 영화 모든 예술장르 아울러
테이트 모던 등 세계 유수 미술관 작품 소장, 해외서 더 인정받아
일본판화비엔날레서 ‘판화는 복제 위한 제작방식’ 관념, 전복하다
미술관과 문화재청의 이해 부족, ‘현상에서 흔적으로’ 재현 못 해 아쉬움
MMCA서울 《김구림》展, 내년 2월 12일까지, “내 마지막 전시회라고 느껴”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ㆍ이지완 기자/김바울 사진기자] MMCA서울관에서 개인전을 열게 된 한국 실험미술가이자, 전위미술의 선구자인 김구림 작가는 전시 개막 전 기자간담회에서 “이 전시회에 ‘아방가르드’는 없습니다”라고 작심한 발언을 뱉었다. 전시 준비 기간 중 미술관과의 갈등에 대한 발언이었지만, 동시에 ‘김구림’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전위적인지 느낄 수 있는 발언이었다.

▲1970년 《제1회 AG전: 확장과 환원의 역학》에서 공개된 <현상에서 흔적으로>(플라스틱 상자, 얼음, 투명지, 170 x 120 x 20 cm (3). 작가 소장) 작업을 마주하고 있는 김구림 작가, 뒷편의 회화 작품은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90년대 미국에서 작업한 작품들이다.  ⓒ김바울 사진 기자

김구림을 잘 모르는 사람은 구순을 바라보는 김구림 작가의 <음과 양> 시리즈를 보고 그가 젊은 작가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전위의 선상에 서있었고, 시대의 감각을 온전하게 흡수하고 있다. 김구림 작가 본인은 ‘아방가르드’가 없다고 했지만, 현재 MMCA 《김구림》展을 보는 사람들은 ‘김구림=아방가르드’라고 인식하게 된다.

김구림은 해외에서 먼저 눈여겨본 작가다. 김구림의 작품은 테이트 모던(런던, 영국), 테이트 라이브러리 스페셜 컬렉션(런던, 영국), 오사카 예술센터(오사카, 일본), 홋카이도립 근대미술관(삿포로, 일본),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후쿠오카, 일본),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뉴욕, 미국) 등에 소유돼 있으며, 테이트모던 미술관에선 김구림의 아카이브도 구축하고 있다. 지난해엔 6월 15일자 미국 뉴욕타임즈에 “A Founding Father of Korean Multimedia(한국 멀티미디어 창시자, 마스트리히트에 오다)”라는 제목으로 김구림의 예술 세계와 그의 최근작을 심도 있게 다룬 전면 기사가 보도되기도 했다.

김구림은 현세대와 함께 동시대를 함께 살아나가고 있지만, 한국 실험미술의 첫 페이지를 연 인물이다. 그의 지금까지의 예술 세계를 담아내고, 동시대 청년들과 함께 호흡해 공연예술을 완성해낸 이번 전시는 우리가 몇 번 만나볼 수 없는 감각과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구림 전시 연계 공연 무용<무제>와 음악<대합창> ⓒ김윤재(코코아픽쳐스) (사진=MMCA 제공)

지난 7일에는 전시와 연계한 공연을 올렸다. 영화-무용-음악-연극, 총 4가지 파트로 구성됐으며, 무용-음악-연극에는 출연자가 무려 70명이나 되는 대형퍼포먼스였다. 공연이 열린 당일 MMCA다원예술공간은 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사전 예약을 하지 못한 관람객들은 혹시나 중간에 생길 빈자리를 기다리며 공연장 밖을 지켰다. 파트별 프로그램이 종료될 때마다, 미술관계자들과 함께 많은 인파들이 입장하는 진풍경을 만들었다. 70년 대 작품을 재현했지만, 현재도 여전히 기발한 의상과 퍼포먼스였다.

김구림의 작품은 즉각적으로 들어오는 표면적 이미지를 넘어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이론들을 알게 되면 더욱 다르게 보인다. 작품의 층위가 존재하고, 오래 마주할수록 그 하나의 겹을 넘어서고, 알아갈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작품은 즉각적인 감정을 강렬하게 전하기도 한다.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김구림은 백남준과 ‘미국 시절’부터 작품으로 활발한 교감과 교류를 이어갔다. 1970년 《제 1회 서울국제현대음악제》에서 백남준 작품 <피아노 위의 정사>를 연출하기도 했으며, 1975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백남준과 <Rencontre International Ouverte de Video>를 출품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크리스마스 파티도 함께하던 친밀한 사이였다.

MMCA서울 《김구림》전시 개막 후, 지난달 30일에 평창동에 있는 김구림 작가 작업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거동이 불편한 모습이었지만, 인터뷰를 이어갈수록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렸다. 어떤 작품을 만들 때, 어떤 발상으로부터 시작됐는지 그는 생생한 기억을 되짚어 들려줬다. 이번 전시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은 김구림을 ‘총체예술가’라고 명명했다. 하나의 장르와 하나의 주제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김구림’으로는 설명할 수 있는 그의 예술 세계였다. 이번 인터뷰 역시 ‘총체예술가’로서의 김구림을 만나고자 했다. 미술만이 아닌 영화감독, 연출가, 의상과 무대디자인까지 아우른 그의 모습을 담아봤다.

▲미국 시절 파티를 즐기고 있는 백남준과 김구림 (사진=김구림 작가 제공)
▲미국 시절 파티를 즐기고 있는 백남준과 김구림 ⓒ임영균 (사진=김구림 작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1958년 대구 공보관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갖고 약 66년 만에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이다.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내 마지막 전시회가 될 것 같다. 아쉬운 점도 있다. 내가 평생 보여주지 못한 작품이 있었는데, 그것을 보여주지 못한 점이다. 장소가 내게는 너무 비좁았다. 그래도 그간 내가 늘 염원하던 것이 조금은 이뤄진 지점이 있다. 공연 예술이다. 옛날에 극단, 무용단에도 몸을 담고 연출도 했었다. 항상 생각해오던 것을 죽기 전에 몇 컷이라도 영상으로 남길 수 있게 돼 정말 큰 성과라고 느낀다. 그림은 내가 죽고 난 이후에도 전시회를 할 수 있는데, 공연 작품은 내가 살아있을 때 직접 해야 하기 때문이다. 후대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김구림이 이런 작품도 했다는 것을 남기는 것에 의의가 있다.

이번 전시에서 김구림 작가를 ‘총체예술가’라고 명명했다. 이 호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나는 별로 신경을 안 쓴다. 제 3자들이 붙이는 이름이니까. 그렇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고, 좋은 것 같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번 전시에서 공연예술을 선보인다. 연출, 무대 미술, 의상 등 모든 영역을 아우른다.

이번 전시를 통해 선보이는 공연은 모두 다 내 작품이다. 연출, 무대 미술, 의상 모든 것을 내가 다했다. 나는 알다시피 미술대학을 중퇴했다. 미술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으니까, 주위에 이런저런 예술을 하는 사람들을 알게 됐다, 장르 상관없이 연극, 음악, 무용, 문학 등 두루두루 사람들이 주위에 많이 모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론에 호감을 감고 있는 예술인들이 많았다. 그래서 책도 같이 사보고, 연출도 하게 되고, 무용도 하게 됐다. 당시 무용하던 지인들이 미술계에서 무용계로 넘어오지 않겠냐는 얘기도 많이 했다.

나는 한군데 빠지면, 내 것으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한 성격이고, 호기심이 정말 많다. 미술하고 무용은 맛이 틀리다. 그래서 연극이고 무용이고, 전부다 하게 됐다. 문학도 마찬가지였다. 수필 문학지에 글도 많이 실었고, 그렇게 이어령 선생이랑도 연이 닿았었다. 미술에 대한 글은 <공간>지에 많이 썼다.

특별히 다른 분야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미대를 중퇴하고 보니 주류와 싸워서 이기기 위해선 말이 아니라 글과 이론으로 남겨야한다고 느꼈다. 이론 공부 없이는 남한테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책을 많이 보고 이론 공부를 많이 하고 글을 많이 썼다. 그런 과정에서 주위 예술가들과 미술에 대한 토론을 하고, 대학에선 못 배운 것을 내가 젊은이들과 함께 나누니까 점점 주위에 사람이 많아졌다. 새로운 것을 하겠다는 젊은이들이 나의 이론과 지식에 공감했고, 그렇게 내가 총수가 돼 ‘제 4집단’을 만들 수도 있었다.

▲카메라 렌즈를 지팡이로 가리키고 있는 김구림 작가 ⓒ김바울 사진 기자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물질문명의 부산물을 이용한 오브제 작업들을 선보여 왔다. 피, 해골, 여성의 나체 등으로 콜라주 작업을 펼쳤는데, 선정적이고 파격적인 오브제들이 많다.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지.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내 작품을 보고 젊은 작가의 작품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나중에 내 나이가 이렇게 많다는 걸 알면 깜짝 놀라곤 한다. 나는 시대가 변하면, 인간의 사고가 변하고, 그렇기엔 작품도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인간들은 굉장히 순수성이 있었다. 그런데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순수성이 없어지고 두려움이 없어지고 범죄행위가 더 많아진다. 어떤 두려움이라는 게 없어지고, 범죄 행위가 더 극대화되는 것을 느꼈다. 내가 뉴스를 보면서, 그런 사회를 많이 접하게 됐고 자연스럽게 내 머릿속에서는 이전과 다른 발상들이 떠오르게 된다. ‘내가 이것을 해야 되겠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작품을 한 적은 없다. 시대가 나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나갔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에서 <음과 양: 자동차>, <음과 양> 미디어 설치 작업을 제작했다. 대형 설치작이었는데, 어떤 작품이었나. 그리고 신작을 공개하는 데에 있어서 즐거움도 있었는지.

자동차 작업을 보면, 아주 반짝거리는 금덩어리의 자동차가 두 쪽 나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부에 대한 욕망들이 표현된 것이다. 그리고 두 쪽 난 자동차 가운데에 있는 와인통과 주위에 널브러진 아이의 신발은 죽음을 담고 있다. 굉장히 상대적인 것이다. 부와 생명의 가냘픔 같은 것을 결부시켜봤다. 얼마 전 롤스로이드 급발진 사고 같은 것을 마주하게 되면서 작품을 생각하게 됐다. 물질문명이 극대화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자동차를 아주 편리한 수단이자 도구로 사용해왔는데, 그 정체가 반전되기도 한다. 하나의 물질이 그 자체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도 다변화되고 여러 가지 정체성을 갖게 된다고 봤다.

그리고 신작을 만드는데, 옛날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젊었을 땐 즐거움 같은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몸이 아파서 그런지 고통밖에 없었다.

▲MMCA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신작 <음과 양 : 자동차> (2023, FRP, 돌, 오크통, 신발, 가변크기. 작가소장)를 바라보고 있는 김구림 작가 ⓒ김바울 사진 기자

판화 작업도 열심히 했다. 판화는 복제를 위한 제작방식이라는 관념을 정복하면서 판화의 정의를 재고하는 작업을 선보이는 등, 새로운 흐름을 만들기도 했는데, 관련된 이야기가 궁금하다.

일본에서 먼저 판화를 공부했고, 이후에 파리에서 공부를 더 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판화는 목판화 밖에 없었는데, 내가 새로운 기법을 배워서 공개하니 많은 이들이 놀랐다. 1974년 《제9회 도쿄국제판화비엔날레》에 한국 대표 작가로 선발돼 작품을 출품했다. 아마 내가 한국에 있었다면 그런 작품은 못 냈을 것이다.

내가 일본에 있으면서, 판화에서 도저히 생각지도 못한 설치 판화를 해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백화점에서 구매한 식탁보 위에 걸레와 물의 흔적을 실크스크린으로 찍어서 작품을 완성했다. 그것을 들고 비엔날레가 열리는 일본 근대미술관으로 갔다. 그런데 출품하려고 하니까 작품을 받아주는 이가 ‘작품이 왜 액자에 없냐, 이게 무슨 판화냐’라고 물었고, 나는 ‘난 이것이 판화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일단은 내가 나라에서 선정한 작가니까 비엔날레에서는 그대로 받아줬다. 그것 이외에도 방석 두 점을 했다. 방석을 만들어서, 엉덩이 모양으로 누렇게 땀에 절어있는 것 같은 것을 실크스크린으로 찍은 작품이었다.

결론적으로 그 비엔날레에서 그랑프리는 미국 작가가 됐는데, 석연치 않은 지점들이 있는 심사였다. 수상자도 원래 예정됐던 날보다 늦게 발표됐었다. 비엔날레가 개막하고 내가 전시장으로 들어서니 모든 평론가들이 우르르 내 앞으로 몰려들었다. 한 평론가가 “당신 때문에 수상자 발표가 늦어졌다”라고 말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 작품과 미국 작가가 최종 경합이붙었는데, 심사위원 구성에 한국은 없고, 미국은 포함돼 있어서, 그쪽으로 힘이 쏠렸다는 것이었다. 그 때 한 평론가는 내게 “어떻게 그런 것을 판화라고 낸거냐, 사실 그랑프리는 당신이 타야 될 상이었다”라고 말했다.

판화의 기원을 찾아가보면, 고대로부터 판화는 작품을 갖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작품을 못 거는 사람들을 위해 에디션을 제작하기 위함이었다. 현대 판화에서는 모든 것이 기계로 돼서 복제가 쉬워졌다. 그렇다면 이제는 판화는 복제를 위한 제작방식이라는 관념을 전복하고, 새로운 판화를 지향해야 한다고 봤다. 실크스크린으로 제작된 스카프도 일종의 판화다. 하지만 그것은 예술이 아니고 상품으로 취급받는다. 나는 그런 상품을 어떻게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래서 그런 작품을 만들었고, 난리가 났었다.

일본에는 1년에 4번 발간되는 <계간 판화>라는 잡지가 있다. 비엔날레가 끝나고 서점에서 그 <계간 판화>를 봤는데, 내 작품이 잡지 전면에 컬러로 인쇄돼 있었다. 그리고 다음 장에 도쿄판화비엔날레 기사가 있었는데, 그랑프리를 받은 작품은 그 면 한 구석에 흑백으로 넣어놨다. 그 기사를 보니까 비평가가 했던 말을 믿게 됐다. 내가 상을 타야했다고 말한 비평가는 “원래 그랑프리는 당신이어야 했는데, 국력 때문에 타지 못한 것이다. 당신 나라의 심사위원이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당신이 탔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땐 그런 일도 있었다.

▲《제9회 도쿄국제판화비엔날레》에 출품한 설치 판화, 김구림, 걸레, 1974, 식탁보에 실크스크린, 74 x 120 x 70. 작가 소장. (사진=MMCA 제공)

판화에 대한 책도 여러 권 집필했다.

우리나라에 판화에 대한 번역물을 많은데, 기법에 대한 올바르고 새로운 저서를 낸 사람은 나밖에 없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보니, 메이저 화랑에서도 인쇄물을 뽑아놓고 판화라고 속이고 팔고 있었다. 그걸 보니 이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2007년에 『판화 Collection』(서울: 서문당)이라는 책과 2014년에 『서양판화가 100인과 판화감상』(파주: 미진사)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판화는 유화를 보는 것과는 다르게 기법의 미묘함도 봐야 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유화를 보듯 판화를 해석하려고 했다. 그래서 판화 감상 책을 썼다.

《제9회 도쿄국제판화비엔날레》(1974년) 이후, 《제 3회 동아국제판화비엔날레》(1981년) 초대 작가로도 임명됐다. 당시 여러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도쿄비엔날레에 출품한 작품과 비슷한 형식의 작품을 출품하려 했다. 그런데 평론가 9명 정도가 ‘이것은 판화가 아니다’라면서 전시를 거부했다. 나는 어떻게 초대작가 작품 전시를 안 할 수 있냐며 항의도 하고, 가처분 신청도 했지만, 변호사가 못 도와주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조선일보에 내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펑론가 9명 중에 누가 김구림과 글로 대적할 것인지 관심이 집중됐고, 초대 서울시립미술관장이었던 유준상 평론가가 글을 썼다. 유 평론가의 글에 반박하는 글을 박서보가 경향신문에 썼더라. 내 편을 드는 글을 쓴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당시 박서보는 미협이사장 선거에서 상대 후보를 지지한 나를 경원시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럼에도 그 이후 2013년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때도 찾아와 주었다.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김구림 작가 ⓒ김바울 사진 기자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김구림 작가 ⓒ김바울 사진 기자

김구림은 언제나 선구자였다. 항상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왔다. 어떤 신념이 있었던 것인가.

어릴 때 자라나면서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부잣집의 외동아들로 자라나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모든 것을 다하고 자랐고, 남한테 절대 굴하지 않고 내 고집대로 하면서 자라났다. 또 어머니께서도 내가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말리지 않고, 다 도와줬다. 어릴 때부터 나는 책을 정말 좋아했는데, 새로운 책을 보면 참지를 못했다. 그래서 새로운 책만 나오면 서점에 가서 외상까지 해서 가져가곤 했는데, 어느 날 보니 그 외상값이 너무 많아져서 갚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안 가다가 다시 서점에 갔는데, 외상으로 가져간다고 말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래도 가져가겠다고 하니까 서점 주인이 흔쾌히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어머니가 이미 서점에 와서 그 빚을 다 갚고 간 것이었다. 그렇게 책을 정말 많이 읽었다. 새로운 것을 공부하는 게 너무 좋았다.

왜 그렇게 책을 좋아하게 됐는가보면, 아버지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아버지는 늘 집을 비우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항상 집에 돌아올 때면, 책을 사들고 왔다. 정말 여러 가지 종류의 책을 봤다. 과학, 예술 등등 잡다하게 봤던 것 같다. 세계문학전집도 다 읽었고, 그런 지식이 내 머릿속에 오래 남게 된 것 같다.

나는 남이 하는 것은 싫었고, 흉내 내는 것도 싫었다. 미술을 공부하겠다고 대학에 들어갔지만, 중퇴를 하면서 예술로 먹고 사는 것은 그때 그만뒀다. 예술이 아니라도, 남들이 미친 짓을 한다고 생각해도 좋으니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다 죽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다보니 남들이 ‘전위’라는 말을 붙이기 시작하더라.

‘김구림’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음악’이다. 음악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다.

내가 돈이 처음 생겼을 때 가장 먼저 산 것이 오디오였다. 조그마한 턴테이블이 있는 것을 사서, 음악을 들으면서 거기에 푹 빠져있었다. 오디오를 너무 좋아하다보니, 오디오 조립도 정말 많이 해줬다. 사람들이 대부분 오디오만 좋은 것을 쓰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오디오 뿐만 아니라 스피커는 물론이고, CD나 레코드판도 아무것이나 쓰면 안 된다. 명반을 사야한다.

예를 들어서 베토벤 ‘운명’을 사러 CD점에 간다고 치면, 가게에는 3,40개의 CD가 있다. 이 중에 뭘 골라야 할지 모르는데, 가장 먼저 베토벤을 가장 연구를 잘 한 지휘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그 지휘자를 찾고 나면, 그 지휘자의 전성기를 찾아야 한다. 초기의 지휘인지, 중기의 지휘인지 찾아야 한다. 그러면 끝인가? 아니다. 그 다음엔 지휘자와 베토벤 운명을 가장 잘 소화하고 연주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를 찾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음반은 연주를 아무리 잘해도, 녹음이 시원치 않으면 명반이 될 수 없다. 결국 이 모든 것과 맞아떨어지는 음반회사가 어디인가, 그것까지 확인해야 한다. 내가 그렇게 하나하나 다 찾아가면서 모은 것이 지금 내 집에 있는 명반이다.

나는 무엇이든 막 파고들어간다. 공부를 해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좀 줄이자면 오디오와 앰프의 합도 좋아야한다. 어떤 스피커를 쓰고, 어떤 케이블을 써야하는지 다 다르다. 어떤 케이블은 하나에 500만 원씩 하기도 한다. 음을 손상 없이 전달시켜줘야 하기 때문이다. 음악을 듣는 것도 훈련이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전시. 김구림의 <구겐하임을 위한 현상에서 흔적으로>(2021). (사진=김구림 작가 제공)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로 작품을 선보인다. 한국의 아방가르드 선구자로서, 아방가르드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전시하는 것의 의미와 소회가 궁금하다.

나는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구겐하임에서는 각 나라의 아방가르드 전을 해왔다. 2013년에 일본 구타이(GUTAI) 그룹의 기획 전시로, 일본 아방가르드 전시를 먼저 선보였다. 당시 내가 직접 가보진 못했지만, 좋은 전시였다. 작가 선정을 잘 하고, 작품 선정도 잘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진짜 들어갈 사람은 못 들어가고, 거기 들어가서는 안 될 사람을 들여놓고 해서 좀 망신스럽다. 내 작품만 해도 아방가르드적 작품이 하나도 출품되지 않았다. 자기들 입맛대로 작품을 골라놨다. 과연 그 전시로 뉴욕에 가서 우리나라의 어떤 아방가르드를 전시 행세를 할 수 있을지 상당히 의문스럽다. 그리고, 구겐하임이 그렇게 아방가르드한 미술관도 아니다. 그래서 내가 거기에 대해서는 기대하지 않는다.

1970년에 보여줬던 미술관을 광목천으로 감싸는 설치 작품 <현상에서 흔적으로>를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고자 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지난달 24일 간담회에서 이에 대한 질문을 했었고, 전시기간 중 설치를 검토해 본다고 했는데, 이후 미술관과 소통이 있었는가.

일단 <현상에서 흔적으로>으로는 미술관을 묶고 염을 하는 작업이다. 지금 미술관에서는 자기들이 상상을 하는 것이다. 건물에 나사를 박거나 해야 한다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그런 것은 필요 없다. 그냥 무거운 돌로 아래를 고정시키고, 천만 끈처럼 감아두면 되는 것이다. 건물에 아무런 손상이 되지 않는다. 건물 위에 나사로 고정할 필요가 없고, 비가 오면 광목천이 건물에 쫙 달라붙어서 그냥 끈이 감기는 것과 같은데, 이상한 상상을 하고 있다. 예산이 없으면 내 돈으로라도 하겠다는 얘기를 했지만 전혀 소통이 안됐다. 그냥 내가 잊으려고 한다.

구겐하임에선 <현상에서 흔적으로>으로의 재현은 못하더라도,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초대장에 내가 구겐하임에 재현하고자 한 <현상에서 흔적으로> 스케치를 삽입해줬다. 그런데 국립현대미술관은 그런 것도 하나 안 해주고 있다. 이런 것을 국현 홍보과에서 좀 알려야 하는데, 하나 신경을 안 쓰고 있다.

▲생각에 잠긴 김구림 작가 ⓒ김바울 사진 기사
▲생각에 잠긴 김구림 작가 ⓒ김바울 사진 기사

앞으로의 전시 계획은 어떻게 되는가.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전시가 내년 1월 7일까지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리고, 내년 2월 11일부터는 미국 LA 해머미술관에서 개최된다. 이외에는 계획이 없다.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은가.

열심히 했던 예술가. 돈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면서 참으로 열심히 작품에만 열중하다가 간 작가로 기억해주길 바란다. 내가 작품에 대한 욕심이 참 많았다. 그냥 캔버스 작품만 하고 돈 벌고 거래하면 좋은데, 설치에다가 퍼포먼스를 하고 오브제 작품, 공연 작품까지 하고 싶었다. 그 욕망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래서 평생 내가 생각해도, 나는 작가로 태어난 사람이구나 하는 걸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