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아시아권 최초로 개최한 한국의 제19차 ITI 총회와 국제공연예술 축제
[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아시아권 최초로 개최한 한국의 제19차 ITI 총회와 국제공연예술 축제
  •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 승인 2023.10.1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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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내가 살아온 90년을 바라보는 세월 동안 세상은 크게 3번은 바뀐 듯하다. 1) 세계 1차 대전이 끝나 온 유럽이 혼란스러웠던 <혼란의 시기>를 거치며, 2) 서구의 강대국들은 각기 힘을 겨루며 침략과 점령으로 아직 세계질서의 개념조차 모르던 아프리카와 아시아가 서방강대국의 먹이로 밖에 안 보이던 세월을 거치며 뒤늦게 출발한 독일이 600만의 유대인 학살이란 엄청난 현실을 직면했다. 당시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힘을 가지고 소리 없이 나타난 미국과 영국이 중심이 되어 독일과 이태리, 일본의 세력을 평정한 영. 미 중심의 세계질서는 제대로 안착도 하기 전에 3)온 세계는 다시 소련연방을 중심으로 한 동구권의 공산권과 영. 미를 중심으로 한 서방권의 민주주의 세계와 반분되어 치열하게 대립된 두 세계로 나뉘어왔다.

대한민국은 그 와중에 남. 북한으로 분단되어 6.25 전쟁이란 동족살인의 치열한 싸움 끝에 세계에서는 유일하게 분단된 국가로 남아있는 대한민국이 되었다. 그러한 분단국가의 수도인 서울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삶의 깊이와 세계의 평화를 논하며 세계각국의 색다른 아름다움과 함께 삶의 고뇌와 세계의 평화를 논하는 공연예술 축제를 열게 된 것이다. 이보다 더 뜻깊은 일이 있겠는가!!!

91개국의 공연예술계 대표가 참석한 서울에서의 제19차 ITI 총회는 많은 긴장과 우려를 뒤로하고 화기애애한 가운데 화려하게 마무리하며 다음 개최지인 프랑스의 마르세이유를 3년 뒤 20회(2000년) 개최지로 약속하며 막을 내렸다. ITI한국본부가 근 2년에 걸져 준비한 공연예술제의 앞, 뒤 얘기는 당시의 꼼꼼한 보고서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나의 기억 속에 남은 몇 가지 아쉬운 점과 신나는 추억으로 <세계가 서울을 발견한 점>과 <내가 세계를 발견한 점> 두 가지만 논한다. 당시의 동분서주했던 한국 연극계의 분위기와 주변에서 도왔던 방송계, 재계의 협조를 끌어낸 고 김의경 한국 회장과 김정옥 세계회장의 열정과 조직력에 오늘까지도 감탄하며 감사한다.

아직도 내 기억에 한 장면으로 남아있는 그림은 호주 옆에 있는, 당시 은둔의 나라로 가려져 있던 파푸아뉴기니아의 키 크고 선량하게 생긴 대표가 화려하고 들떠있는 대회장의 분위기를 보고 놀라며 어리벙벙 감탄했던 일이다. 회의 진행을 바라보던 모습이 뇌리에 또렸히 남아 옛 우리 선조들이 미국에서 열렸던 국제박람회의 행사에서 지었던 표정을 상상한다. 오늘도 그의 선량한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 것은 아직도 왜인지 모르겠다.

또 하나, 축제같이 치러진 행사는 당시 일정이 추석연휴를 걸쳐 치러져 걱정이 많았다. 요행이 새로 지어진 잠실 롯데호텔을 지원받아 각국의 대표단 200여 명에 가까운 대표들을 투숙시킬 수 있었다. 각국의 대표단들은 쾌적하고 편리한 환경을 누리며 행복해 했다. 추석연휴로 인해 한적해진 서울의 거리를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열린 공연장을 찾아다니며 한국의 발전상을 만끽하고 있었다. 세계인이 한국의 지하철을 발견하고 칭찬한 것은 이미 그때부터이다. 가난하고 뒤떨어진, 전쟁의 화에 찌든 나라로 무시하고 얕보았던 나라 대한민국, 적어도 6.25 전쟁 후 가난한 전쟁고아의 나라라는 선입견을 완전히 잠재운 훌륭한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세계가 공연예술인들을 통해 한국의 발전상을 발견하고 확인했던 절호의 기회였다.

 

세상은 넓고 삶은 유한하다

 

다른 한 편 총회와 축제 같은 공연예술제는 내가 세계를 발견한 기회이기도 했다. 당시 예술의 전당에서 진행된 몇 작품을 보고는 그들의 관심은 공연 자체보다도 웅장하고 쾌적한 공연장에 더욱 큰 관심을 표했다. 특히 쿠웨이트 대표들은 한국 공연장 건축에 관심을 가지고 내게 공연장을 설계한 건축가를 소개받기를 졸라댔다. 하지만 속으로 ‘아랍권의 가난한 나라가 무슨 돈으로 거대한 공연장을 짓겠다고 하나’ 하는 생각으로 그 진지함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1961년의 아랍의 가난상을 보며 독일에 도착했던 내 유학길의 비행기 정차지였던 바레인을 상기하며 당시 아랍권의 무질서와 가난했던 기억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2년 내가 한국 ITI 제6대 회장이 되어, 그리고 ITI 아시아지역협회 창립 초대회장이 되어 쿠웨이트서 초청한 ITI 20여 명이 이사회에 초청받아 쿠웨이트에 갔을 때 일이다. 나는 그들의 융숭한 대접과 전례 없는 후한 대접에 놀라지 않을 수없었다. 대표 1인당 벤츠를 대기시켜 외출을 돕지 않나, 호텔방에 융숭한 모든 물건과 세탁비까지 모두 무료였다. 나는 그 이전과 후에도 여러 나라에 초청받아 국제회의나 행사에 참석했지만 내가 참석했던 어떤 나라 회의에서도 그만한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내가 그들이 서울 와서 공연장 건축에 관심을 가졌을 때 그들의 재력을 내심 무시한 나의 무식을 깊이 반성했다. 또한 그들의 관심이 왜 공연장 건축에 꽂혔는가는 아름다운 해변을 중심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쇼핑몰과 백화점 형식의 건물 외에 그 나라에 공연장이 없었던 점을 보고 그들의 열망이 왜 공연장 건축에 꽂혔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내게 유감으로 오늘까지도 후회스러운 일은 당시 내가 1966 설립한 사단법인 한국공연예술원이 최초로 주최한 첫 국제행사인 [제1회 샤마니카 페스티벌]로 <한. 몽 문화교류 2000년>에 한국과 몽골제국의 굿을 비교하며 열었던 한국공연예술원의의 첫 행사를 그들에게 홍보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둔함과 옹졸하기까지 한 나의 결벽증을 후회한다. 나는 ITI행사에 행여 누가 될까 그들을 멀리했던 것인데 몇 대표는 나의 행사 샤마니카페스티벌을 보기 위해 자비로 2,3일을 더 묵으며 그 행사를 보고 가며 그들은 “우리 문화의 원류를 보게 해 주어 고맙다”고 지금까지도 그 고마움의 인사를 보낸다. 당시의 나의 소심한 결벽증을 지금도 많이 자책한다.

다음번에는 내친김에 한국에서의 ITI행사에 이어 2000년 프랑스의 아름다운 항구 마르세이유에서 열린 제20차 ITI총회에서 제6대 한국 ITI회장이 된 내가 제안한 아시아 태평양 지역협회>가 어떻게 결성되어 발전했는가에 대해 써볼까 한다.