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관객참여형 미술의 증가와 새로운 미술관에 대한 사회적 요구Ⅱ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관객참여형 미술의 증가와 새로운 미술관에 대한 사회적 요구Ⅱ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3.09.13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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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지난호에 이어서>

물론 ‘동시대의 현대미술’이다. 1974년 [대구현대미술제]의 창립 이후 대구가 가꿔 온 현대미술의 높은 이상과 비전이 담긴 현대미술관으로서의 경북도립미술관. 이는 향후 도래할 인류의 높은 정신적 교감을 위한 터전으로서의 ‘문화적 보루’라는 인식과 맞물려 경북도립미술관의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현대성은 동시대의 문화적, 사회적, 정신적, 기술적, 과학적,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심리적 요인을 두루 포괄하는 매우 폭넓은 개념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등장 이후, 현대는 발달한 통신매체로 인해 그동안 수동적인 존재로 간주돼 온 관객이 미술의 문화를 주도하는 시대이다. 트위터를 비롯하여 얼책(facebook), 인스타그램, 블로그 등등 SNS 매체로 무장한 스마트폰 시대의 관객은 문화의 민주화 시대를 보다 개방적으로 열어가는 주체이다. 아니 그냥 단순한 주체가 아니라 ‘주체세력’이 돼 가고 있는 중이다. 이른바 ‘1인 언론’이 모여 다중(多衆)을 구성하는 ‘디지털’ 중심의 새로운 사회는 과거의 ‘아날로그’ 언론이 주도하던 일방적 소통방식에서 SNS 기기를 손에 든 각 개인이 정보의 생산, 소비, 유통을 주도하는 시대로 변화해 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전술적인 측면에서 볼 때, 분명 새로운 형태의 공성전(攻城戰)임에 분명해 보인다. 국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른바 동서문명/문화의 전쟁, 가령 동양과 서양의 문화예술적 교류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세력 다툼과 갈등, 정복 등과도 무관치 않다.

내가 늘 주장하듯이, 동양과 서양 간의 민주적이며 이상적인 문화예술적 대화는 과거의 경우에서 보듯이 서양의 일방적 우세 상태에서는 요원한 것이다. 나는 이를 일러 ‘높은 산(서양)을 깎아 골짜기(동양)를 메우는 일’로 묘사한 바 있다.5)

Ⅳ.

미술관은 과거처럼 인류의 창조적 산물인 미술작품을 수집, 전시, 보존, 관리하는 단순한 차원에서 벗어나 인간의 창의성을 북돋우는 보다 개방적이며 열린 차원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퍼포먼스나 미디어아트에서 보듯이, 관객참여는 예술작품의 중요한 요소로 부상된 지 오래다. 그것은 근대(modern) 이전의 전근대(premodern)을 지향한다. 선사시대의 공동체 사회에서 구성원들이 모두 협력하여 식량인 들소를 잡았듯이, 그리고 안식처인 동굴 속에서 벽면에 들소를 그려놓고 그 주변을 돌며 축제를 벌였듯이, 동굴의 진화된 형태인 오늘날의 미술관은 다시 축제의 장소로 환원되지 않으면 안 된다. 화석화된 미술품의 거소가 아니라, 생동감 있고 늘 활기에 찬 배움터, 하루의 피로를 풀고 새로운 활력을 얻어가는 곳이 돼야 할 것이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미래의 주역인 어린이들이 마음대로 자기를 표현하며 놀 수 있는 어린이미술관 하나쯤 덧붙이면 더할 나위 없겠다.


5) 이 문제를 논한 글로는 필자의 다음 논문을 참조할 것.

기조논문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역사와 비평>, 미술사학보 제49집, 8-26쪽, 2017.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