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스케치] ‘제주’에서 말할 수 있는 ‘이주’, 제주도립미술관 국제특별전 《이주하는 인간_호모 미그라티오》
[현장스케치] ‘제주’에서 말할 수 있는 ‘이주’, 제주도립미술관 국제특별전 《이주하는 인간_호모 미그라티오》
  • 이지완 기자
  • 승인 2023.09.21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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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립미술관 중심 4개 전시장, 11월 26일까지
국제특별전 ‘프로젝트 제주’, 9개국 20개 팀 참여
역사ㆍ문화ㆍ생태ㆍ우발, ‘이주’를 다루는 4개 주제

[서울문화투데이 이지완 기자] ‘섬’이라는 공간은 ‘이주’와 유난히 가까운 장소 같다. 육지에서 섬으로 이주하는 이들이 있고, 섬에서 육지로 이주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국가 간의 경계가 옅어지고, 태어난 곳이 내 영원한 고향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시대다.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우리는 점점 ‘이주’와 가까워지는 삶을 살고 있다.

▲지용호, 사자 Lion 3, 스테인리스 스틸, 폐타이어, 360x120x120cm, 2008 ⓒ서울문화투데이

‘이주’라는 주제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도립미술관(관장 이나연)이 2023 국제특별전 프로젝트 제주 《이주하는 인간_호모 미그라티오》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지난 19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오는 11월 26일까지 69일간 펼쳐진다. 전시에는 9개국 20개 팀(27명)이 참여해, 회화, 설치, 미디어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70여 점을 선보인다.

2023 국제특별전 프로젝트 제주 《이주하는 인간_호모 미그라티오》는 이주와 생존에 관한 이야기로, 현대사회에서 잦은 이주를 경험한 작가들의 작품이 중심이 된다. 작가들이 경험하고 고찰한 이주에 대한 시선은 온갖 위기로 넘치는 시대에 인류 생존의 대안을 제시한다. 전시에는 이주를 ▲역사적 이주 ▲문화적 이주 ▲생태적 이주 ▲우발적 이주 등 4개의 소주제로 구성하고 재해석해 다채롭게 펼쳐낸다.

전시는 제주도립미술관을 중심으로 제주돌문화공원, 제주국제평화센터, 제주항공우주박물관까지 총 4개의 전시관에서 펼쳐진다. 관람객 역시 한 공간에 머물러 전시를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제주 곳곳에 흩어진 전시공간을 찾아다니며 길 위의 여정을 경험하도록 설정한 것이 특징이다.

▲개막식에서 인사말을 전하고 있는 이나연 제주도립미술관장 ⓒ서울문화투데이

제주로 모인, 경계가 없어진 문화와 사람들

지난 19일 열린 개막식에서는 곽선경 작가의 실시간 드로잉 퍼포먼스 <보이지 않는 선들로서의 드로잉>과 오봉준✕사라 오-목크의 다양한 나라의 음식 퍼포먼스 <노이쾰른 파라디스>가 펼쳐졌다. 곽 작가의 퍼포먼스로 개막식을 시작했고, 전시 투어 이후 오봉준✕사라 오-목크의 음식 퍼포먼스로 행사가 마무리됐다.

이 날 개막식은 스탠딩 파티처럼 진행됐다. 개막식에는 전시에 참여한 작가뿐 만 아니라, 작가 가족이 함께하기도 했고 전시 스텝과 참여 작가들의 유대가 느껴지는 자리였다. 개막식에 참석한 이나연 관장은 이번 ‘2023국제특별전 프로젝트 제주’를 준비하기 위해, 지난 2년 동안 전 세계 작가들을 만나고 섭외했다고 말했다. 이 관장은 개막식에 참석한 20여 명의 참여작가를 한 명씩 호명하며, 그들의 작품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작가들과 함께 현장에서 호흡하고, 전시를 준비해 온 열정이 느껴지는 지점이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제주 출신 작가들이거나 제주로 이주를 해 온 작가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해외 작가의 경우 제주에 기반을 두고 있는 작가들과 협업을 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선보였다. 또한, 작가들 대부분이 학업이나 직업의 이유로 국가를 옮기는 이주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의 이력과 출품작에서 ‘제주’라는 공간과 ‘이주’라는 개념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생태적 이주’를 주제로 작품을 선보이는 김옥선 작가는 1995년 서울에서 제주로 이주해 현재 서귀포에 거주 중이고, ‘역사적 이주’를 주제로 오봉준✕사라 오-목크 팀은 현재 베를린에서 활동 하고 있는 팀인데, 오봉준 작가는 제주 출생으로 독일로 유학생활을 하며 사라 오-목크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문화적 이주’ 주제로 작품을 선보이는 재일한국인 3세인 현우민 작가는 도쿄에서 태어났으나, 3살까지 한국에서 거주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현 작가의 친조부모는 제주 위미리 출신으로 1940년대 후반 일본으로 이주했다. 대부분 이런 식으로 작가 본인이 제주에 뿌리를 두거나 이주를 경험한 이력을 가지고 있어, 그 개인의 역사로 전해지는 작품의 내용들이 더욱 풍부하게 관람객에게 다가온다.

▲김옥선, bsp_sph796 신부들, 사라, 디지털 C-프린트, 100x150cm, 2023 (사진=제주도립미술관 제공)

이러한 기획의 기반에는 제주 서귀포 출신이면서, 서울과 미국으로 학업을 위해 떠났다가 다시 제주로 돌아온 이 관장의 경험도 긍정적으로 작용한 듯하다. 제주의 정서와 역사를 알고, 동시에 현 시대 속의 문화적, 사회적 이주를 직접 경험한 이 관장의 시선은 전시 참여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어우러져 중심축이 돼 주고 있었다.

이번 전시 기획 길라잡이의 역할을 한 책으로 소니아 샤의 『인류, 이주, 생존』이 있다. 전시에서는 책의 일부분을 인용해 소개하면서, 전시를 보는 관람객들에게 이번 전시가 지향하고 있는 바를 전하고 있다. 책에서는 이동과 이주가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의 본능임을 강조한다. 인간뿐 아니라 동식물의 이주 사례를 과학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들려주고, 이주는 불편함도 위기도 아니고 새로운 변화의 씨앗이며, 위기의 시대에 거의 유일한 대안이 된다는 논리를 펼친다.

전시는 다양한 이주의 이유 속에서, 역사적으로 어쩔 수 없이, 더 나은 문화적인 여건을 찾아 자발적으로, 적합한 생태적 환경을 찾아, 우발적으로 공간 혹은 매체 이동을 한 경우까지 총 4가지로 이유를 정리해 작품을 선보인다. ▲역사적 이주: 도도기(逃島記) ▲문화적 이주: 입도조(入島祖) ▲생태적 이주: 토종과 외래종 ▲우발적 이주: 변종의 탄생이 그것이다.

▲박정근, 입도조_백성탄,김나니, 2023, 110x150
▲박정근, 입도조_백성탄,김나니, 2023, 110x150 (사진=제주도립미술관 제공)

‘이주’라는 단어는 쉽게 긍정적으로 판단하긴 어렵다. 사람이 나고 자란 곳을 떠나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고, 그 과정이 타의나 사회경제적인 권력의 이유로 발생했을 때는 긍정의 영역으로 볼 수 없다. ‘이주’는 이처럼 다양한 면을 갖고 있는데, 이번 《이주하는 인간_호모 미그라티오》에서는 ‘이주’가 온갖 위기가 도사리고 있는 현대에서 ‘해법’이 될 수 있다는 시선을 제안한다.

전시는 이주는 위기의 시대가 아니라 기회의 시기에 더 강력하게 일어난다고 하며,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인류는 끊임없이 이주해 왔고, 기후위기의 대안도 결국은 이주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전시가 보여주고자 하는 이 긍정의 시선이 전시에 활력을 실어주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이번 전시는 모든 생명체는 항상 움직였고 움직일 것이기에 혐오와 배제 없이 자연스럽게 모든 이주를 받아들일 것을 권하고 있다.

▲개막식에 참석한 참여 작가들 ⓒ서울문화투데이

‘이주’에 대한 고민을 풀어놓은 다양한 시선들

《이주하는 인간_호모 미그라티오》는 ‘이주’라는 주제로 정말 다양한 시선이 존재할 수 있으며, 우리 역사와 현재에 정말 많은 이주들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선 단순히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이주가 아닌 현실과 가상, 매체 간의 이주도 ‘우발적 이주: 변종의 탄생’이라는 주제로 다루고 있어서 새로움을 전한다.

지난해 MMCA 서울에서 ‘MMCA 현대차 시리즈 2022’로 주목을 받았던 최우람 작가가 이번 《이주하는 인간_호모 미그라티오》에서 매체 간의 이주를 시도한다. 최 작가는 서울에서 선보인 실재하는 작품 <작은 방주>를 3D 모델과 애니메이션으로 재현해 VR(Virtual Reality) 체험 형식으로 소개한다. 관람자는 전시연계 프로그램인 VR체험을 통해, 가상공간 속에서 전시장을 유영하고 있는 방주를 만날 수 있게 된다. VR로 구현된 <작은 방주>는 실제 서울에서 전시했던 작품과 동일한 모습을 띠고 있고, 뱃고동처럼 울리는 소리까지 함께 구현돼 방주가 떠있는 새로운 세계로의 이주를 관람객들은 경험해 볼 수 있다.

▲최우람 <작은 방주> VR 체험을 하고 있는 관람객들 ⓒ서울문화투데이

매체 간의 이동 작품으로는 제주항공우주박물관에서 전시되는 백남준의 <거북>도 있다. 울산시립미술관에서 대여해 전시를 하는 작품으로 <거북>은 166개의 텔러비전으로 구성돼 가로 10미터, 세로 6미터의 규모를 지니고 있는 큰 작품이다.

이 관장은 “거북이라는 생물을 육지와 바다에서 모두 생활할 수 있는 이주에 특화된 생물이다”라며 “백남준 작가는 거북이와 거북선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동서양의 철학을 오가고 실재와 비디오의 매체 간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영역을 가로지르고 횡단한 그의 삶이 마치 거북과 닮아 있지 않은가 싶다”라고 작품을 선보이는 이유를 설명했다.

백남준의 <거북>이 선보여지는 제주항공우주박물관이라는 공간과의 시너지도 주목할 만하다. 2014년 개관한 제주항공우주박물관은 항공우주의 비전을 제시하고, 항공우주 과학기술에 대한 미래 인재들의 에듀테이먼트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공간에서는 백남준의 <거북> 뿐만 아니라, 백남준이 기획한 세계 최초 인공위성 생중계 쇼 <굿모님 미스터 오웰>도 함께 소개된다. 항상 더 확장된 도약을 꿈꾸고, 이주를 꿈꿨던 백남준의 시선이 현시대와 맞물려 확장되는 느낌을 전한다.

▲제주항공우주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백남준, 거북, 1993, 3채널 영상, TV 모니터 166대, 재생장치 3대, 영상분배기 1대, 철 구조물, 150x600x1000cm, 울산시립미술관 소장 ⓒ서울문화투데이

‘제주’라는 공간으로부터 비롯된 ‘이주’에 대한 작품들도 눈여겨 볼만하다. 역사적, 문화적 이주로 정의되는 작품들이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 학업을 위해 서울과 런던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는 이지유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더 베슬: 배, 그릇, 혈관>이라는 작품을 선보인다.

이 작가는 근대의 세계화 과정 속에서 바다와 배를 통한 수송, 이주를 주목한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시절 제주와 오사카를 이었던 연락선 ‘군대환’을 통해 그 당시의 ‘이주’를 다룬다. 이 때 사람들은 물건을 싣는 칸에 몸을 실고 이주를 했었다. 이재수의 난, 태평양 전쟁, 4ㆍ3사건 등 이주의 이유는 다양했다. 작가는 이 이주가 가지고 있는 폭력성과 함께, 새로운 터전을 향해 꿈을 찾아 떠난 이들의 삶도 함께 주목해 회화와 영상 작업으로 선보인다.

▲이지유 <더 베슬: 배, 그릇, 혈관> 전시작 ⓒ서울문화투데이

오래된 역사 속 이주 이외에 현대에 있었던 제주로의 이주를 다룬 작품도 있다. 박정근 작가의 <입도조> 연작 시리즈다. 박 작가는 2012년 가족과 함께 서울에서 제주로 이주했다. 그리고 가족은 약 1년 간 제주 생활 후 제주를 떠났지만, 박 작가는 계속 제주에 남아 제주의 사람, 자연, 역사를 사진으로 기록해오고 있다.

입도조(入島祖)는 제주에서 나고 자란 곳을 등진 후 섬에 발을 딛고 정착해 첫 조상이 되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다. 박 작가가 제주로 이주했을 시점은 2010년 대 초 이효리, 이상순 부부의 제주 이주로 많은 사람들이 문화적 이주를 시도했던 때다. 박 작가는 이 시기의 이주민들을 찾아 사진으로 기록했다. 사진의 주인공에게서는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비치기도 하는데, 이는 다양한 이유와 바람을 가지고 입도를 했지만 새로운 터에 정착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드러내고 있다.

▲박정근 <입도조> 작품 앞 전시된 사진 속 인물들의 행정적 이주 이력 ⓒ서울문화투데이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는 2023년 신작으로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입도한 이들의 서사가 담긴 작품을 선보인다. 박 작가는 지금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주에 대해 주목한다.

<입도조> 연작과 함께 전시작 앞에는 사진 속 인물들의 주민등록등본이 크게 인쇄돼 있다. 어떤 이주를 거치고, 그 이주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적혀있는 작품이다. 학업, 직업, 결혼, 꿈의 이유로 끊임없이 이주를 반복한 이들의 흔적을 보면, 우리들의 삶 속 ‘이주’가 정말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느껴볼 수 있다.

‘이주’에 관한 이야기는 많은 전시에서 다뤄졌던 주제다. 하지만 ‘제주’라는 지역과 연결돼 풀어지는 ‘이주’는 조금 더 색다른 감각을 전한다. ‘섬’이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정서와 ‘제주’가 지니고 있는 역사들이 ‘이주’와 어우러질 때, 육지 공간에서 말할 수 있는 이주와는 다른 느낌을 전한다. 굉장히 독립적이고 공허함도 지니고 있지만, 반대로 그 공허가 무한함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