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오페라 <살로메>, 헤롯왕을 벗기고 요한의 죽음을 얻다
[공연리뷰]오페라 <살로메>, 헤롯왕을 벗기고 요한의 죽음을 얻다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3.10.11 10: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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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 개막작
원작 반전 연출, 배우들의 열연과 훌륭한 앙상블 이뤄내

[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여인 ‘살로메’는 6세기 이후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예술작품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는 유명 인물이다. 왕인 의붓아버지 앞에서 매혹적인 춤을 추고, 대가로 세례요한의 목을 요구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이 여인은, 카라바조의 <세례요한의 목을 들고 있는 살로메>나 솔라리오의 <살로메와 세례 요한의 목> 등 서양회화에서 오래도록 인기 소재로 쓰였다. 

▲제20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 개막작 <살로메> 공연 장면
▲제20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 개막작 <살로메> 공연 장면

하지만 오늘날 ‘팜므파탈’의 원형은 성서가 아닌, 19세기 후반 영국의 대표적인 작가인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의 희곡 <살로메>의 공이 크다.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는 우물에 갇힌 세례요한에게 한눈에 반해 죽음으로라도 그를 소유하려 한 인물이다. 결국 세례요한의 잘린 목에 키스하다 자신을 탐했던 헤롯왕에게 살해당하는 비운의 유혹자가 된다. 
지난 6일 제20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 개막작으로 오페라 <살로메>가 무대에 올랐다.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대표작으로, 이 작품 역시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이번 공연은 2016년 오스트리아 클라겐푸르트극장에서 연출가 미하엘 슈트르밍어가 연출한 프로덕션이다. 오페라뿐만 아니라 연극, 영화 연출ㆍ감독을 맡으며 종횡무진하는 그의 필살기가 무대 곳곳에서 묻어나는 공연이었다. 

시대적 설정은 유대 왕국이지만, 이를 제외한 모든 것들은 현대적이다. 살로메, 헤롯, 헤로디아스는 물론 경비대장, 시녀, 유대인과 나사렛인까지 모두 요즘의 옷차림을 하고 있다. 또한 반투명 칸막이들로 나뉜 거대한 원형의 회전무대는 각각의 공간성을 부여하면서도 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해 극 전체의 몰입도를 높였다. 성악가들이 회전하는 무대를 따라 이동하면서 장면이 전환되는데, 통일감 없이 배치된 반투명 타일이 호기심을 유발하는 역할도 했다. 

미하엘 슈트르밍어는 연출의 글에서 “살로메는 이 피로 물든 게임의 진짜 피해자”라고 말했는데, 이러한 해석은 작품 곳곳에서 느껴졌다. 그간 오페라 <살로메>를 도마에 오르게 했던 자극적 소재, 연출들을 여러 번 반전시키며 연출은 관객을 놀래켰다. 그의 <살로메>는 살로메를 대상화하지 않았다. <살로메>의 하이라이트 장면이라 할 수 있는 ‘일곱 베일의 춤’이 특히 그랬다. 

연출은 살로메 대신 헤롯의 옷을 벗겼다. 헤롯은 휴대폰으로 살로메를 촬영하려 했으나 이내 상황은 역전됐다. 살로메는 분위기에 취해 스스로 옷을 벗으며 춤을 추는 헤롯의 모습을 영상으로 담았다. 그리고 이 기괴한 모습은 회전무대를 둘러싼 반투명 가림막에 실시간으로 공유됐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춤을 춰달라는 약속을 지킨 살로메는 대가로 요한의 죽음을 얻게 된다. 잘린 머리가 아닌 목에 상처가 난 채 소파에 제물처럼 바쳐진 요한,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타 입 맞추는 살로메의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헤롯왕이 살로메를 탐할 때와 같은 구도와 같다. 

이 작품의 뛰어난 연출력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성악가들의 훌륭한 기량 덕분일 것이다. 슈투르밍어 연출 버전이 초연된 2016년 오스트리아 클라겐푸르트 극장에서 살로메로 출연했던 소프라노 안나 가블러는 이번에도 살로메 역을 맡으며 작품을 이끌었다. 큰 극장을 가득 채우는 대규모 오케스트라 사운드 위에 더해진 안나 가블러의 선명한 음색은 관객들을 순식간에 휘어잡았다. 특히 그의 압도적 연기력은 그간 우리가 알던 살로메에 대한 이미지를 없애고 새로운 살로메를 새기게 했다. 

헤롯왕을 맡은 테너 볼프강 아블링어 슈페어하케는 의붓딸을 탐하는 비도덕적 모습을 포장하지 않고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도, 장면 중간중간 가벼움을 더한 연기로 작품의 중심을 묵직하게 잡았다. 헤로디아스 역의 메조소프라노 하이케 베셀은 캐릭터에 맞는 음색과 이를 부각시키는 표정 연기로 씬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요한 역의 바리톤 이동환은 감옥에 갇혀 무대에 등장하지 않을 때부터 파워풀한 가창력으로 목소리만으로 공연장 전체를 사로잡았다. 등장이 많지 않았음에도 매 장면 꼿꼿하고 기품을 잃지 않는 요한의 캐릭터성을 확실하게 표현해냈다. 

이와 더불어 경비대장 나라보트 역의 테너 유준호, 살로메의 시녀 역의 메조소프라노 김예은과 유대인, 나사렛인, 병사들 모두 고르고 안정적인 가창력과 연기력으로 작품을 든든하게 뒷받침하며 완벽한 앙상블을 이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