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석의 컬렉션 비하인드] 나주, 프랑스를 수집하다.
[윤태석의 컬렉션 비하인드] 나주, 프랑스를 수집하다.
  • 윤태석 남평문화주조장 대표
  • 승인 2023.09.13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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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석 남평문화주조장 대표(예술감독)/문화유산국민신탁 자문위원

‘얼마나 고운 인연이기에 우리는 만났을까요? 내 영혼의 고향인 당신을 향해갑니다’(피천득의 수필집 「인연」중에서)

1851년 4일(프랑스 기록은 2일) 채 동도 트지 않은 이른 아침(卯時), 나주목 비금도 서쪽 예미포(曳尾浦)에 프랑스어선 나르발(Narval)호가 좌초됐다. 구름이 다소 끼긴 했지만, 봄기운을 실은 초속 12m의 북서풍과 남동풍이 교차하며, 2m 높이의 파도가 해안을 치고 내리던 평범한 날씨였다.

1833년 프랑스 바욘(Bayonne)항에서 건조되어 대서양과 인도양을 누볐던 495t급 포경선이 1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는 순간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비금도 풍헌(風憲) 양선규(梁善圭) 일행이 급히 가 살펴보니 29명의 선원을 실은 이양선(異樣船)이다. 자초지종을 묻고 싶었으나 말이 통하지 않아 어디서 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양선규는 나주 목사를 겸하고 있던 남평(南平, 지금의 나주시 남평읍) 현감 이정현(李政鉉)에게 이 사실을 보고(文狀)한다. 곧바로 이정현은 전라 감사 이유원(李裕元)에게 전하자 조정에 장계(狀啓)한다. 상황 파악을 위해 4월 12일 이정현 등이 현장에 도착해 이양선에 남아있던 선원을 둘러보니 모두 남자다. 때는 9명의 선원이 비금도를 탈출한 3일 후였다.

한편 나르발호 선원 9명은 선장도 모르게 탈출을 감행한다. 떠나기 전에 이곳이 어딘 줄은 알아야 했다. 주민들에게 묻자 ‘티오상(Tio-sang)’이란다. 19세기 조선의 한글 발음 ‘됴션’이다. 이것만 알고 이들은 4월 9일 탈출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중국 우쑹(吴淞)항을 통해 상해주재 프랑스 영사관에 도착한다. 탈출 열흘(4.19)만의 일이다.

▲나르발호, 프레데릭 후(Frederic Roux) 작, 1836년 (사진=윤태석 제공)
▲나르발호, 프레데릭 후(Frederic Roux) 작, 1836년 (사진=윤태석 제공)

자초지종을 들은 몽티니(Louis Charles de Montigny) 영사는 티오상에 남아있는 자국 선원을 구조하기로 결심하고 비금도로 향하게 된다. 제주도를 거쳐 다도해에 도착한 몽티니 일행은 섬을 뒤지고 수소문한 끝에 상해를 떠난 지 12일 만인 5월 1일에 기적처럼 선원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날은 공교롭게도 비변사(備邊司)에서 배를 마련해 이국인들을 돌려보낼 것을 결정한 날이기도 했다.

이 목사는 당일 곧바로 몽티니 일행을 대면하고, 이들에게 만찬을 베푼다. 답례로 몽티니 영사는 다음 날 그가 타고 온 선상 오찬에 초대한다. 나주 목사의 주도하에 프랑스 영사와의 역사적인 한불 외교의 첫 장이 펼쳐진 것이다. 그리고 5월 4일 비금도 주민들의 아쉬운 환송 속에 선원들과 몽티니 일행은 떠나게 된다.

 

172년 전 한불교류, 프랑스 영사에 고급 '남평 증류주' 선물했을 듯

 

지난 8월 21일 나주시(시장 윤병태)는 172년 전 이 아름다운 한불 외교사를 재조명하기 위해 ‘나주와 프랑스의 첫 만남’을 주제로 한 학술 포럼을 개최했다. 프랑스와의 첫 인연을 수집하기 위한 물꼬를 튼 셈이다.

먼저, 우리는 나르발호의 좌초로 맺어진 이 역사적인 사실에서 그 인연의 불씨를 살려갈 매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7년 전에 나르발호 사건을 처음 발견하고 소개해왔던 엠마누엘 후(Pierre-Emmanuel Roux) 파리시테대학교(Paris Cité University) 교수는 주제발표에서 난파된 나르발호를 발굴할 것을 제안했다. 물론 꼭 필요한 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발굴의 결과물은 그 역사적인 사실만을 배태한 채 박제된 유물로 남게 될 개연성이 높다.

반면, 몽티니 영사가 초청한 오찬에서 ‘그들(조선인)은 특히 증류주에 관심이 높았다.’ 또한, 이 목사가 이들을 위해 준비한 음식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송아지 고기를 잘게 썰어 맛있는 식초에 찍어 먹은 것이었다.’는 기록, ‘나주 술은 맑고 독하다.’는 또 다른 프랑스의 기록은, 그렇고 그런 유물과는 사뭇 다른 결의 단서를 제공한다.

▲나주와 프랑스의 첫 만남, 학술 포럼 장면(나주시청, 2023.8.21) (사진=윤태석 제공)
▲나주와 프랑스의 첫 만남, 학술 포럼 장면(나주시청, 2023.8.21) (사진=윤태석 제공)

프랑스 국립세브로도자기박물관(Musée National de Céramique de Sèvres)에는 나르발호로 촉발된 첫 한불 외교의 유일한 증거물이 남아있다. 당시 이 목사가 선물한 세 점의 옹기 주병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정현은 빈 주병만을 주었을까? 손님을 대하는 우리 민족의 정서상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병이 목적이 아닌 술을 선물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고급 증류주가 담겨졌을 것이다. 한 나라의 영사에게 탁주와 같은 서민의 술은 격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먼 길을 가야 할 이들에게 알코올 도수가 낮아 보존 기간이 짧고, 누룩이나 밀 같은 주정의 원재료가 남아있어 산패가 쉬운 발효 곡주를 선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목사가 베푼 만찬장에서의 술 역시 증류주였을 가능성이 크다.

▲프랑스 국립세브로도자기박물관 소장 옹기 주병 (사진=윤태석 제공)
▲프랑스 국립세브로도자기박물관 소장 옹기 주병 (사진=윤태석 제공)

포럼에서는 ‘이정현이 남평 현감이었기 때문에 그 술 역시 남평 술이었을 것이다.’는 주장을 펼친 이도 있었다. 또한, 옹기 주병의 생산지 역시 궁금증을 유발한다. 도서 지역은 환경적 특성상 대량생산과 소비가 불가능했을뿐더러 옹기를 만드는 질 좋은 태토나 가마용 땔감 또한 수급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옹기 제작이 활발했던 나주에서 조달했을 개연성이 크다. 예컨대 이러한 콘텐츠는 나주가 중심이 된다. 이 미완의 퍼즐에 실체적 상상력을 동원해 스토리를 배접한다면 훌쩍 진화한 콘텐츠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콘텐츠가 경쟁력이 된 세상이다. 프랑스를 수집하기 위해 나주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과거가 아니라 프랑스와 영원히 함께 갈 수 있는 미래 콘텐츠에 있는 것이다.

‘인연을 살려 써라.’는 시인 구상의 말처럼 나주와 프랑스의 인연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